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5. 21:06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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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1년 을묘(1735) 4월 15일(을묘) 맑음
11-04-15[21]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한재에 대한 대책, 김흥경이 상격을 사양한 일, 의관을 지나치게 가자하는 일, 우리나라의 표류인을 데리고 온 차왜를 접대하는 문제, 공목작미에 대한 폐단, 안흥에 제방을 쌓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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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이조 참의는 안흥(安興)의 상황이 어떠한지 와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이미 장계로 보고하였습니다만, 지형의 상황을 직접 보지 않으면 자세히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소신이 안흥의 지형을 그려 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도를 올려라.”
하니, 이종성이 안흥 지도를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소태현(蘇泰縣)은 어느 곳인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태안(泰安)의 옛 이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북(南北) 창고가 이 지도에 들어 있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방을 쌓는 일은 어떠한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안흥 포구(浦口)는 조수(潮水)가 밀려 들어와 바닥을 파내어 물이 깊이 모여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가운데 모래 둔덕이 있는 곳이 바로 두 조수가 서로 부딪혀서 수세(水勢)가 서로 다하는 곳입니다. 이는 토사가 조수에 밀려와서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에 쌓인 것으로, 조수가 많이 불어났을 때는 물이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만 조수가 빠졌을 때는 버선발로 걸어도 젖지 않을 지경입니다. 물이 모여드는 곳의 좌우가 모두 평평하고 낮은 들판이어서 수세가 분산되어 산만하므로, 이선(李墡)이 ‘한쪽 편에 제방을 쌓으면 수세가 전일해져서 모래 둔덕이 틀림없이 물결에 세차게 부딪혀서 터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지만, 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송진명(宋眞明)이 또한 ‘모래 언덕이 거의 터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림없이 송진명이 조수가 많이 불어났을 때만 보고 조수가 빠졌을 때는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역시 효연(曉然)한 점이 있다. 당초에 물이 다른 길로 흘러들어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그곳을 막으면 물길이 전일해져서 뱃길이 절로 통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조수가 빠지면 모래밭이 되어서 수세로 무너뜨릴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겠으니, 당시에 들은 것과는 판이하다. 또 제방을 쌓는 공정은 지금 얼마나 진행되었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이 조수가 들어올 때 보았더니 목책 윗부분만 정연하게 보였는데, 조수가 물러나기에 이르러서는 3리(里) 정도 돌을 쌓아 만든 제방이 거의 2, 3장(丈)에 이르렀는데, 보기에는 마치 신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수가 들어올 때는 물이 돌을 쌓은 것보다 아직도 1장 정도가 더 높으니 지금 다시 1장 남짓 더 높게 쌓은 다음에야 물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이선은 공역(功役)이 이미 절반을 지났다고 하지만 신은 아직 10분의 2, 3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논밭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바닷가에 조수가 서로 잇닿는 곳은 제방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쌓아서 바닷물이 세지 않도록 한 다음에야 기경(起耕)할 수 있고, 또 뭍물을 관개(灌漑)할 수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논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안흥 지역은 사면이 모두 바닷물에 씻겨 나가고 진흙과 모래가 모이는 곳이니, 설사 돌을 쌓아서 제방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찰흙으로 메워 막은 다음에야 물이 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흙과 모래로 메워 채우고 있으니 돌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흩어지고 무너지게 될 터이니 제방을 쌓지 않았을 때와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또한 바닷물 이외에 육지에서 흘러드는 시냇물이 전혀 없으니 어떻게 관개해서 전답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설혹 제방을 쌓는 일이 이미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두 조수에 휩쓸려 나가게 될 터이니 열흘 동안도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조운(漕運)과 전답을 만드는 것 모두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훗날 송진명과 같이 입시해서 가부(可否)를 함께 논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령(掌令 허집(許集))은 시골 사람인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본래 경중(京中)의 사대부입니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그는 허채(許采)의 동생으로, 임진년(1592, 선조25)에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신하 허완(許完)의 자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인(玉印)을 대내(大內)로 들이는 것을 택일하여 거행하라고 해당 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이다. -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주-D007] 안흥 포구(浦口) :
원문은 ‘安城浦口’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城’을 ‘興’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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