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명조선(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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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南朝)와 조선은 부자(父子)의 나라로 나라도 크고 군사도 많으므로 이로 인해 군사를 일으킨 지 6년이니 짐이 무엇인들 모르겠는가.
> 고전번역서 > 대동야승 > 속잡록 > 속잡록 2 > 최종정보 속잡록 2(續雜錄二) 임술년 명 희종(熹宗) 천계(天啓) 2년, 광해군 14년(1622년) [DCI]ITKC_BT_1333A_0020_000_0010_2002_008_XML DCI복사 URL복사 1월 중전 유(柳)씨는 국문 상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번역함. 변방의 근심에 대해서 오랑캐 놈들과 중국이 저러한데, 더구나 우리 나라와 호의를 맺자는 것은 진실로 우리 나라를 좋아해서 그러는 뜻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중국과 협력하여 토벌할 것 같으면 제 놈들의 대적하는 힘이 분산될 것이므로 우리 나라를 한없이 유혹하는 것이며, 우리 나라 역시 저 적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을 양으로 곧 나가서 명 나라를 협조하지 않고 피난 온 명 나라 사람도 접견..
2023.10.24 -
명성조(成祖)도 독화살에 맞아 국경에 들어오기 전에 붕어(崩御)하였는데, 역사책에서는 이 사실을 숨겼다.
세종실록 100권, 세종 25년 4월 18일 계묘 4번째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의정부와 육조가 함께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는 것과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아뢰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의정부와 육조가 함께 나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두려우나, 다시 생각하오니 옛날 제왕도 시행하지 않았고 본조의 조종께서도 하시지 않던 일인데, 비록 중국 조정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나, 태종 황제(太宗皇帝)015) 께서 만년에 병환이 위독하여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신도 혼미하였으므로 부득이 그렇게 했던 것이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 일을 끌어다가 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옥체(玉體)가 불편하시다면 세자에게 사정을 대행시킬 뿐이고, 예..
2023.10.17 -
영조 30년 5월 9일 태종 황제의 기신의 망배례를 행하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5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1754년 청 건륭(乾隆) 19년 태종 황제의 기신의 망배례를 행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계상(階上)에서 태종 황제(太宗皇帝)의 기신(忌辰)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25면 【분류】왕실-경연(經筵)태종 황제의 기신의 망배례를 행하다 .원본 보기 【분류】 원문 국역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5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1754년 청 건륭(乾隆) 19년 ○上行太宗皇帝忌辰望拜禮于明政殿階上。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2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태종(조선) - 나무위키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
2023.10.15 -
명나라에는 호패가 없습니다. 실질적인 신분증 역할을 한 것은 노인(로인, 路引) 이란 것입니다.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3월 24일 甲寅 3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지평주사 권문의가 건의한 호패법을 의정부에 내려 의논, 시행케 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지평주사(知平州事) 권문의(權文毅)가 호패법(號牌法)을 행하도록 청하였다. 글은 이러하였다. "사람의 마음에는 순박(淳朴)과 야박(野薄)의 변함이 있는 까닭으로 법을 세움에는 상경(常經)과 권도(權道)의 다름이 있습니다. 명(明)나라 태조 황제(太祖皇帝)는 법령과 기강(紀綱)을 엄하게 하고 또 밝혀서 군민(軍民)의 무리에게 모두 호패(號牌)를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유망(流亡)할 마음을 근절(根絶)하여 호구(戶口)가 증감(增減)하는 폐단이 없어졌습니다. 이는 세상의 변함에 따라서 법을 바꾸는 방법입니다. 삼가 생각하건..
2023.10.13 -
우리 태조(太祖)와 태종(太宗)께서 왕업을 초창하고
>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집서 > 최종정보 양촌집서 양촌 권 문충공 유문 중간 서(陽村權文忠公遺文重刊序) [DCI]ITKC_BT_0036A_0010_000_0010_2000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우리 동방의 문헌(文獻)이 상고의 초기에는 고거(考據)삼을 만한 것이 없고, 은(殷) 나라가 망하여 기자(箕子)가 조선에 이르매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이 이에 비롯되었다.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고 팔조(八條)를 시행하니, 그 치화(治化)가 마침내 밤에도 바깥문을 잠그지 않고 행려(行旅)들이 꺼림없이 들에서 자기도 하며 아낙네들은 정신(貞信)하고 음탕하지 않아 예의의 융성함이 이때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 그 후 위만(衛滿)이 간사한 꾀와 폭력으로써 갑자기 강성해지고 백제ㆍ고구려가 강한..
2023.07.11 -
헌릉의 비문을 고칠 것을 청하는 소〔請改獻陵碑文疏〕
고전번역서 > 인재집 > 인재집 제2권 > 소 > 최종정보 인재집 제2권 / 소(疏) 헌릉의 비문을 고칠 것을 청하는 소〔請改獻陵碑文疏〕 [DCI]ITKC_BT_0046A_0020_010_0040_201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그윽이 생각건대, 지난 무인년(1398, 태조7)에 권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들이 태조께서 환후(患候) 중임을 틈타 어린 세자를 끼고 국권을 전단(專斷)하고자 일을 꾀하였습니다. 밖으로는 정도전(鄭道傳) 등이 숙위(宿衛)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해 놓고 궁궐 옆에 무리 지어 모여서 밤낮으로 모의를 하였고, 안으로는 이제(李濟) 등이 주야로 곁에서 모시면서 남을 헐뜯어 좋지 않은 곳으로 밀어 넣어, 안팎이 서로 의지하니 그 명성과 위세가 자못 드러나 당시 식자들 가운데 ..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