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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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묘(明廟) 때에 남방의 죄수들을 석방하여 왜란을 피할 수 있게 하셨던 성대한 뜻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10년 무오 > 10월 10일 > 최종정보 광해군 10년 무오(1618) 10월 10일(을축) 10-10-10[04] 호조가 양 경략이 군량을 요구할 때 충당할 방법을 아뢰자 윤허하다 [DCI]ITKC_JT_O0_A10_10A_10A_00040_2005_020_XML DCI복사 URL복사 호조가 아뢰기를, 양 경략(楊經略)이 교일기(喬一琦)ㆍ유(劉) 두 유격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만포(滿浦)에서 오랑캐의 동태를 정탐하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경략의 뜻이 우리 나라 땅을 통해서 병력을 진격시키기를 옛날 조충국(趙充國)이 말한 ‘자리 위를 밟고 지나듯이 군사들이 지나갔다.’고 한 것처럼 조용히 해서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의주(義州)로부터 만포에 이르러 강을 건너 공..
2023.10.31 -
길을 거절한 날에 적군 100만을 맞아 7년 동안 여러 전쟁을 치러 왜구를 크게 쳐부수었으니
고전번역서 > 소앙집 > 소앙집 > 최종정보 소앙집(素昻集) 하편 《상하이주간(上海週刊)》 사설 5월 9일 특간호, 중화민국 14년(1925) [DCI]ITKC_BT_1542A_0020_000_0040_2020_001_XML DCI복사 URL복사 한국과 중국의 호걸에게 격문을 보내 / 檄中韓豪傑 일본을 막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리 / 拒倭雪國恥 동맹을 함께 맺고 지켜서 / 結共守同盟 동아시아의 평화를 보존하리라 / 保東亞平和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화를 입혀서 한국과 중국의 호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개한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라는 자가 중국에서 전쟁을 일으키려 먼저 조선에 길을 빌렸는데, 예로부터 한국인은 양국이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을 잘 알았고, 형제의 동맹을 저버리기 어려워..
2022.11.28 -
종루(鍾樓)에서 한강사이에 수만 여명을 늘어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차례로 나가며 베었는데
> 고전번역서 > 대동야승 > 재조번방지 > 재고성 강조번방지 2 > 최종정보 재조번방지 2(再造藩邦志 二) 이때에 이르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모였다. 이때에 지방의 장수들이 매양 의병의 활동을 저지하려 들고 적은 더욱 성하게 몰려들자 김천일은 보좌관들과 상의하여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마침 전라 병사 최원(崔遠)도 본도의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중로(中路)에 이르렀는데, 군의 정세가 갑자기 크게 변하여 하루에 50명을 참수(斬首)하여 필사의 뜻을 보여도 오히려 중지시키지를 못하니 김천일(金千鎰)과 합군(合軍)하여 강화도에 들어가서 사졸로 하여금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해를 넘겨 애써 지키니,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으나 그 뜻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신하로서 절개를 잃지 ..
2022.10.21 -
1593년 왜적 파견 병력 106만명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6년 계사 > 6월 29일 > 최종정보 선조 26년 계사(1593) 6월 29일(임자) 26-06-29[09]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DCI]ITKC_JT_N0_A26_06A_29A_00090_2005_008_XML DCI복사 URL복사 경략 접반사 윤근수(尹根壽)가 치계하기를, “이달 26일에 경략이 대청에 앉아서 신들에게 이르기를 ‘조령(鳥嶺) 등 세 곳에 관(關)을 설치하여 지키면 나는 오유충(吳惟忠)ㆍ낙상지(駱尙志)ㆍ심무(沈茂)의 군사를 주둔시킬 것이다. 내 처음 뜻은 본래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처음의 뜻은 적을 향하여 진격하는 데 있었으나 중국 조정에서 철병하려는 뜻이..
2022.10.21 -
親揭其額, 蓋翊衛中原底意也。‘중원(中原)을 도와서 호위한다
영조 2년 병오(1726) 10월 4일(임술) 비가 옴 02-10-04[37] 관서(關西) 출신으로 기절(氣節)을 숭상할 만한 충신 등에 대해 진달하고 관서의 인재를 녹용(錄用)할 것 등을 청하는 의주(義州) 유학 김덕로(金德老)의 상소 [DCI]ITKC_ST_U0_A02_10A_04A_00380_2014_049_XML DCI복사 URL복사 의주(義州)의 유학(幼學) 김덕로(金德老)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극히 미천한 몸으로 먼 변방에서 나고 자라 밭두둑 사이에서 무릎을 안고 지냈기 때문에 아는 것이라고는 곡식과 직물을 내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시비를 의론하는 것이나 정사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귀머거리나 소경보다도 낫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방 정세의 이..
2022.09.15 -
행주전투 그들의 병력은 7, 8만 명쯤 되었는데, 당시 행주에 주둔한 아군은 5, 6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 활을 쏠 수 있는 자는 겨우 70여 인에 불과하였
> 고전번역서 > 포저집 > 포저집 제31권 > 묘비명 > 최종정보 포저집 제31권 / 묘비명(墓碑銘) 4수(四首) 풍양군(豐壤君) 조공(趙公) 신도비명 병서 [DCI]ITKC_BT_0321A_0310_010_0030_2007_006_XML DCI복사 URL복사 공의 휘(諱)는 경(儆)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성(姓)은 조씨(趙氏)요,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시조(始祖) 휘 맹(孟)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三國)을 통일하고, 벽상개국 공신(壁上開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가 되었다. 그 후세에 휘 신혁(臣赫)이 또 문하시중평장사가 되었고, 평장사의 4대손인 휘 계팽(季砰)이 승지가 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지진(之縝)은 공조 참판을 추증받았고, ..
202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