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8. 12:41ㆍ대륙조선 일반
지정 기해년은 1359년으로 홍건적의 고려 침입으로 서경이 함락된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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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1년 기묘(1399) 10월 19일(을묘)
01-10-19[03] 판삼사사 설장수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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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졸(卒)하였다. 휘(諱)는 장수(長壽)요, 자(字)는 천민(天民)이었다. 그 선조는 회골(回鶻) 고창(高昌) 사람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에 아비 백료손(伯遼遜)이 가족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피난하여 오니, 공민왕(恭愍王)이 옛 지우(知遇)라 하여 전택(田宅)을 주고 부원군(富原君)으로 봉하였다. 임인년에 공(公)의 나이 22세에 동진사과(同進士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추성 보리 공신(推誠輔理功臣)의 호(號)를 하사 받았다. 정묘년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여 유이(流移)한 인호(人戶) 이타리불대(李朶里不歹) 등을 기취(起取)하는 것을 면제 받고, 인하여 관복(冠服)을 습용(襲用)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경오년 여름에 고려(高麗) 왕씨(王氏)를 복귀시키는 데 정책(定策)한 공(功)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임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그해 여름에 죄를 얻어 바다 가운데 섬[海上]으로 귀양갔는데, 태상왕이 잠저(潛邸) 때의 지우(知遇)라 하여 소환해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을 제수하고, 연산 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임금이 즉위하자,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게 되었는데, 행차가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니, 마침 황제가 붕어(崩御)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의 저지를 당하였다. 연도(沿途)에 머물면서 품(稟)하여 조정 명령을 받고, 인하여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서울에 갔다. 건문(建文) 원년 6월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주문(奏聞)하여 청(請)을 허락받고 돌아왔다. 10월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내려 주고,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 주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정(精)하고 민첩하며, 강(剛)하고 굳세며, 말을 잘하여, 세상에서 칭송을 받았다. 황명(皇明)을 섬기면서부터 명나라 서울[京師]에 입조한 것이 여덟 번인데, 여러 번 가상(嘉賞)을 입었다. 찬술(撰述)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또 시고(詩藁) 두어 질(帙)이 있다. 아들은 설내(偰耐)ㆍ설도(偰衜)ㆍ설진(偰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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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손(偰遜) 초명은 백료손(百遼遜)이며, 위구르[回鶻]사람이다. 대대로 설련하(偰輦河)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따라 설씨(偰氏)가 되었다. 그의 고조인 악린첩목이(嶽璘帖穆爾) 때부터 원(元)나라에 귀의하여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부친 설철독(偰哲篤)은 벼슬이 강서행성 우승(江西行省右丞)에 이르렀다. 설손은 순제(順帝) 때 진사에 합격하고 한림학사를 역임한 뒤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어서 황태자에게 경서를 수업하였는데, 승상 합마(哈麻)의 시기를 받아서 단주수(單州守)로 나가게 되었다. 부친상을 지내면서 대령(大寧) 땅에 머물러 살았는데 홍건적(紅巾賊)이 대령을 핍박하니,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자제들을 거느리고 병란을 피해 고려로 왔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태자를 시종하였으므로 설손과 안면이 있어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집을 하사하였으며 부원후(富原侯)에 봉하였다. 공민왕 9년에 졸하였다. 그의 저서인 《근사재일고(近思齋逸稿)》가 세상에 전한다. 아들로 설장수(偰長壽), 설연수(偰延壽), 설복수(偰福壽), 설경수(偰慶壽), 설미수(偰眉壽)가 있다.
설장수(偰長壽) 공민왕 때 색목인(色目人)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진양 태수(晉陽太守)를 지낸 뒤 돌아와서 상소하여, 바닷가를 따라 성보(城堡)를 쌓아서 왜적(倭賊)을 방비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 때 찬성사가 되어 정란 공신(定亂功臣)의 훈호를 하사받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옮겼는데 정몽주의 당이란 이유로 파직되었다. 후에 본조에서 벼슬하면서 관향(貫鄕)을 하사해 주기를 청하니, 경주(慶州)를 본적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설장수는 문장이 고고(高古)하였고, 아우인 설경수는 해서(楷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는데 벼슬은 교서감 정이었다. 설장수의 손자 설순(偰遁)도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제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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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외이문(口外異聞) / 구외이문(口外異聞)
합밀왕(哈密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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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
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원(元)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
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漢)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당(唐)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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