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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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명의 군사가 강을 건너는데도 한 사람도 막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5년 정축 > 2월 22일 > 최종정보 ·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22일(임진) 맑음 · 15-02-22[18] 김경징 등에 대해 사형을 감하라는 하교는 합당하지 않다는 행 대사헌 한여직 등의 계 · [DCI]ITKC_ST_P0_A15_02A_22A_00190_2013_037_XML DCI복사 URL복사 · 행 대사헌 한여직(韓汝溭), 행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집의 채유후(蔡裕後)가 아뢰기를, ·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김경징(金慶徵) 등에 대해 사형(死刑)을 감하여 조율(照律)하라는 하교를 들었는데,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무슨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다고 그들의 사형을 용서하십니까? 혹시 이 사람들의 죄상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비록 죽일 만..
2022.09.01 -
강화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1권 > 上(1894년 이전) ② > 2. 병인양요 2. 병인양요 병인년(1866) 9월에 프랑스의 군함이 강화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순찰하기 위한 군함이며 침략할 뜻은 없었다. 혹자는 베르누 등이 사형을 당하고 서양의 사학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보복하러 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留守李寅夔가 겁을 먹고 도주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洋人들은 10일 동안 점거하고 있다가 많은 물품을 약탈해 갔다. 우리 나라에서는 강화도를 천애의 요새으로 생각하여 군량, 무기, 보화 등을 많이 비축하였으나 이때 모두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巡撫使李景夏와 中軍李元熙 등은 都監의 병졸 5천여 명을 인솔하고 文殊山으로 나가 강화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千摠..
2022.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