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관련(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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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國都)에서 바다에 가는 것이 "2, 3일의 노정(路程)입니다."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25일 乙酉 1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진둔·이관이 양화도에 나가 노니, 정인지·김하 등을 보내 위로하게 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진둔(陳鈍)·이관(李寬)이 양화도(楊花渡)에 나아가 노니, 정인지·김하·우부승지 권준(權蹲) 등이 진둔 등을 보고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인들이 강상(江上)에 출유(出遊)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신 등을 보내었습니다." 하니, 진둔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잠시 와서 유관(遊觀)할 뿐인데, 무슨 뜻으로 재상을 보내 와서 위로합니까?" 하고, 드디어 서남쪽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국도(國都)에서 바다에 가는 것이 멉니까?" 하니, 김하가 말하기를, "2, 3일의 노정(路程)입니다." 하였다. 진둔 등이 말하기를, "예전에 예..
2023.06.14 -
지진의 이변이 열흘 사이에 두 번이나 발생하였으니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7년 갑오 > 6월 3일 > 최종정보 선조 27년 갑오(1594) 6월 3일(경술) 27-06-03[03] 지진으로 인해 왕이 물러날 뜻을 알리고, 비변사 양사 옥당 등이 주문하는 일과 섭정국이 도성의 지세를 살필 일을 아뢰다 [DCI]ITKC_JT_N0_A27_06A_03A_00030_2005_012_XML DCI복사 URL복사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비변사ㆍ양사ㆍ옥당을 인견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심수경,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우찬성 최황(崔滉), 호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형조 판서 신점(申點), 대호군(大護軍) 조경(趙儆),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 동부승지 이수광(李..
2023.06.13 -
통과한 곳은 멀고먼 구정(鉤町)과 누와(漏臥)의 지역이며, 지나간 곳은 염롱(冉隴)과 애뢰(哀牢)의 관문이고,
고전번역서 > 해동역사 > 해동역사 제45권 > 예문지 > 최종정보 해동역사 제45권 / 예문지(藝文志) 4 ○ 경적(經籍) 4 중국 서목(中國書目) 2 동국기사(東國記事) 등소경(鄧少卿)의 《봉사시초(奉使詩艸)》 ○ ‘《봉사시초》의 서문’에, “옛날에 장부라고 일컬어지는 자는 높은 데 올라가면 시를 읊고 산천에는 제사를 지내어서 모두 원대한 계략이 있음을 말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은 우혈(禹穴)을 찾아보고 오호(五湖)를 바라보아 문장이 드디어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필마(匹馬)로 외로이 가서 반표(班彪)는 유거감부(遊居堪賦)를 지었고,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양수(楊修)는 편안히 쉴 누관(樓觀)을 지었다. 소자범(蕭子範)은 동정(東亭)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탈 생각을 하지 ..
2023.06.08 -
장통교(長通橋)에 이르러 작별하고 송강(松江)을 건너서 점심을 먹고
고전번역서 > 하재일기 > 하재일기 1 > 신묘년 > 최종정보 하재일기 1 신묘음청록(辛卯陰晴錄) / 신묘년(1891) 8월 14일 [DCI]ITKC_BT_1441A_0010_080_0140_2011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맑음. 박인오(朴仁五)가 집리(執吏)의 사통을 가지고 와서 뜯어보니, 도상대감(都相大監)이 “지석(誌石)을 20일까지 구워서 해천(蟹川) 이 참판 댁 묘지기네 집으로 보내라고 하교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20일 안으로는 만들어 보낼 수 없다고 회통(回通)하고 술값으로 1냥을 주어 보냈다. 천유(天裕)가 내려가는 편에 당목 55필, 항라 3필, 양사(洋紗) 10필과 원유가 부탁한 각장 16장을 결복(結卜)하여 포구로 나가 배를 얻어 짐을 싣도록 부탁하고 돈 15냥을 마..
2023.05.14 -
용산(龍山)은 물로는 배가 다니고 땅으로는 수레가 다녀서 밤과 낮을 두 번만 지나면 경도(京都)에 도착하기 때문에 귀인(貴人)들이 이곳에 별업(別業)을 많이 경영하곤 하였다.
고전번역서 > 도은집 > 도은집 제4권 > 문 > 최종정보 도은집 제4권 / 문(文) 추흥정기〔秋興亭記〕 [DCI]ITKC_BT_0034A_0060_010_0040_2011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용산(龍山)은 평소에 호산(湖山)의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토지도 비옥해서 오곡이 모두 잘되었다. 게다가 물로는 배가 다니고 땅으로는 수레가 다녀서 밤과 낮을 두 번만 지나면 경도(京都)에 도착하기 때문에 귀인(貴人)들이 이곳에 별업(別業)을 많이 경영하곤 하였다. 전(前) 봉익대부(奉翊大夫) 김공(金公)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휴양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소 동쪽에 하나의 언덕을 얻었는데, 둥글게 높이 솟아올라 마치 배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으므로 ..
2023.05.04 -
한양도성 안에 두 강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선조실록 52권, 선조 27년 6월 3일 庚戌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지진으로 인해 왕이 물러날 뜻을 알리고, 비변사 양사 옥당 등이 주문하는 일과 섭정국이 도성의 지세를 살필 일을 아뢰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비변사·양사·옥당을 인견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심수경,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우찬성 최황(崔滉), 호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형조 판서 신점(申點), 대호군(大護軍) 조경(趙儆),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 동부승지 이수광(李睟光), 사간(司諫) 이상의(李尙毅), 지평(持平) 황시(黃是), 수찬(修撰) 정엽(鄭曄), 기사관(記事官) 성진선(成晉善)·장만(張晩..
2023.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