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2022. 10. 10. 16:04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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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15 / 기행(記行)

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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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9(1658, 효종9) 6 3일에 서울에 들어왔다. 전날에 조극선 덕유(趙克善德裕) 선생이 별세하고 아직 () 하지 않고 있었다. 슬프다! 선생이 지난해에 연로함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을 사람들이 모두 잘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이번에 별세한 것이다. 상사생(上舍生김수번(金壽蕃) 훌륭한 자질을 지녔는데, 그의 부친 대사성(大司成) 정부인(貞夫人) 상을 마치기도 전에 연이어 별세하여 김수번이 4 동안 상을 치르다 그만 슬픔으로 죽고 말았다. 슬프다! 이것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때 마침 바닷가로 귀양 죄수들을 사면하는 일과 임금이 사냥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로 양사(兩司)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서울로 들어온 즉시 언관(言官) 직임을 사직하였고,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논열할 것도 없었다. 옥당(玉堂) 소리(小吏) 와서 임금이 소대(召對)하겠다 하신다고 말을 전해 왔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비를 맞으며 도성을 나왔다. 10일의 일이다.

 

옹기점 포구에서 배를 탔다. () (𦐰) 따라왔는데, 규는 토정(土亭) 들렀다가 나중에 왔다. 토정이란 토정(土亭) 선생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고상한 행실과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서 세상을 우습게보고 자신의 멋대로 살다 분이다.

 

노를 저어 서강(西江)으로 내려가 밀물이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릉(子陵) 술을 사가지고 찾아왔기에 서로 마주 앉아 매우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와 작별한 잠령(蠶嶺) 아래에 이르러 빗속에 선유봉(仙遊峯) 구경하고 양화(楊花)나루를 지나 행주산성(幸州山城) 아래에 이르렀다. 산성 위에는 계사년의 승첩비(勝捷碑) 있다.

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 밀물 소리를 듣고 배를 띄우니 조수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얼마 빠지는 조수를 타고 공암(孔巖)으로 내려가 파릉포구(巴陵浦口) 이르니, 바다와 근접하여 강물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소금기가 있었다. 부도(鳧島) 지나면 남안(南岸) 장릉(章陵) 있고 장릉 아래는 김포군(金浦郡)이다. 뱃사람이 서쪽으로 심악(深嶽) 봉성(鳳城)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그곳이 바다 입구라고 하였다. 바깥은 조강(祖江)이라 하는데, 조강이란 강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또한 삼기하(三岐河)라고도 한다. 북안(北岸) 교하(交河) 오도성(烏島城)으로서, 서남쪽으로는 강화(江華) 바라다보이고 곧장 서쪽으로 가면 덕수(德水) 해암(蟹巖)이다. 이곳에서 닻을 내리고 한낮의 조수가 밀려들기를 기다렸다. 조수가 빠졌을 어부들이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치는 것을 구경하였다. 바닷사람이 더벅머리에 발가벗은 몸으로 배의 키를 잡자 그물이 조수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갈매기 수십 마리가 고기를 서로 잡겠다고 어지러이 나는데 사람이 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고기를 보느라 새는 아랑곳하지 않으므로 또한 사람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다.

 

조강의 동북쪽에 탄포(炭浦) 있고 위쪽이 낙하(洛河)인데, 연산조 갑자사화 때에 허암(虛庵) 이곳에서 세상을 피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범포(帆浦) 이르자 물맛이 짠기가 가시기 시작하고 흐린 물도 점차 맑아지더니 임진탄(臨津灘) 아래에 이르자 맑은 강이 되었다. 이곳에서 순풍을 만나 돛을 올렸다.

 

임진에서 위로 올라가자 강안(江岸) 비로소 바위 절벽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왕왕 짙게 우거진 수풀이 보였다. 강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  문성(李文成) 별장이고 한벽정(寒碧亭) 창랑정(滄浪亭) 모두 성씨(成氏) 집안의 별장이라고 강가 사람들이 말하였다.

 

북안(北岸)에는 적운(積雲) 있는데 사심(師心) 선생 옛집이 있고, 뒤에 사심 선생의 산소가 있다. 이분은 남에게는 겸손하고 인정이 많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하였다. 말을 때는 반드시 신중하였고 행동을 때는 반드시 과감하였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알차게 보고 알차게 실천한다는 것을 나는 이분에게서 보았다. 슬프게도 이분이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이제는 이상 없게 되었다.

 

협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강가 절벽이 깎아지른 듯하고 물은 맑디맑았다. 날이 저물자 산기운이 더욱 깊어졌다. 석기(石岐) 이르자 강촌의 아름다운 마을이 나왔다. 앞에 나루가 있고 위로 고랑도(庫硠渡) 북쪽 절벽 아래에 있다. 8월에 장마가 그치고 물이 빠지면 바닷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배에서 숙식을 하면서 고기와 소금을 파는 시장을 열어 장사를 하였다.

 

위에는 사현묘(四賢廟) 있다. (𦐰)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저물녘에 주암(舟巖) 정박하였는데 결성(郭結城) 별장이라고 한다. 다음 아침에 배로 떠나려고 하는데 주인이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상중이라 젊은 사위를 보내어 인사를 하게 것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능주(金綾州) 강가로 뒤쫓아 왔기에 배를 멈추고 만났다. 조그마한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만취정(翠亭)이라 하였다. 무슨 포구냐고 물었더니 자애포(紫涯浦)라고 하였다. 북안(北岸) 동포(銅浦) 하고 위에 어촌(漁村) 있는데, 옛날부터 이곳은 고려 시대 임춘(林椿) 강가 별장이 있던 자리라고 전해 온다.

 

저물녘에 돛을 올리고 호로탄(瓠蘆灘)으로 올라가니, 이곳이 바로 호로하(瓠蘆河)이다. 상류에 여섯 계곡이 있고 보루가 있다. 앞의 여울이 가장 험준하여 사미천(沙彌川) 이곳에서 합류된다. 상류에 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데 바위 절벽으로 인해 견고하게 남아 있다. 강가의 부로(父老)들이 전하는 말로는 옛날 만호(萬戶) 지키던 보루였다고 하는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 여러 차례 거란의 침입을 당했을 이곳이 격전지였는데 지금까지 유적이 이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을 있단 말인가. 위가 칠중성(七重城)인데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다. 이곳이 또한 신라와 고구려 나라의 접경지대였다고 한다.

 

강가의 감악산(紺岳山)에는 설인귀(薛仁貴) 사당이 있는데, 지금은 미신으로 받드는 음사(淫祠) 되었다. 노자암(鸕鶿巖) 지나 석포(席浦) 이르니 강산의 경치가 내려올수록 더욱 아름다웠다. 강의 위쪽에 앙암(仰巖) 있어 가장 기이한 절경을 이룬다. 앙암에는 바위 봉우리, 높은 절벽중연(重淵) 있는데, 연못 속에는 오래된 종이 하나 잠겨 있어 나라에 난리가 나면 울린다고 한다. 이는 물건이 오래되어 신령스러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석포에서 남쪽 강안(江岸)까지는 모두 자갈이 깔려 있고 강안의 절벽은 모두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들이다. 북쪽에는 고려 왕들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 있다. 강물이 매우 깊어 강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앞에 용이 살고 있어 용이 나타나면 가뭄이 든다고 한다. 동쪽에 아미사(阿彌寺) 있다.

 

마전현(麻田縣) 앞에 있는 강가의 절벽 위에는 보루가 있는데, 지금은 위에 총사(叢祠) 들어섰다. 앞의 포구를 당포(堂浦)라고 하는데 큰물이 들면 나룻길이 열린다.

 

수심이 얕은 여울이고 맞바람이 불어 돛을 내리고는 배를 끌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강(烏江) 지나자 거센 물살이 한풀 꺾이고 바람도 순해지기에 다시 돛을 올리고 호구협(壺口峽) 향해 올라갔다. 여울의 바위들이 매우 험준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마차산(摩嵯山) 북쪽 기슭으로 산이 깊고 물살이 급하다. 영평(永平)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에서 합류하는데, 여기를 상포(上浦)라고 부른다.

상포의 동쪽이 도가미(陶哥湄)인데 자갈과 모래펄이 많았다. 호구협을 지나면 율탄(栗灘) 나오고 율탄 위가 마탄(馬灘)인데, 여울가 암벽 사이로 물이 고여 있으나 깊고 험하여 수가 없다.

마탄을 지나면 기탄(岐灘) 나오고 기탄을 지나면 유연(楡淵) 나오며 유연 위가 유탄(楡灘)이다. 유탄에서 2, 3 가면 휴류탄(鵂鶹灘) 나오는데 위가 징파도(澄波渡)이다. 위가 귀탄(鬼灘)인데 웅연(熊淵) 문석(文石) 7, 8 떨어져 있다. 문석이란 웅연의 그늘진 벼랑에 있는 바위에 초서(草書) 같이 생긴 글자가 있는 것으로서, 모양이 기괴하여 무슨 글자인지 변별할 수가 없다. 예전에 수령이 돌을 떼어내 보았지만 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어 돌의 글씨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로 강가에 기록할 만한 옛날 일들이 많이 있겠으나 물어볼 만한 곳이 없었다. 징파도부터는 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미수 쓰다.

[-D001] 조극선 덕유(趙克善德裕) : 

1595~1658. 자는 유저(有諸), 호는 야곡(冶谷),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박지계(朴知誡) 조익(趙翼)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 예설(禮說) 밝았다. 시호는 문목(文穆), 저서로는 《야곡집(冶谷集)》과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가 있다.

[-D002] 김수번(金壽蕃) : 

1626~1658. 자는 연지(延之),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김시국(金蓍國) 아들이다. 14세인 1639(인조1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D003] 토정(土亭) 선생 : 

토정은 이지함(李之菡, 1517~1578) 호이다.

[-D004] 계사년의 승첩비(勝捷碑) : 

1593(선조26) 권율(權慄) 거둔 행주대첩(幸州大捷)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D005] 장릉(章陵) : 

인조의 생부(生父)로서 왕으로 추존된 원종(元宗) 능이다.

[-D006] 허암(虛庵) : 

정희량(鄭希良, 1469~?) 호이다. 정희량은 김종직(金宗直)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의주(義州)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고, 갑자사화에 즈음하여 모친상으로 시묘살이를 하던 조강(祖江) 가에 옷과 신발을 남겨 두고 자취를 감추었다.

[-D007] 문성(李文成) : 

문성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시호이다.

[-D008] 사심(師心) 선생 : 

이정호(李挺豪, 1578~1639) 가리킨다. 이정호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6대손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언(英彦), 호는 만각(晩覺), 젊을 때의 호는 사심이다. 박지화(朴枝華) 이난수(李鸞壽)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광해군 장단의 적운(積雲)에서 은거하다가 인조 대에 관직에 진출하였다.

[-D009] 칠중성(七重城) : 

대본에자가 결락되어 있어 보충하였다.

[-D010] 설인귀(薛仁貴) : 

614~683. 농민 출신으로 태종의 요동 정벌 응모하여 백의(白衣) 입고 분전한 것으로 이름이 났고 각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평양군공(平壤郡公) 봉해졌다. 그의 무용담은 소설이나 희곡 등으로도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적성현(積城縣) 감악사조(紺岳祠條) 의하면, 신라에서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산신(山神)으로 섬겼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봄가을에 향축(香祝)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D011] 중연(重淵) : 

연못의 이름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종연(鍾淵), 《연천군읍지(漣川縣邑誌)》에는 종담(鍾潭)으로 되어 있다.

[-D012] 숭의전(崇義殿) : 

고려 태조 왕건과 일곱 ,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을 모시던 사당이다.

[-D013] 총사(叢祠) : 

여러 잡신들을 제사하는 사당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