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 오류(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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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자[尺]를 한 보(步)라 했는데, 지금 보통 사람으로 시험해 보면 두 번 발을 떼는 땅의 거리가 여섯 자에 차지 않으니
1리 = 392미터=360으로 나누면 1보가 1.08미터 1리= 360보(1보=두번 발을 떼는 땅의 거리) 키 작은 성인 기준 두걸음으로 조선의 리수는 360*(1보=두걸음=6자)1.5m=540m 조선의 리수는 청나라 리수보다 크다. 고전번역서 >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12권 > 인사문 > 최종정보 성호사설 제12권 / 인사문(人事門) 동시 스크롤 전ㆍ지ㆍ산ㆍ장ㆍ탕(田地山場蕩) [DCI]ITKC_BT_1368A_0130_010_0640_2002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옛날에 여섯 자[尺]를 한 보(步)라 했는데, 지금 보통 사람으로 시험해 보면 두 번 발을 떼는 땅의 거리가 여섯 자에 차지 않으니, 그 자가 길고 짧거나 혹은 사람이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지금 중국에..
2023.11.16 -
남이(南怡)라는 이는 의산위(宜山尉) 남휘(南輝)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었다.
남이 충무, 南怡 훈구대신과의 신진세력의 갈등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북변에 건주위 여진족이 출몰하자 남이는 평안도선위사 윤필상이 지휘하는 정벌군에 우상대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그는 주장 강순, 좌상대장 어유소와 함께 파저강 인근을 공격하여 여진족의 지도자 이만주와 아들 고납합을 죽이는 대공을 세웠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한다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승세에 도취한 남이는 전장에서 회군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한시를 지어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하지만 그 자만이 훗날 자신을 찌르는 칼로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훗날 유자광이 그의 역모를 고변할 때 이 한시의 3행 ‘남..
2023.11.03 -
효릉(孝陵)이 세자(世子)의 위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는데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아들로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창경궁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9개월 만인 1545년(인종 1) 3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20년 30년 1550년 고전번역서 >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25권 > 경사문 > 최종정보 성호사설 제25권 / 경사문(經史門) 효릉(孝陵) [DCI]ITKC_BT_1368A_0260_010_0240_2002_010_XML DCI복사 URL복사 우리 조정이 명종(明宗)ㆍ선조(宣祖)의 사이에 인재와 영걸이 떼지어 나왔으니 그 소유래가 멀거니와, 실상인즉 성묘(成廟)의 고무(鼓舞)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효릉(孝陵)이 세자(世子)의 위에 있은 지 거의 30..
2023.05.16 -
신우(辛禑)가 명하여 갈로개산(葛蘆介山)에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또 빗돌을 세워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였다.
1. 몽고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공의 강직한 명성이 천하에 높았다. 공민왕 폐위에 반대함. 2. 덕흥군(德興君)에게 붙지 않아 교지(交趾)로 유배 교지(交趾)=검남=배트남 3. 사망일 : 태조실록 1398년,강한집 1383년,청장관전서 태종(太宗) 계사년(1413)에 卒 * 붓통과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 면작기념비 * 문익점과 문승로의 목화 재파를 기념하기 위해 1935년데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금성산 고분군 입구에 있으며, 기념비 뒤로는 자그마한 목화밭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 태종 때 의성 현령으로 재직했던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 땅에 목화씨를 파종한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 목화는 고려 공민왕 때 삼우당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금주성에서 목면종자를 필관에 넣어 귀국하였다. 그리고 조선 태..
2023.03.25 -
○ 1627년 11월8일 신미일에 황제(皇帝)가 붕어(崩御)하였다. 반열에 들어가 거애(擧哀)하였다.
위키백과 명 희종 천계제(明 熹宗 天啓帝, 1605년 12월 23일(음력 11월 14일) ~ 1627년 9월 30일(음력 8월 22일))는 중국 명나라의 15대 황제(재위:1620년 ~ 1627년). 휘는 유교(由校)이다. 태창제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효화황태후 왕씨(孝和皇太后 王氏, ? ~ 1619년) 소생이다. 나무위키 출생 1605년 12월 23일 사망 1627년 9월 30일 (향년 21세) 능묘 덕릉(德陵) 재위기간 제15대 황제 1620년 10월 1일 ~ 1627년 9월 30일 (7년) 제1대 청태조 천명제 (1559.02.21.~1626.09.30.) 후금을 건국한 인물이자 청나라의 초대황제입니다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음력 10월 25일) ~ 1643년 9월 21일(음력..
2023.03.12 -
100년 동안이나 예의(禮義)를 지켜온 나라이며 당당한 천승(千乘)의 군대를 거느린 임금으로서 자신을 낮추어
고전번역서 > 우복집 > 우복집 제5권 > 소차 > 최종정보 우복집 제5권 / 소차(疏箚) 또 올린 차자 《예기》에 이르기를, “예는 때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분수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이 이런 일을 할 때입니까? 신들이 듣건대, 성묘(成廟)께서 즉위한 뒤에 덕종(德宗)의 능침(陵寢)을 조금도 더 수축하거나 넓힌 일이 없이 묘에 부수되는 의물을 모두 세자(世子)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인(聖人)이 어버이에 대해 효성을 다하는 도리가 애당초 말단적인 형식을 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사직을 안정시켜서 국조(國祚)가 영원토록 이어져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큰 효성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
202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