경주에 가서 성궐(城闕)의 유허(遺墟)를 두루 돌아보고

2022. 9. 18. 12:44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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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속집 제2권 / 서(序)

《박씨존의록》 서〔朴氏存疑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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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조왕(始祖王)은 신성(神聖)으로 개국(開國)하여 삼성(三姓)이 주고받으면서 천년을 이어왔다. 그 천하를 공변되게 하여 태평한 자취를 연 것은 요순〔唐虞〕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개화되기 전 어둡고 혼란한 때여서 문자로 기술한 것이 없으니 그 크고 원대한 계책을 후세에서 칭송할 수 없다. 비록 그렇긴 하나 왕의 덕의 크기가 하늘과 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믿고 행함이 없어도 교화되어 백성들이 안락하고 사방 이웃나라가 화목하게 지냈다. 그 훌륭한 덕과 지극한 선(善)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니, 어찌 문자를 기다려야 비로소 전해질 수 있겠는가?

단양(丹陽) 선비 박용성(朴鏞成) 군은 왕의 먼 후예이다. 일찍이 후예들이 소원(疎遠)해서 선조의 사적에 대해 어두운 것을 개탄하고 널리 유적을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알리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까마득한 옛날에 속하여 문헌을 고증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다시 경주에 가서 성궐(城闕)의 유허(遺墟)를 두루 돌아보고 능침(陵寢)의 옛 제도를 깊이 연구하였다. 혹은 옛 노인들의 전언에 의지하고 혹은 시골 사람들의 말을 채집하여 듣는 대로 그때그때 기록하여 그것을 모아서 책을 만들었다.

무오년(1918) 겨울에 경성으로 나를 찾아와서 그가 편찬한 《존의록(存疑錄)》 1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성조(聖祖)의 사실(事實)은 허공의 뜬구름과 같아서 자취를 찾을 수가 없으니 제가 어찌 감히 서술하겠습니까? 이 책에 기재된 것은 오직 옛 도읍지의 유허(遺墟)와 고적(古蹟)에 관한 것일 뿐이나 그래도 그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종파(宗派)의 계보를 부록으로 붙여 선대(先代)의 남은 경사를 밝히려고 합니다. 다만 그 가운데 전해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매우 기이하여 불합리한 이야기와 감여(堪輿)와 같이 천박하고 고루한 술법이 많아 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책 제목을 ‘존의(存疑)’라고 명명하였으니, 이는 후세 사람이 더욱 자세히 바로잡아주기를 기다리고 한편으론 그 근본을 잊지 말게 하려는 것이니 책의 서문을 써주시기를 청합니다. 돌아가서 집에 갈무리해 두려합니다.”

나는 군의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태해지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드디어 서문을 썼다.

[주-D001] 삼성(三姓) :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를 가리킨다.

[주-D002] 행함이 없어도 교화되어 :

원문은 무위이화(無爲而化)이다. 성군(聖君)의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뜻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공자가 “행함이 없이 다스린 이는 순 임금이실 것이다. 대저 무엇을 하셨으리오?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셨을 뿐이다.〔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하였다.

[주-D003] 감여(堪輿) :

집터나 묘지의 형세 또는 그것을 보아서 길흉을 판단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