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춘저록의 풍악과 관동도 병풍시 및 기타 대륙역사 문헌

2022. 10. 13. 21:55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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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동의 경우에 있어서는 애당초 기자(箕子)가 봉지를 받은 국경으로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夫餘國)으로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이 발상한 지역이며,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국경으로 또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고구려 전성기에는 모든 요동의 일대와 여진족들이 사는 곳이 대부분 모두 고구려의 국경 안에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 때문에 해동의 강대국이 되었는데, 말엽에 이르러 군주와 신하가 도리를 잃어 땅은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에 빼앗겨 줄어들고 백성들은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방으로 옮겨가서 결국에는 국가가 전복되었으니, 불타고 남은 흔적을 다시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수천 년 동안 아직도 우리나라의 옛 국경을 수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국가가 부흥하고 멸망하며 번성하고 쇠퇴하던 시기와 병탄(倂呑)하고 분열(分裂)되었던 자취가 모두 이 한 폭의 지도에 기재되어 있으니, 또한 국가를 소유한 자가 서글피 탄식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척연히 두려움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의 근원은 모두 백두산에서 나오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경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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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후집 제1권 / 시(詩)○조천록(朝天錄) 근체〔近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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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한 줄기 동쪽 서쪽 풍경 다르지 않은데 / 一水東西境不殊
당나라 이후로 지도가 갈라졌네 / 大唐之後判輿圖
백성 풍속은 절로 황극으로 귀의하고 / 民風要自歸皇極
방언은 원래 통역에게 의지하였네 / 方語元來假象胥
중국 존중하는 마음 남아 구경거리 통쾌하고 / 尊夏心存瞻覩快
변방 오랑캐 풍속 누추하여 예의가 부족하네 / 邊胡俗僻禮儀䟽
북경은 여기서 삼천 리나 떨어졌는데 / 神京此去三千里
그저 왕령에 의지하여 험한 길에 오르네 / 只仗王靈躡畏途


홍재전서 제2권 / 춘저록(春邸錄) 2 ○ 시(詩)
어떤 사람이 풍악(楓嶽)에서 돌아와 관동도(關東圖)의 병풍을 나에게 보여 주므로, 그 병풍에 써서 돌려보내다 8수(八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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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가랑비와 저녁 남기 개니 / 江南小雨夕嵐晴
거울처럼 맑은 비단 물결 끝없이 편평하여라 / 鏡水如綾極望平
명사십리 해당화는 봄이 저물어 가는데 / 十里海棠春欲晩
한중천에 흰 갈매기 울며 날아가누나 / 半天飛過白鷗聲

이상은 경포대첩(鏡浦臺帖)을 읊은 것이다.


영취산 문전엔 절강의 조수를 마주했는데 / 鷲峯門對浙江潮
곧장 멋대로 흘러 석교를 띄우려 하네 / 直欲橫流泛石橋
고요한 밤 달은 밝고 중은 선정에 들었는데 / 夜靜月明僧入定
하늘가엔 잣나무 그림자만 흔들리누나 / 諸天柏樹影搖搖

이상은 낙산사첩(洛山寺帖)을 읊은 것이다.


깊은 바다 다한 곳에 최고의 대가 우뚝 섰으니 / 層溟盡處最高臺
오초는 동남쪽에 궤안처럼 펼쳐졌네 / 吳楚東南几案開
큰물은 하늘에 넘치고 하늘은 사방을 덮었으니 / 巨浸漫天天四蓋
풍류 태사가 술잔 멈추고 구경할 만하구려 / 風流太史可停杯

이상은 만경대첩(萬景臺帖)을 읊은 것이다.


정자를 두른 솔과 잣나무는 너무도 푸르른데 / 環亭松柏太蒼蒼
겹겹의 껍데기엔 오랜 세월이 쌓이었네 / 皮甲嶙峋歲月長
광대한 큰 바다는 끝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 浩蕩滄溟流不盡
수많은 배 돛대들은 석양을 띠었구려 / 帆檣無數帶斜陽

이상은 월송정첩(越松亭帖)을 읊은 것이다.


신령 담긴 큰 바위가 푸른 바다에 연했는데 / 巨石含靈碧海連
심상한 선객들이 목란선을 정박했었네 / 尋常仙客住蘭船
고벽의 붉은 글씨는 어느 때에 씌어졌던고 / 丹書古壁知何世
마고 선녀의 귀밑 푸르던 해를 돌아보며 웃노라 / 回笑麻姑綠鬢年

이상은 삼일포첩(三日浦帖)을 읊은 것이다.


높디높은 정자가 창공에 우뚝 솟아 있으니 / 高高亭子入蒼空
큰 바다 가운데 연꽃을 깎아 세운 듯하네 / 削立蓮花大匯中
낱낱이 여섯 모서리로 동여 놓은 듯 늘어섰으니 / 箇箇六稜森似束
태초부터 조화로 이뤄졌음을 누가 알리오 / 誰知造化自鴻濛

이상은 총석정첩(叢石亭帖)을 읊은 것이다.


돌 새기고 절벽 깎아서 한 누각을 세우니 / 雕石鐫崖寄一樓
누각 가에는 창해요 창해 가에는 백구로다 / 樓邊滄海海邊鷗
죽서 고을 태수는 뉘 집의 아들이던고 / 竹西太守誰家子
미인을 배에 가득 싣고 밤놀이를 하는구나 / 滿載紅糚卜夜遊

이상은 죽서루첩(竹西樓帖)을 읊은 것이다.


원기가 아득히 넓은 바다에 펼쳐 있는데 / 元氣蒼茫放海溟
어떤 사람이 여기에 망양정을 만들었는고 / 誰人辦此望洋亭
흡사 공자의 집을 마음대로 구경하여 / 恰如縱目宣尼宅
종묘와 궁장들을 역력히 보는 것 같네 / 宗廟宮墻歷歷經

이상은 망양정첩(望洋亭帖)을 읊은 것이다.


[주-D001] 석교(石橋) :
특별히 절강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의 명승(名勝)인 석량(石梁)을 가리키는데, 이 돌다리는 양쪽 산을 연접시키어 그 모양이 마치 교량과 같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고 한다.
[주-D002] 삼일포첩(三日浦帖) :
삼일포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포구(浦口) 이름인데, 동학(洞壑)이 맑고 그윽하며, 소나무와 돌이 기괴하고 예스러우며, 수중(水中)에 있는 작은 섬에는 푸른 바위가 있다. 신라 때에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詳) 등 사선(四仙)이 이 바위에서 노닐며 3일 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이렇게 일컫는다고 한다. 그리고 물 남쪽에는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봉우리의 북쪽 절벽의 석면(石面)에는 붉은 글씨로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 여섯 글자가 쓰여 있다고 한다.
[주-D003] 흡사 …… 같네 :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궁장(宮墻)에 비유하자면, 나의 담장은 어깨에 차는 정도이므로 집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엿볼 수 있거니와, 부자(夫子)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되기 때문에 문(門)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풍부함을 볼 수가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張》


홍재전서 제7권 / 시(詩) 3 장마가 막 개자 여러 신하들에게 읊어서 보이다 소서를 아울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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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막 개어서 구름이 만 리나 환히 걷혔으므로, 이를 대하니 기쁘기가 마치 묵은 때를 씻고 속세의 더러움을 깨끗이 닦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며칠 전에 경연(經筵)에 임어하여 나쁜 풍속을 바로잡는 데 있어 하교(下敎)대로 따르지 않는 폐단을 분명하게 말했었다. 마음을 고치려는 자는 나쁜 마음을 버리고자 하나 스스로 이룰 수가 없고, 면모만 고치려는 자는 면모를 고치고자 하나 그 방도에 어두우며, 견문(見聞)에 버릇이 된 자로 말하면 나약한 자는 겁을 내고 어리석은 자는 꾹 참고 고치지 않아서, 이들이 비록 깨달음에 선후는 있으나, 끝내는 한 궤도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내가 본디 잘 알고 있다. 조용히 앉아서 이를 묵묵히 생각해 보니, 그 숨이 찰 정도로 헐떡거리며 떠들어 대는 모양이 좋이 한 번의 웃음거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지난날 내가 잔뜩 움츠러들어 마치 조는 듯, 자는 듯하던 때에 날마다 얼음 몇 사발과 황련탕(黃連湯) 몇 첩씩을 마시던 번열(煩熱)난 창자에 비유하면 약간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되므로, 시 한 수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는 바이다.


장안의 큰길은 편평하기 숫돌 같은데 / 長安大道平如砥 장안의 저자에 장맛비가 막 개었도다 /
積雨新開長安市 십 일 동안 계속 번개가 창공을 날더니 / 飛空銀索十日圓 안탕산 한 가닥 천 길 물을 쏟아 내리네 / 一注鴈宕千丈水 큰 바다는 어룡굴에 변화가 무쌍하고 / 溟渤動盪魚龍窟 강수 한수는 우마의 물가가 아득하였네 / 江漢蒼漭牛馬涘 서풍이 저녁에 대지를 흔들어 와서는 / 西風夕撼大塊來 더운 구름을 구만 리 밖으로 몰아내어 / 空闊炎雲九萬里 나에게 부용전서 옷깃 헤치고 앉아서는 / 使我披襟芙蓉殿 동정호와 군산도 눈에 안 차게 하누나 / 洞庭君山不盈視 춘명문 밖에는 재앙과 복이 분분한데 / 紛紛倚伏春明外 깃발 세운 가마엔 뉘 집 자제가 탔는고 / 珂馬旖旎誰家子 구중문에 어로가 한가운데로 나 있어 / 九門御路當中出 나의 명명 게시하여 늘 눈여겨보노니 / 揭我明命而顧諟 천인의 한 이치가 기색이 하도 새로워 / 天人一理新氣色 소리 내어 크게 웃고 흡족히 기뻐하네 / 囅然以笑充然喜 미앙궁에는 뱀 베었던 칼을 진열했고 / 未央宮陳斬蛇劒 도산의 수레에는 방풍씨를 실었도다 / 塗山車載防風氏 춘왕정월이라 대일통을 이루고 나니 / 春王正月大一統 천하에 문자와 수레 제도가 똑같아졌네 / 天下同文與同軌 탕은 그물을 열어도 명을 좇지 않았고 / 湯以解網不用命 시엔 방기 천 리가 백성 살 곳이라 했네 / 詩曰邦畿民所止 망아지는 온순하여 끌채 밑에 엎드리고 / 婉婉欲伏轅下駒 꿩은 산에서 스스로 꿜꿜 울어 대도다 / 角角自鳴山上雉 의당 황극의 온화한 낯빛을 볼 뿐이니 / 須看皇極康而色 감히 일천 나무가 붉은빛을 다툴쏜가 / 敢爾千樹爭紅紫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하니 / 蓋聞修道之謂敎 그 가르침은 곧 예악 형정일 뿐이로다 / 禮樂刑政而已矣
[주-D001] 뱀 베었던 칼 :
한 고조(漢高祖)의 보검(寶劍)을 말한다. 한 고조가 미천했을 때에 취하여 택중(澤中)을 가다가 앞에 큰 뱀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서 그를 베었는데, 그날 밤중에 한 노구(老嫗)가 그곳에 나와 울면서 말하기를, “내 아들은 백제자(白帝子)로서 뱀으로 변화하여 길에 있었는데, 지금 적제자(赤帝子)가 내 아들을 베어 죽였다.”고 했다 한다.
[주-D002] 도산(塗山)의 …… 실었도다 :
방풍씨(防風氏)는 하(夏) 나라 때의 제후(諸侯)이다. 우(禹)임금이 일찍이 회계(會稽)의 도산(塗山)에서 천하의 제후들에게 조회 받을 적에 방풍씨가 맨 뒤에 오므로 그를 베어 죽였는데, 그의 뼈마디 하나만으로도 한 수레가 가득 찼다고 한다.
[주-D003] 탕(湯)은 …… 않았고 :
탕임금이 들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그물을 사면(四面)으로 쳐 놓고, “천하 사방의 짐승이 모두 내 그물로 들어오너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탕임금이 직접 그 그물의 삼면(三面)을 열어 버리고 새로 기도하기를, “왼쪽으로 가려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고, 내 명을 따르지 않으려거든 내 그물로 들어오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 시(詩)엔 …… 했네 :
《시경(詩經)》 상송(商頌) 현조(玄鳥)에 “도읍지 사방 천 리가 오직 백성들이 살 곳이로다.[邦畿千里 惟民所止]”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 황극(皇極)의 …… 낯빛 :
황극은 임금이 국가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법칙을 가리키고, 온화한 낯빛이란 곧 임금이 백성을 온화한 낯빛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書經 洪範》


백호전서 34 / 잡저(雜著)
풍악록(楓岳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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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출발하여 통제(統制)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2일(갑진)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야음불천(也音不川)을 건너고 또 관음천(觀音遷)을 거쳐 보리진(菩提津)을 건너고 통구원(通溝院)을 지나 길가 민가에서 말에 꼴을 먹였는데, 주인 성명은 전기천(全起天)으로 우리에게 벌꿀과 과일을 대접하고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드디어 단발령(斷髮嶺)을 오르는데 산 이름은 갈리치(葛离峙)이고 샛길이 험준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영상에 올랐더니 회정(檜亭)이 있었다. 섬돌에 앉아 쉬면서 풍악산을 바라보았더니 풍악의 여러 모습이 모두 눈 앞에 역력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도성문을 동으로 나와 여드레를 소비하며 / 東出都門八日行
금성을 지나치니 여기가 회양일레 / 金城踏盡是淮陽
마니령 마루에서 구름 헤치고 앉아 보니 / 摩尼嶺上披雲坐
일만이천 봉우리가 차례로 맞아 주네 / 萬二千峯次第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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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는 중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천을대에 올라가서 이곳 저곳을 바라보면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가리키며 알아보았는데, 그 중의 송라협(松蘿峽)은 신라(新羅)의 왕자가 있던 곳이고, 능호봉(凌灝峯)방광대(放光臺)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부처에게 절하던 곳이란다. 아, 왕자의 한 일은 장해서 한(漢)의 북지왕(北地王)과 그 열렬함을 겨룰 만하고, 고려 태조의 그 굉장한 규모나 후한 덕은 송(宋) 태조와 어깨를 겨눌 만도 했는데, 어쩌자고 이교(異敎)에 정신이 팔려 허탄한 말과 옳지 못한 유적을 후대에까지 남겨놓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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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金剛山)이 높고 가파르고 수려하기 동방에서는 으뜸인데, 그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되어 검산(劍山)에서 높이 치솟고 철령(鐵嶺)을 가로질러 추지(楸池)에서 기복을 이루고 이어 여기에서 서려 이루어진 것이다.
툭 튀어난 봉우리가 능호봉(凌灝峯)인데 그 봉은 흙과 돌이 섞여 있고 돌무더기 산이 죽죽 뻗어가다가 펄쩍 뛰어올라 영랑재[永郞岾]가 되고 또 갑자기 높이 솟아 비로봉(毗盧峯)이 되었는데 바위 전체가 솟아 봉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늘까지 치솟아 높고 거대하기로는 이와 맞먹을 봉우리가 없다. 비로봉에서 형세가 한풀 꺾여 내려오면서 험준하게 첩첩으로 싸인 것이 중향성(衆香城)인데 푸르른 바위 절벽이 둘러서서 성을 이루고 하얀 바위들을 바라보면 그 빛이 마치 분을 발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는 노송ㆍ잣ㆍ해송(海松)ㆍ만향(蔓香) 나무들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달아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이 솟아 있고, 그 아래 가로로 줄서 있는 것이 백운대(白雲臺)ㆍ금강대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이고, 그 시냇물은 만폭동(萬瀑洞)인데 백천동(百川洞)의 물과 만나서 남으로 흘러 회한(淮漢)의 상류가 된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서 망고봉(望高峯)이 되었는데 그 높이는 비로봉 다음 가고, 또 그 다음으로 백마(白馬)ㆍ현등(玄登)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서쪽을 향하여 엎드리려는 듯하다. 또 남으로 바닷가까지 나가서 들을 끼고 달려간 놈은 천후(天吼)ㆍ설악(雪嶽)ㆍ한계(寒溪)가 되었고, 서남으로 간 놈은 오대산이고, 곧바로 남으로 달려간 놈은 영(嶺)의 좌우 그리고 호(湖)의 서남쪽 줄기가 되고 있다.
비로봉 서쪽은 내산(內山)이라고 하는데, 바위가 우뚝우뚝 서있고 바람은 서풍을 받고 햇볕은 석양 햇볕을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그리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로봉 동쪽은 바위 사이로 흙이 꽤 많고 아침 해가 비치는데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그 기운까지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해를 가리고 구름 위까지 치솟아 있는데 그 쪽은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백 리도 다 못가 동해에 이르러 끝나고,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회수(淮水) 서쪽을 끼고 바다까지 다 못 가서 양강(楊江)과 만나 거기에서 끝나는데 천 리 절반 정도로서 가깝고, 북으로 뻗은 가지는 높은 산이 첩첩이고, 둥그렇게 서려 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연(九龍淵)이다. 만폭동은 바위낭떠러지가 수려하고 수석도 맑아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도 건널 만하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나, 구룡연은 어두컴컴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용과 새짐승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풍정(風霆)이 일고 괴물이 나타나고 하여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
밤에 보원과 얘기를 하는데 보원이, 정지상(鄭知常)은 어떤 인물이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 때 문사(文士)이고 그의 시가 깨끗하고 민첩하여 당인(唐人)의 기풍이 있었으나 요망한 중 묘청(妙淸)에게 현혹되어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보잘것 없는 사람이지요.”
했더니 또, 김부식(金富軾)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 말이, 문장력이 있어 삼국사(三國史)를 썼고 장군이 되어 묘청의 난을 토평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부식이 정지상과 명예 다툼을 했는데 번번이 이기지 못하자, 이어 지상을 모함해서 죽였다가 뒤에 결국 지상의 영혼에게 되죽음을 당했다고 합디다. 그게 무슨 좋은 사람이겠소.”
하면서, 부식이 죽은 일을 얘기했는데, 마치 두영(竇嬰)과 전분(田蚡) 사이에 있었던 일처럼 말하니 얘기가 매우 해괴하였다. 나는 전에 들은 바 없는 얘기이기에 여기에 써 두었다가 언젠가 누구에게 물어보기로 하겠다. 보원의 말에 의하면 김부식이 언젠가 시관(試官)으로 원(院)에 들어가 원의 문에다 시를 쓰기를,


촛불이 다하자 날은 새려고 하고 / 燭盡天將曉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네 / 詩成句已香
뜰 가득히 사람들 시끌시끌한데 / 滿庭人擾擾
장원을 할 자는 뉘라던가 / 誰是壯元郞



했는데, 지상이 그 시를 보더니 즉석에서 붓을 들고 삼경(三更)ㆍ팔각(八角)ㆍ낙월(落月)ㆍ부지(不知) 이 여덟 자를 써서 다섯 자씩 된 위에다가 각기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식이 자기 재주로는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모함을 하게 된 것이라고 운운하였다.


…..


7일(기유) 아침에 비가 조금 오다가 금방 개었다. 절간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웅장하고 사치스럽기가 장안사보다 더하여 마치 귀신이 지은 솜씨 같았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갑인년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중전(中殿)의 원당으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만약 부처를 섬겨 복을 얻게 된다면 절을 이렇게도 잘 지은 복력(福力)은 흉한 재앙을 충분히 소멸시킬 수가 있었을 것인데 결국 면치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더구나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축원하는 일이 어찌 흥왕(興王)으로서 할 일이겠느냐.”
하였다. 중이, -성화 6년(成化六年) 이 네 글자가 있는 본도 있음- 우리 성종 대왕이 사찰 전지에 대해 조세를 면제해 준 사패(賜牌) 및 원(元) 나라 태정(泰定) 2년 원 나라 황제의 호지고천축수성지(護持告天祝壽聖旨)ㆍ성유(省諭)ㆍ위이관(逶迤觀)ㆍ오탁정(烏啄井)ㆍ오불전(汙佛殿)ㆍ노춘당(盧偆堂) 및 세조 어실(御室)에 관한 것들을 꺼내 보였는데 그 중의 말이 이상야릇하여 더 캐물을 것이 없었다. 거기에서 나와 산영루(山映樓)에 올라 보니 역시 잘 지어진 집이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홍문(虹門)으로 누대 아래의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백헌(白軒)ㆍ북정(北汀)ㆍ박일성(朴日省)ㆍ최유연(崔有淵)ㆍ이지익(李之翼)이 남긴 시와 여러 구경 왔던 이들이 이름을 써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 절의 기적(紀蹟)을 보았더니, 절이 창건된 것은 한(漢)의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인데, 신라 탈해왕(脫解王) 1년에 부처 57구(驅)가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월지국[月氏]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는데 이른바 노춘(盧偆)이라는 자가 그 당시 고성(高城) 유수로서 그 곳에다 그 절을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불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중국보다 먼저이겠으나 그러나 거기에서 말한 원시 2년이 신라 탈해왕 1년도 아닐 뿐만 아니라 돌배를 타고 월지국에서 바다 건너 왔다는 말이 너무 허탄하고 가소로워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이 사실은 금강산 동쪽 기슭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모든 산이 거기를 중심하여 둘러 있고 일백 시냇물도 그 곳을 중심으로 감돌아 흐르는데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들이 만마(萬馬)를 수용할 만큼 크고 넓고 또 해를 가리고 구름 높이 치솟은 빽빽한 나무들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모두가 해송이 아니면 토삼(土杉)ㆍ적목들이다. 그리고 전우(殿宇)의 굉장하고 화려함, 문정(門庭)의 넓고 확 트임 또는 각 암자 자리 기타 시설물 그 밖의 기용(器用) 따위가 충분히 왕공(王公)과 맞먹을 정도이고, 금벽(金碧)의 장식이나 심지어 놀이개 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최고의 사치를 다하고 있었다. 아,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이 정도로 혹세(惑世)를 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여 이교(異敎)가 저렇게까지 판을 치고 있게 했단 말인가. 고인들이 천하 명산은 중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니, 참 서글픈 일이다.
조금 늦게 백련암(白蓮菴)에 있는 중 천오(天悟)라는 자가 왔는데 나이는 80이고 자기 말로 응상(應祥)의 도제(徒弟)이며 치언(雉彦)과는 동문이고 사명당 송운 유정(四溟堂松雲惟政)을 사숙(私淑)하고 있다고 하였다. 얘기를 나눠 보니 국내에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지 산과 물의 원위(源委)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중 계필(戒必)이란 자도 천오와 함께 종유하는 자인데 그와도 함께 얘기했다. 그리고 또 그의 말이, 금강산은 내산(內山)이 등이고 외산(外山)이 얼굴이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황룡(黃龍)에서 푹 솟고 추지(楸池)에서는 잠복했다가 힘차게 달려와서 여기에 와 이렇게 뭉치고는 다시 동해 쪽으로 가 머리를 수그리고 천후(天吼)ㆍ설악(雪岳)이 되었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가 대산(臺山)이 되었으며,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달려가 태백(太白)ㆍ소백(小白)이 되고 유두(流頭)에서 마무리를 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풍악산이 내산은 모두 바위뿐이어서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기만 하고 풍후(豐厚)한 맛이 없는 데 반해 외산은 높으면서도 흙이 많이 있고 동해를 내리보고 있어 서로 자웅(雌雄)을 이루고 있는데 노사(老師)의 말씀이 대체로 맞는 말 같소이다.”
하고, 이어 만폭동에서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는 얘기를 했더니, 천오가 다 듣고는 두 손을 마주잡으면서 하는 말이,
“선생께서는 사물을 잘 묘사해 내는 분이라 할 수 있으니 산중의 고사(故事)가 되기에 충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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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철(沈轍)이 지나다가 절에 들러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는 고 판서(判書) 집(諿)의 손자이고, 사간(司諫) 동구(東龜)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날 또 두 군을 통해 김 장군 응하(金將軍應河)의 애사(哀詞) 두 편을 들었는데, 둘 다 읊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어서 추후 기록하기로 하겠다. 말이 난 김에 명(明) 나라 희종(熹宗)이 김응하를 포증(褒贈)한 일에 관해 말을 해야겠기에 내가 두 군들에게, 당시 명 나라에서 포증할 때 천자로부터 조서(詔書)가 있었는데 그 조서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보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명문이 아니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건 그렇지 않다. 나도 그 조서를 읽어 보았지만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천자가 자칭 과인(寡人)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김군(金君)을 수양(睢陽)의 장순(張巡),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에게 비유하여 말하기를,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이 죽지 않았더라면 당(唐)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고, 문천상이 죽지 않았더라면 송(宋)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던들 과인의 나라에 신하 없는 폭이 되었을 것이다.’ 했는데, 그 말뜻이 전도되고 사체(事體)를 모르는 정도가 심하였다. 또 문장의 표현 방법까지 서툴고 껄끄러워 마치 고문(古文)을 흉내내 보고자 하였으나 문장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천자 나라에서 외국 신하를 포증하려면 조서를 만들 때도 반드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해야 할 것인데, 지어 놓은 글이 그 모양인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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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뒷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 중 하나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다가 침침해서 멀리 볼 수는 없었다.
그 절 벽상에 기(記)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기를 보니,
“이 굴은 의상(義相)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부상(扶桑)을 바라보면 망망한 큰 바다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하고,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안에 죽 들어온다.

“영동(嶺東) 한 구역을 옛날에는 창해군(滄海郡)이라고 불렀다. 장자방(張子房)이 이르기를, ‘동으로 가 창해국 임금을 뵙고 거기에서 역사(力士)를 만나 진시황에게 철퇴를 던지게 됐다.’고 했다 하니, 아마도 그가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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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을축) 새벽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가평(加平) 길을 거쳐 초연대(超然臺)를 지나면서도 안개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지 못하였다. 가평읍 아래 와서 조반을 먹고, 아현(芽峴) 남쪽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청평(淸平) 언덕을 지나 굴운역(屈雲驛) 마을에서 잤는데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의 형세가 매우 좋아 보여 올라가서 종을 시켜 치표(置標)를 해 두게 하였다. 그 주산(主山)의 이름을 물었더니 청취전(靑翠田)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운등산(云登山)이 되고 거기에서 또 동으로 달려가다가 회강(淮江)을 만나 거기에서 멎었는데 곱게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장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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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산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 경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유담(仙遊潭)ㆍ영랑호(永郞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夢□)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ㆍ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 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경한 곳을 적어 옛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에 나의 영귀(詠歸)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枮石亭)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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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집 1 / ()
 고을을 읊은  3수 〔三鄕 三首
[DCI]ITKC_BT_0628A_0010_010_0170_2016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남쪽의 백성과 만물 점차 쓸쓸해지는데 / 南維民物漸蕭索
대나무 울타리 가에 오솔길이 비껴있네 / 篁竹籬邊細路斜
새벽에 물고기 잡아 저녁끼니 제공하니 / 曉拾魚鰕供夜食
생애의 절반은 한인들과 뒤섞여있네 / 生涯半雜漢人家



갈대가 객 지나는 언덕에 나눠있는데 / 蘆荻平分過客岸
목면으로 누가 상파화와 흥정하는가 / 木綿誰博商婆花
포구 사람은 아직 상서 사랑 말하고 / 浦儂猶說尙書愛
농가는 지금도 찰방 집안을 전하네 / 農戶今傳察訪家



무협의 양대에 산은 백 겹이요 / 巫峽陽臺山百疊
모인의 대식국에 물결이 일렁였네 / 毛人大食水曾波
평생에 세 고을 좋음 익히 들었으나 / 平生慣聽三鄕好
온갖 한과 수심을 어찌 알겠는가 / 萬恨千愁可柰何

[-D001] 무협(巫峽) 양대(陽臺) :
무협은 촉(蜀) 땅에 위치한 무산(巫山)을 가리키고, 양대는 무산에 있는 누대의 이름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고당(高唐)에 노닐다가 꿈속에 신녀(神女)를 만나 동침을 하였는데, 신녀가 떠나면서 “첩은 무산 남쪽 높은 봉우리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저녁 양대 아래에 있습니다.” 하였다 한다. 《文選 宋玉 高唐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