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당(唐)과 대(大)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당사는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부른다

2022. 9. 16. 10:59대륙조선 일반

동문선 78 / ()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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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

 

부처의 도(道)는 자비와 희사를 덕으로 하고, 인과응보가 틀리지 않는 것을 징험으로 삼는다. 부처의 말은 지극히 크고 넓어 번역되어 중국에 전해지고, 사해에 파급되어 천년을 끊임없이 이어 왔다. 오래될수록 더욱 성하여 위로는 왕공 대신(王公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필부필부의 어리석은 자에 이르기까지 복리를 희구하여, 높여 신앙하지 않는 이가 없다. 사원과 탑과 사당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 나라는 신라의 말기로부터 부처를 받들어 섬김이 더욱 삼가하였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고려는 왕씨(王氏)가 나라를 통합하던 당초부터 신라의 정책을 그냥 사용하고 고치지 아니하여, 신비한 도움이 있기를 기원하여 중앙과 지방에 절을 많이 설치하였으니, 소위 돕는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의 시가(市街)의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당사(唐寺)이다. 방언에 당(唐)과 대(大)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당사는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부른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칸이 넘는다. 안에 3개의 연못과 아홉 개의 우물을 팠으며 그 남쪽에 또 5층의 탑을 세워서 풍수설에 맞추었다. 그 풍수설은 옛 서적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덧붙이지 않는다. 왕씨가 나라를 향유한 5백년 동안에는 여러 번 전란과 변고를 겪어서 이 절의 흥폐도 한두 번만이 아니었으니, 이 탑이 파괴된 것이 정확하게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조성하려 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뒤에 광승(狂僧) 장원심(長遠心)이라는 자가 있어서 권력 있는 자와 귀한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여 재목을 베곤 하였으나 마침내는 이루지 못하였다. 공양군(恭讓君)이 장수와 재상의 힘을 입어 조종(祖宗)의 왕업을 회복하고 즉위한 뒤부터는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쓰더니 이에 중 천규(天珪) 등에게 명하여 공인과 장인을 모집하여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신미년 2월에 일을 시작하였으니 옛터를 파헤치고 나무와 돌을 메워서 그 기초부터 견고하게 하였다. 겨울가지 가로 세로 여섯 칸을 세우니 크고도 넓었다. 여러 번 걸쳐서 5층에 이르고 평평한 돌로 지붕을 덮었다. 장차 준공하려 하는데 헌신(憲臣)의 간언이 있어서 중지하려 하였다. 그 때 우리 주상 전하(이성계를 가리킴)께서는 모든 조정의 관원을 통솔하는 지위에 계시면서 공사의 준공을 청하였다오래지 않아 공양왕이 임금의 도(道)를 실추하고 스스로 손위(遜位)하니 대명(大命 천명)이 전하에게 모이었다. 이하는 글이 없어졌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한 자질로써 하늘과 인심의 호응을 얻고, 문득 왕위에 올라 크게 인민과 사직을 주재하니 지극한 어진 마음은 살리기를 좋아하고, 큰 덕은 만물을 육성하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보필하니 다스리는 도는 밝고 높아 모든 구폐(舊弊)는 개혁되고 온갖 교화는 모두 새로워졌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줄 수 있는 정사는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불도의 자비롭게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숭상하는 법을 그냥 지키고 폐지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창업의 벽두에 훌륭한 법을 세우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남겨 후손에게 전한 것이 크고도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공사를 더욱 부지런하게 독려하여 드디어 공사의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실로 임신년 12월이었다. 계유년 봄에 단청을 장식하니 집의 아름답고 훌륭함이 구름 밖에 날아가는 것 같고, 새가 하늘에 비상하는 것 같다. 황금빛과 푸른 색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반공(半空)에 번쩍인다. 위에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중간에는 《대장경》을 모셨으니, 아래에는 비로자나(毘盧遮那)의 초상을 안치하니, 국가를 복되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길이 만세에 이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4월에 문수회(文殊會)를 열고 낙성식을 올렸다. 임금이 신(臣) 권근에게 명하여 그 시말을 적으라고 하였다. 신은 요사이 삼가 중의 말을 들이니, 탑을 세우는 것은 공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층(層)의 수(數)가 많고 적음에 따라 공덕의 높고 낮은 것을 밝히는 것인데 5층 이상은 불탑으로 그가 말하는 공덕보응(功德報應)의 설(說)은 지극히 크고 넓다. 그런 까닭에 아육왕(阿育王) 이후로 역대의 임금들이 높이 존숭하여 탑을 끊임없이 세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나라 때에 달마(達摩)가 무제(武帝)의 절을 짓고 탑을 짓는 일을 물은 것에 대한 대답에는 한 조각의 공덕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제(武帝)가 마음은 닦지 않고 재력(財力)만 소비하였기 때문에 한 발언인 것이다. 지금 연복사의 탑 건립에 재물이 민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력은 농민을 번거롭게 한 것이 아니니 그것이 공덕됨을 어찌 쉽게 헤아려 계산할 수 있겠는가. 공덕이 이미 아름다우니 응보는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인심과 천명이 경사를 함께 하며, 그윽함과 밝음이 함께 힘입어서, 복리와 은택을 영원 무궁하게 미루어 주고 큰 행복을 끝이 없도록 이어서, 나라와 더불어 아름답고 만세에 이르도록 더욱 견고할 것을 진실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