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명조선(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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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이 즉위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그가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임해군 사망 1609년 6월 3일 (향년 36세) 조선 경기도 교동면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광해군이 고변을 들었을 때야 "내 형이 그럴 리 없다." 했지만 삼사가 절도 안치를 청하자[17] 혐의를 기정사실화하여 유배한 뒤 옥사를 벌였다. 그리고 죄가 없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종들의 입에서 자백이 나올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나마도 종 1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군기를 땅에 묻었다고 진술했는데 왕은 "바보가 아닌 이상 벌써 파냈을 거다."라며 자신의 머릿속 각본에 따라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대사헌 정구, 이덕형 등이 전은론을 펴자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정인홍이 임해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기뻐했다. 그러니까 임해군이 역적이라는 ..
2023.11.15 -
또 이인임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한 것은 그 죄가 몹시 컸고 태조의 회군(回軍)은 신자(臣子)의 의리를 따랐으니, 태조와 인임은 그 처사가 또한 다릅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밝혀..
2.6. 권신의 말년[편집] 우왕이 즉위한 후 십수 년간 권력을 누렸으나 1386년에 몸이 병들어 사직하였고, 그의 빈 자리는 이인임의 일파였던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대신 자리하였다. 이들 또한 이인임 못지 않은, 혹은 그를 능가할 정도의 수탈을 자행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노비들을 풀어서 백성들의 논밭 뿐 아니라 심지어 관료들의 토지까지 강탈하고 다녔는데, 이때 땅 주인이 땅을 내놓지 않으면 수정목(水精木, 물푸레나무)으로 만든 몽둥이로 두들겨 팼기 때문에 세간에는 이른바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27] 그러던 와중인 1388년 1월, 염흥방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래 이인임 일당의 부패를 싫어하면서도 눈감아 주던 최영이 마침내 폭발하여 이성계와..
2023.11.14 -
지정(至正) 신묘년(1351, 충정왕 3) 2월 23일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 왔을 때 공이 수양성(首陽城)을 지키고 있었다.
고려 침입 홍건적은 고려를 2번 침입했다. 첫번째는 1359년(공민왕 8) 12월에 있었다. 11월에 3,000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북변을 약탈하더니 12월에 모거경이 이끄는 4만 병력이 침입하여 의주·정주·인주·철주 등지를 함락시켰다. 이어서 서경을 함락시키고 용강·함종까지 진출했다. 이에 고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 이듬해 정월에 2만의 병력으로 서경을 공격하여 찾고, 다음달에 함종의 전투에서 2만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도망가는 적을 추격, 섬멸하여 침입한 적 가운데 수백 명만 돌아갔다. 2번째는 1361년 10월에 있었다. 홍건적은 첫번째 침입 뒤 배를 타고 황해도·평안도의 연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 10월에 이르러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여 만 명의 ..
2023.11.10 -
만약 예의의 나라인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선비가 이 말을 듣는다면 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9년 계축 > 2월 26일 > 최종정보 영조 9년 계축(1733) 2월 26일(무인) 흐림 09-02-26[14] 중화의 사인 윤붕 등의 공적에 대해 아뢰고 금산 종용당 등에 사액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생원 김대하 등의 연명 상소 [DCI]ITKC_ST_U0_A09_02A_26A_00150_2020_186_XML DCI복사 URL복사 평안도에 사는 생원 김대하(金大夏)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절개를 지켜 죽고 나라를 위해 어려움을 막는 것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빈한하고 평범하게 살아 임금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천리와 인도가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충의(忠義)로운 기개를 격발하여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
2023.11.08 -
신씨(辛氏)가 비록 위조(僞朝)의 임금이나, 한 나라에 군림(君臨)하기를 16년 동안이나 하였고,
우왕 재위 1374∼1388.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사항 우왕은 백문보(白文寶) · 전녹생(田祿生) · 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 · 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2023.11.01 -
홍무 28년은 도전이 주살(誅殺)되기 겨우 6년 전인데 그가 편집 교열한 글을 인쇄 반포하게 되었다니
정도전 삼봉, 鄭道傳 출생사망 1342년 1398년 고전번역서 > 환재집 > 환재집 제4권 > 잡저 > 최종정보 환재집 제4권 / 잡저(雜著) 선수(瑄壽)가 고찰하건대, 선형의 유고는 경전을 보좌할 수 있으므로 대단치 않은 작품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 중에 종류별로 모을 수 없거나 한두 편에 불과하여 권(卷)으로 묶을 수 없는 편명들이 있으므로 《한창려집(韓昌黎集)》과 《방정학집(方正學集)》의 예에 따라 잡저(雜著)로 엮어서 문(文)의 첫머리에 싣는다. 진주 관고에 소장된 《대명률》의 뒤에 쓰다〔題晉州官庫所藏大明律卷後〕 [DCI]ITKC_BT_0632A_0050_010_0110_2017_002_XML DCI복사 URL복사 내가 진주에서 안핵사(按覈使)로 있을 때에《대명률》을 찾은 일이 있었다. 서리가 ..
202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