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북성 무창의 황학루와 조선의 진주 촉석루

2022. 9. 12. 11:13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고전번역서 > 동문선 > 동문선 제22권 > 칠언절구 > 최종정보

동문선 제2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무창(武昌)

[DCI]ITKC_BT_1365A_0220_010_0450_2002_002_XML DCI복사 URL복사

김구용(金九容) 

황학루 앞에는 강의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
강가에는 주렴과 장막 몇 천 집인가 / 沿江簾幕幾千家
돈을 추렴하여 술을 사서 회포를 푸노니 / 醵錢沽酒開懷抱
대별산은 푸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

고전번역서 > 동문선 > 동문선 제15권 > 칠언율시 > 최종정보

동문선 제15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진주 촉석루(晉州矗石樓)

[DCI]ITKC_BT_1365A_0150_010_0650_2002_002_XML DCI복사 URL복사

정을보(鄭乙輔) 

저 황학루가 어찌 혼자 으스대리 / 黃鶴名樓彼一時
최군이 수다스러워 우연히 시에 머물렀지 / 崔君好事偶留詩
올라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는데 / 登臨景物無增損
편액의 글 품격은 성쇠가 보이누나 / 題詠風儀有盛衰
옥 술잔을 높이 드니 강달이 솟아나고 / 玉斝高飛江月出
주렴을 반쯤 걷으니 영에 구름 드리웠네 / 珠簾半捲嶺雲垂
난간서 고개 돌리매 천지가 작아 뵈니 / 倚欄回首乾坤小
알리라 우리 골 경치 특별히 기이한 줄 / 方信吾州特地奇

[-D001] 최군(崔君) : 

당 나라 시인 최호(崔顥). 그가 황학루에 올라 명작시를 써 걸었다.

 

성소부부고 제25권 > 설부 > 최종정보

,,,,,,,,,,,,,,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청신하고 섬부하였으니,

목은(牧隱)이,

“경지(敬之 김구용의 자)가 붓을 내려 쓰면 마치 운연(雲煙)과 같다.”

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일찍이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폐백을 요동(遼東)에 바치니, 도사(都司) 반규(潘奎)가 경사(京師)에 잡아보냈다. 그 자문(咨文)에 ‘말 50필’이라 할 것을 ‘5천 필’이라 잘못 적었기 때문이다. 명(明)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나라가 요동백(遼東伯)과 사교(私交)한 것에 대해 성을 내고 또 말하기를

“말 5천 필이 오면 풀어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고 했다. 이때 이 광평(李廣平 광평부원군 이인임(李仁任)을 말함)이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는데 평소에 공의 무리들과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황제가 공을 대리(大理)에 유배시키니,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생은 명이라 하늘 뜻을 어이하리 / 死生由命奈何天
동으로 부상 바라보니 고향 길은 아득한데 / 東望扶桑路渺然
양마라 오천 필이 어느 제나 닿을는지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 핀 문 밖에는 풀만 수북 우거졌네 / 桃花門外草芊芊

라 하였고, 또 무창(武昌)에서 지은 시에서

황학루 앞에는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
강따라 발 드리운 주막은 몇천 챈고 / 沿江簾幕幾千家
추렴한 돈 술을 사와 회포를 푸노라니 / 醵錢沽酒開懷抱
대별산 푸르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

라 했는데, 공은 마침내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그뒤 참의(參議) 조서(曺庶)가 또한 금치(金齒)에 유배당한 수년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황주(黃州)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 어루고 / 水光山氣弄晴沙
버들 푸른 긴 뚝에는 천만 채 집이로세 / 楊柳長堤千萬家
무수한 상선은 성 아래 대고 / 無數商船城下泊
죽루의 연월에는 젓대 노래 드높네 / 竹樓煙月咽笙歌

라고 하였다. 나는 장부의 몸으로 좁은 땅에 태어나 천하를 유람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왔었는데 두 공(公)은 비록 이방(異方)에 유배되었으나 그래도 오ㆍ초(吳楚)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쾌사라 할 수 있겠다.

 

 고전번역서 > 각사등록 > 충청수영계록 > 고종 > 최종정보

충청수영계록(忠淸水營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5년(1868) 

12월 초1일

[DCI]ITKC_BT_1453A_0440_040_0350_2015_036_XML DCI복사 URL복사

공충도 수군절도사 신 장후식(張厚植)은 삼가 상고(相考)한 일을 아룁니다. 신의 영(營)은 바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중요한 통로이고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입니다. 긴중(緊重)하게 바다를 방비하는 것이 다른 곳과 견주어 매우 특별하니 미리 대비함에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바다를 둘러싼 성첩(城堞)이 모두 다 무너져 거의 형지(形止)가 없고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공해(公廨)도 수즙(修葺)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 또한 무너지고 떨어졌으니, 지금 보기에 매우 근심스럽고 민망합니다. 편안한 때일수록 위태로움을 잊지 않아야 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머뭇거리면서 세월만 보낼 수 없으므로, 신이 본영(本營)에 재직한 이래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들어갈 물력(物力)을 여기저기서 많이 마련하여, 성첩과 공해가 무너진 것은 곳에 따라서 수축하고 전함(戰艦)과 군계(軍械)가 썩어 상한 것은 차례로 개선(改繕)하였습니다.

신의 영 군관(軍官)인 전 낭청(郎廳) 장두급(張斗汲), 가의(嘉義) 고준행(高俊行), 토교(土校)인 절충(折衝) 이정혁(李廷赫)이 성첩과 공해를 감역(監役)하고, 군관인 출신(出身) 민치행(閔致行), 토교인 출신 백홍언(白弘彦), 판관(判官) 김광흠(金光欽)이 전함과 군계를 감역하였는데, 모두 일심으로 일을 맡아 처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役事)를 마쳐 또한 노고를 바친 단서가 많으니 포장(襃獎)할 만한 일에 합당할 듯하므로 삼가 새로 반포된 정식(定式)에 의하여 도신(道臣)과 함께 의논한 뒤 새로 마련한 것과 수보(修補)한 것을 모두 죽 기록하여 등문(登聞)하니, 해당 조(曹)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삼가 갖추어 계문(啓聞)합니다.

동치 7년 12월 초1일 절도사 신 장후식

 

다음

성첩을 수보한 내역〔城堞修補秩 질(秩)은 일종의 명단이나 목록〕

체성(體城) 2백 72파(把)

여첩(女堞) 4백 58타(垜)

 

공해를 수보한 내역〔公廨修補秩〕

영보정(永保亭) 2칸

능허각(凌虛閣) 4칸

황학루(黃鶴樓) 6칸

 

군기를 새로 마련한 내역〔軍器新備秩〕

화약(火藥) 1백 근

연환(鉛丸) 5천 개

화전(火箭) 50개

화전죽(火箭竹) 50개

화전기(火箭機) 20좌(坐)

 

군기를 수보한 내역〔軍器修補秩〕

조총(鳥銃) 40자루

 

전함을 수보한 내역〔戰艦修補秩〕

1전선(戰船 조선 후기 수군의 대형 군선) 1척(隻)

2전선 1척

귀선(龜船) 1척

방선(防船 조선 후기 수군의 중형 군선. 방패선(防牌船)) 1척

병선(兵船 조선 후기 수군의 경무장 군선) 1척

 

고전번역서 > 동주집 > 동주집 시집 제23권 >  > 최종정보

동주집 시집 제23권 / 시(詩)○착륜록1(斲輪錄一) 

동양위가 회수 가에서  를 추후에 차운하여 느낌을 적다〔追次東陽淮上韻紀感〕

[DCI]ITKC_BT_0337A_0320_010_0660_2017_005_XML DCI복사 URL복사

가시울타리 옆에  매어 두고 / 征驂曾繫棘籬傍
대나무 아래 연못가에서 함께 금주 즐겼었지 / 琴酒同臨竹下塘
꿈이 운림에 얽히니 혼이 아련히 떠오르고 / 夢繞雲林魂藹藹
정신으로 저승객과 사귀니 눈물 줄줄 흐르네 / 神交泉壤淚浪浪
 영위는 학으로 변해 화표주 비었는데 / 令威鶴化空華表
최호가  짓던 한양이 아득하네 / 崔顥詩題杳漢陽
〈촉주인일〉에 화답하려 하지만 / 欲和蜀州人日作
슬픈 노래 자주 끊어져  이루지 못하네 / 哀謳斷續不成章

[-D001] 동양위(東陽尉) ……  : 

동양위는 신익성(申翊聖, 1588~1644)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ㆍ동회거사(東淮居士)이다. 선조(宣祖)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에 봉해졌다. 회수(淮水)는 신익성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일대에 직접 조성한 선영 부근의 땅을 가리킨다. 이민구가 차운한 신익성의 시는 《낙전당집(樂全堂集)》 권3의 〈두와(斗窩)〉이다.

 

[-D004] 최호(崔顥) …… 아득하네 : 

최호는 당(唐)나라 때의 시인으로, 그가 지은 〈등황학루(登黃鶴樓)〉에 “황학은 떠나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은 천 년 동안 부질없이 유유히 흘러가네. 맑은 날 냇물엔 한양 숲 역력히 비치고, 봄풀은 앵무주 물가에 우거졌네.[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春草萋萋鸚鵡洲.]”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민구 자신을 최호의 고사에 빗대어 읊었는데 〈등황학루〉의 한양이 우리나라의 한양과 이름이 같고, 이민구가 있는 곳도 한강 가이므로 인용하였다.

 

고전번역서 > 암서집 > 암서집 제21권 >  > 최종정보

암서집 제21권 / 기(記) 

낙남루 기 정묘년(1927) 〔洛南樓記 丁卯〕[DCI]ITKC_BT_0663A_0210_010_0190_2016_006_XML DCI복사 URL복사

낙동강이 6~7백 리를 굽이쳐 흘러 영산(靈山)과 칠원(漆原)이 교차하는 곳에 이르면, 바닷물과 서로 통하여 아득히 넓고 가득 차서 멀리 압록강ㆍ두만강과 함께 나라의 남북에서 으뜸을 다투고, 강산 경물의 청허(淸虛)하고 비장(悲壯)한 경관은 또 중국의 오(吳)ㆍ초(楚) 지방과 매우 같다.

원문 : 又頗同於中州之吳楚

그러므로 동남 지방을 왕래하는 시인과 나그네가 이곳에 이르면 반드시 올라 볼 생각을 가져서 그 광활하고 원대한 심회를 깃들이려 하는데, 낙동강 위아래로 정자가 비록 많지만 대체로 모두 고립되고 비좁아서 배회하며 멀리 바라보는 즐거움을 펼칠 수 있는 것이 없다.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밀양 영남루(嶺南樓) 같은 경우는 실로 국내의 유명한 누각으로서 걸출한 웅위(雄威)가 있는 건물이지만, 청천(菁川)과 응천(凝川) 두 하천이 큰 낙동강에 대해서는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주(邾)와거(莒)가 되는 것에 불과하니, 또 누각과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다. 이 또한 조물주가 온전한 공을 빠뜨린 것인가?

함안(咸安)에 사는 성태영(成台永) 군은 선대의 재물을 바탕으로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다. 군이 하루아침에 홀연히 먹고 입는 비용의 나머지를 가지고 칠원 북쪽에 있는 덕남포(德南浦) 큰 강의 북쪽에 누각 한 채를 지었는데, 완공 후 이름을 ‘낙남루(洛南樓)’라고 하였다. 그 규모의 크고 화려함은 비록 진주과 밀양의 두 누각에 미치지 못함이 있는 듯하지만, 모름지기 낙동강 위아래에 있는 많은 정자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큰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떨치고 안개 자욱한 갖가지 변화를 다하는 데 이르러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건물이 이 강에 서로 어울린다고 말하게 하니, 비록 촉석루와 영남루라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저 두 누각은 이름난 도시와 큰 군읍 가운데 있으니 옛날의 이른바 공관(公舘)이다. 그러므로 짓는 데는 반드시 여러 사람의 힘을 빌리고 지키는 데는 또 일정한 주인이 없이, 다만 시인과 나그네가 왕래하며 오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지금 군은 선친이 남긴 재물을 가지고 이 위대한 경관을 홀로 이루고 또 좋은 기물을 많이 마련하여 나그네를 맞아들여 머물게 하니, 곧 물정에 어두워 마땅함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이에 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작고하신 선친의 뜻이었습니다. 저의 선친 묵계(默溪) 부군(府君)은 힘써 농사를 지어 가산을 일으키고 만년에 항상 이곳을 왕래하며 그 아름다운 경치를 즐거워하여 사 두었습니다. 장차 따로 한 채의 집을 지어 노년을 보내려고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식들을 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무릇 선친께서 이 일을 하시려던 까닭이 어찌 오로지 스스로 편안하기만 도모한 것일 뿐이었겠습니까. 장차 후인으로 하여금 이 집을 지음으로 인하여 그 아름다운 경치를 얻고, 그 아름다운 경치로 인하여 그 사람을 상상함으로써 이 강과 더불어 서로 무궁하게 하려 했던 것이니, 그 뜻은 실로 선친이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신 것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실로 선친이 남겨주신 것이니 자손이 마땅히 아끼고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있고 없음과 모이고 흩어짐은 기필할 수 없으니, 이것으로 저것을 바꾸어 백대의 후에 우리 선친의 이름을 불후하게 전하는 계책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자손이 대대로 전하여 지킬 수 있다면 이는 참으로 좋은 일이고, 그렇지 못하여 세상 사람에게 지키게 하고 공공의 누각으로 전하게 하기를 진주와 밀양의 두 누각처럼 하더라도 그 또한 무슨 상심이 되겠습니까.

 

아, 성군(成君)이 한 것과 같은 것은 ‘통달한 식견’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는 《주역》 〈환괘(渙卦) 육사(六四)〉에 이른바 “보통 사람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匪夷所思〕”라고 하는 것이다. 황학루(黃鶴樓)가 천하에 유명하지만 그 기원은 신씨(辛氏) 한 사람에서 시작되었다. 고금의 황학루는 무궁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장구하게 신씨의 소유는 아니고, 비록 장구하게 그 소유가 아니더라도 신씨의 이름은 실로 장차 황학루와 더불어 그 존재를 함께할 것이다. 이것이 실로 오늘 성군이 뜻을 둔 바이고, 나에게 기문을 짓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름은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이고 강산 누각은 또 밖에 있는 것 중의 밖에 있는 것이다. 밖에 있는 것 중의 밖에 있는 것에 의지하여 자신에게 무겁게 하기를 구하기보다는 또한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 돌이켜서 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르는 이름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것은 더욱 군이 마땅히 힘쓰고 힘써야 할 바이자 참으로 이 누각이 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 말을 적어서 돌려보낸다.

이른바 강산 경물의 아름다운 경치 같은 것은 내가 한 번 오르기를 기다려 품평하리라.

[-D001] 영산(靈山) : 

경상남도 창녕군의 면 이름이다.

[-D002] 칠원(漆原) : 

경상남도 함안군의 면 이름이다.

[-D003] 청천(菁川) : 

경상남도 진주의 옛 이름이다. 원래는 진주의 촉석루 앞에 흐르는 내 이름이었다.

[-D004] 응천(凝川) : 

경상남도 밀양의 옛 이름이다. 원래는 밀양의 영남루 앞에 흐르는 내 이름이었다.

[-D005] ()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인데, 뒤에 이름을 추(鄒)로 고쳤다.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추현(鄒縣) 지방이다.

[-D006] () : 

춘추 시대 제(齊)나라 동쪽 국경에 있던 작은 나라인데, 나중에는 노(魯)나라에 속하기도 하고 또 제(齊)나라에 속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산동성 일조시(日照市) 거현(莒縣) 지방이다.

[-D007] 황학루(黃鶴樓) : 

중국 호북성 무한시(武漢市) 사산(蛇山)에 있는 누각인데, 삼국 시대 오(吳)나라 황무(黃武) 2년(223)에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중간에 여러 차레 궁건을 거쳐 1985년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고금 시인의 제영(題詠)이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 당나라 최호(崔顥)의 시가 특히 유명하다.

[-D008]  기원은 …… 시작되었다 : 

황학루(黃鶴樓)에 얽힌 다음의 전설이 있다. 황학루가 있는 곳에서 신씨(辛氏)가 술을 팔았는데, 어떤 도사가 항상 와서 술을 마셨다. 신씨는 도사에게 술값을 받지 않자 도사가 떠날 때 귤껍질로 벽에 한 마리 황학을 그려주었는데, 신씨는 이로 인해 부자가 되었다. 10년 후 도사가 다시 와 피리를 불자 황학이 벽에 내려왔는데, 도사가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에 신씨는 이곳에 황학루를 지었다. 《中國名勝詞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