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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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오랑캐들이 왔을 때 목벌(木筏) 하나 철쇄(鐵鎖) 하나도 가로질러 놓아 막지 못해 의기양양하게 항해하도록 놓아두었습니다.
木筏 뗏목 철쇄[鐵鎖] 쇠고리를 여러 개 죽 걸어 이은 줄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3년 병인 > 9월 29일 > 최종정보 고종 3년 병인(1866) 9월 29일(을유) 흐렸다 맑았다 함 03-09-29[21] 강도를 지키지 못한 죄인 이인기 등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을 청하는 사헌부 대사헌 최우형 등의 계 [DCI]ITKC_ST_Z0_A03_09A_29A_00220_2004_016_XML DCI복사 URL복사 ○ 사헌부 대사헌 최우형, 사간원 대사간 송돈옥, 홍문관 검교부제학 이재원ㆍ김병필ㆍ정건조ㆍ김병시ㆍ이호준, 부제학 이재면, 검교전한 민승호ㆍ이명응ㆍ이면광ㆍ이근수, 집의 김석보, 사간 이응진, 전한 김규홍, 응교 홍만섭, 부응교 이창호, 장령 민희식, 지평 신헌구ㆍ김양연, 헌납 이만기, 교리 한용교..
2023.03.10 -
호적 수십 기가 강 언덕에 달려오곤 한 것은 이곳 지형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었는데, 강도의 제장들은 전혀 이를 깨닫지 못했다.
> 고전번역서 > 대동야승 > 일사기문 > 일사기문 > 최종정보 일사기문(逸史記聞) 일사기문(逸史記聞) [DCI]ITKC_BT_1353A_0010_000_0010_2002_014_XML DCI복사 URL복사 찬자 미상 ○ 노적(奴賊)은 곧 건주위(建州衛 만주에 있는 여진족의 근거지)이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봄, 적의 세력은 치열하고, 병마 또한 정예하였다. 그들은 중원을 가리켜 남조(南朝)라 부르는 등 말씨가 매우 불손하여 장차 함부로 날뛸 조짐이 있었다. 이에 천자는 진노하여 양호(楊鎬)를 요동도어사(遼東都御史)로 삼고 이여송(李如松)을 총병(摠兵)으로 삼는 한편, 특히 도독 유정(劉綎)을 보내서 10만 군대를 조발하고 또 우리나라에 명해서 건주(建州)를 협공하게 하여 적의 섬멸을 함께 ..
2023.03.09 -
적군의 배가 강(江)을 뒤덮어 올라올 때를 당하여 당초 그 사이에서 차단하려고 나서는 전선과 수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 3월 8일 임진 1번째기사 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통어영을 강화부에 합치는 것에 관한 심염조의 건의와 대신들의 논의, 구선복의 별단 국역 원문 .원본 보기 통어영(統禦營)을 강화부(江華府)에 합쳤다. 이보다 앞서 무술년065) 에 번고 어사(反庫御史) 심염조(沈念祖)가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신이 12진(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관방(關防)의 요해지(要害地)를 살펴보았는데 전후 설치하여 경영(經營)한 것이 너무도 주밀(周密)하였습니다. 차라리 진보(鎭堡)가 너무 많은 것이 걱정이 될지언정 방액(防阨)이 혹시 빠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설치한 규모가 들어가서 지키는 산성(山城)의 경우에 있어서는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수국(水國)에 물자를 공급하는..
2023.03.01 -
본도는 옛날에는 사면이 진흙이어서 배를 정박시킬 수 없고 사람이 통행할 수 없었으며, 사이에 또 큰물이 마구 흐르고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빙 둘러섰으므로, 갑진(甲津)의 한 통로 이외에..
>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5년 신축 > 10월 28일 > 최종정보 정조 5년 신축(1781) 10월 28일(정유) 05-10-28[01] 병조 참의 윤면동이 구언에 응답하는 상소문 [DCI]ITKC_JT_V0_A05_10A_28A_00010_2005_007_XML DCI복사 URL복사 병조 참의 윤면동(尹冕東)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대저 융정(戎政)의 근본은 인재를 기용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연전(年前)에 금군(禁軍)의 기사(騎士)를 취재(取才)하는 법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武士)들이 거개 모두 좋아서 날뛰면서 한번 이 추천(推薦)에 들기만 하면 순서에 따라 승천(升遷)하여 초사(初仕)를 앉아서 점유할 수 있다고 여겨 흐뭇해 하면서 실가(室家)에서 서..
2023.01.10 -
동검도(東儉島)는 물만 나가면 강화도와 바로 육지가 연결되고 있어 매우 요해지이므로
매음도(煤音島)는 석모도와 어유정도 사이에 있던 섬으로, 매도(煤島), 구음도(仇音島), 구음섬, 그음섬, 글음섬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 숙종 때에 간척사업으로 석모도에 합쳐졌으며,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 궁궐에 깔던 박석을 채굴하던 곳이라고 한다. 동검도(東檢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에 있는 섬으로,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다. 1985년에 동검도 북쪽과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를 지으면서 육지와 이어졌으나, 다리 아래로 바닷물이 통하지 못하여 갯벌이 변형되었다.[1] 고전번역서 > 월사집 > 월사집 제39권 > 서 상 > 최종정보 월사집 제39권 / 서 상(序上) 회양(淮陽)의 시판(詩板)을 다시 건 것에 대한 서(序) [DCI]ITKC_BT_0282A_0..
2023.01.02 -
강도로 가느라 40여 일을 배 위에 있으면서 위험한 일에 놀라 겁을 내고 찬바람을 쏘이다 보니, 묵은 병이 갈수록 악화되어 기력(氣力)이 거의 다하였습니다.
고전번역서 > 고산유고 > 고산유고 제5권 하 > 잡록 > 최종정보 고산유고 제5권 하 / 잡록(雜錄) 공사 무인년(1638, 인조16) 4월 〔供辭 戊寅四月〕 [DCI]ITKC_BT_0332A_0070_110_0020_2016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사룁니다. 제가 외람되게 형편없는 몸으로 과분하게 성명(聖明)의 지우(知遇)를 받아 오래도록 궁학(宮學)의 사부(師傅)로 몸담았으니, 감당할 수 없는 그 총탁(寵擢)과 전대(前代)에 볼 수 없었던 그 은우(恩遇)는 일일이 세어서 죄다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제가 비록 목석(木石)처럼 우둔하고 돈어(豚魚)처럼 무지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한없이 감격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려고 꾀하지 않겠습니까. 몇 년 동안 양전(兩殿)께서 보내 주신 ..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