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2. 11:16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청장관전서 제63권 /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필담(筆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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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湛軒) : 을유년(1765, 영조 41) 겨울에 내가 계부(季父)를 따라 북경으로 출발했다. 11월 27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12월 27일에 북경에 도착했으며, 여관에 머문 지는 60여 일이었다.
훌륭한 수재(秀才)로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연로(沿路)에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모두 변변치 못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암(炯菴 저자인 이덕무(李德懋) 자신을 가리킨다)은 논한다.
그의 생각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매양 북경에 다녀온 사람을 만나 무엇이 좋더냐고 물으면 모두 ‘조대수(祖大壽)의 패루(牌樓)가 매우 장려(壯麗)해서 좋았다.’ 했고, 또 그 다음을 물어보면 반드시 ‘천주당(天主堂)의 벽화를 멀리서 보면 진짜 같았다.’ 했다. 그래서 나는 냉소하고 대화를 그만두었다.
담헌 : 이기성(李基成)이 항주(杭州)에 사는 두 사람을 만나 양허옹(養虛翁) 김재행(金在行)과 건정(乾淨)의 큰 거리에 있는 천승점(天陞店)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더니, 두 사람이 나와서 맞았다. 엄성(嚴誠)은 자가 역암(力闇)이고 호는 철교(鐵橋)로 35세였으며, 반정균(潘庭筠)은 자는 난공(蘭公)이고 호는 추루(秋𢈢)로 25세였다. 이들은 함께 항주의 전당(錢塘)에 산다고 했다.
형암은 논한다.
누(𢈢)의 음은 누(婁)이니 초사(草舍)라는 뜻이다. 만약 관(串)이라 읽으면 어찌 낭패가 아니겠는가? 한세상에 나서 함께 같은 고장에 거주하고 있으니,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다.
난공 : 양허께서는 귀국의 김상헌(金尙憲)을 아십니까?
담헌 : 김상헌은 양허의 족조(族祖)입니다.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로 우리나라에서 이름높은 분인데, 어떻게 아십니까?
역암 : 그분의 시가 중국의 《감구록(感舊錄)》에 실려 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장연등(張延登)은 제(齊) 지방 사람으로 명(明) 나라의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완정(阮亭) 왕사진(王士禛)의 처조부였다. 청음(淸陰) 김상헌 선생이 바닷길로 북경에 조회(朝會)갔을 때에 장연등과 매우 다정하게 지냈다. 장연등이 《조천록(朝天錄)》의 간행을 위하여 서문을 지었는데, 《청음집(淸陰集)》에도 실려 있다. 완정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도 자세히 언급되었고, 또 청음의 좋은 시구 수십 수를 초하여 싣고서 그 품격(品格)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완정은 또 만년에 명 나라의 말기와 청 나라의 초기에 걸쳐 있었던 고로(故老)들의 시를 모아 《감구록》 8권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에서부터 그의 형인 고공랑(考工郞) 왕사록(王士祿)에 이르기까지였는데, 여기에 청음의 시도 들어 있다.
담헌 : 여만촌(呂晩村)은 어느 곳 사람이며 그의 인품은 어떻습니까?
난공 : 절강 항주 석문현(石門縣) 사람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난(難)에 걸렸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여만촌의 이름은 유량(留良)이고, 자는 장생(莊生)이다. 일명은 광륜(光輪)이고 자는 용회(用晦)라고도 한다. 그의 학문은 왕양명(王陽明)을 배척하고 주자(朱子)를 옹호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
역암 : 육자정(陸子靜 자정은 육구연(陸九淵)의 자)은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왕양명은 공이 천하를 덮었으니, 그들의 학문에 대해 강론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큰 인물이 되는 데는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주자와 육자정은 본디 다른 것이 없는데 학자들이 스스로 구별한 것입니다. 또 도는 다르지만 귀결점은 같습니다.
담헌 : 귀결점이 같다는 말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역암 : 옛사람을 가혹(苛酷)하게 책망하는 것은 원래 불필요한 일입니다.
난공 : 사업은 성의(誠意)ㆍ정심(正心)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왕양명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설은 유감이 있기는 합니다.
형암은 논한다.
여만촌의 ‘왕양명의 학설이 없어지지 않으면 주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한다. 주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하면 공자의 도가 없어지게 된다.’ 하였다.
이제 왕양명에 대해 역암은 약간 자중하는 편이었고, 난공은 직접 배척한 것이다.
난공 : 역암의 형 구봉(九峯) 선생의 이름은 과(果)입니다. 우리 고장 오서림(吳西林) 선생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고아하고 속태(俗態)가 없어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서림 선생은 은거하여 도를 닦는데 일이 없이는 절대로 성부(城府)에 들어가지 않으며, 달관(達官)이 와서 만나보려 하면 반드시 준엄하게 거절하면서 세속의 관리는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시랑(侍郞) 장존여(莊存與)ㆍ통정관(通政官) 뇌현(雷鉉)ㆍ시랑 전유성(錢維城) 등이 찾아가서 저서를 좀 보여달라고 했었지만 끝내 보지 못하였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서림 선생의 학문의 경지는 이미 완성에 가까웠으니,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와 같으면 참으로 훌륭하다 하겠다. 달관이라도 만약 그 인품이 속되지 않으면 또한 만날 수 있는 도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된 관리라면 선비를 예(禮)로 대접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난공 : 국조(國朝)에 우리 고장의 선배 가운데 고상한 사람으로는 서개(徐介)ㆍ왕풍(汪風)ㆍ왕증상(王曾祥)과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속(流俗)을 따르지 않았으니, 우뚝하게 길이 빛날 사람들입니다. 서개ㆍ왕풍 두 사람은 포의(布衣)였으나 나라가 망한 뒤에는 세상을 피해 벼슬하지 않았고, 왕증상은 수재였는데도 30여 세에 즉시 과거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그의 문장과 인품은 탁월한 바 있어 후세에 전할 만합니다.
형암은 논한다.
명 나라 말년의 고사(高士)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역조(歷朝)에서 왕기(王氣)를 부식(扶植)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다. 그러나 당시 명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킨 사람이 많았으니, 이 또한 천고에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황강한(黃江漢 강한은 황경원(黃景源)의 호)의 《국조배신고(國朝陪臣考)》에 모두 94인이 실려 있는데, 이들은 탁연히 후세에 전할 만한 사람들이다.
난공 : 국조의 대유(大儒)로 청헌공(淸獻公) 육농기(陸隴其)는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었고, 그 밖에 문정공(文正公) 탕빈(湯斌)ㆍ승상 이광지(李光地)와 위상추(魏象樞) 등도 모두 대유로서 현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청헌공의 《가서집(稼書集)》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문정공의 자는 공백(孔伯)이고 호는 형현(荊峴)으로 벼슬이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고 국사원 검토(國史院檢討)를 제수받았다. 당시 《명사(明史)》의 편수를 논할 때 상소하여, 《송사(宋史)》ㆍ《요사(遼史)》ㆍ《금사(金史)》ㆍ《원사(元史)》의 예에 의거해서 남도(南渡)한 뒤 국사(國事)에 죽은 신하들도 모두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집권자들이 그의 말을 꾸짖었다. 가재(稼齋) 김창업(金昌業)이 북경에 들어가서 이광지를 만나보니 애꾸눈이었는데, 당시에 각로(閣老)로 있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위상추의 호는 환계(環溪)이다.
난공 : 서림 선생이 거상(居喪)할 때는 부추를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손님도 접견하지 않았으며, 시문(詩文)도 짓지 않고 거문고나 비파도 타지 않았습니다. 장사지내고 제사올리는 예(禮)에서 의복에 이르기까지 세상과 크게 달랐습니다. 그의 의관은 국조의 제도를 따랐으나 상복은 모두 명 나라 제도를 준행했으니, 이는 국조에서 상례를 백성들에게 반포하지 않았음을 기화로 선생이 홀로 명 나라 제도를 행한 것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상과 제사에 소반(素飯 고기 반찬 없는 밥) 먹기를 좋아하지만 파와 마늘은 가리지 않고 있으니 우습다. 거상하는 사람이 《서경(書經)》을 읽을 땐 갱재가(賡載歌)는 읽지 않으니 이 뜻이 매우 좋다. 다른 책도 이를 미루어 알 만하다. 청 나라에서 상례를 반포하지 않았는데도 사대부들이 옛 예를 따르지 않고 있으니, 염치를 찾아볼 수 없다.
난공 : 귀국의 조복(朝服)은 모두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으로 합니까?
담헌 : 그렇습니다. 또 상의(上衣)와 하상(下裳), 금관(金冠)과 옥패(玉佩)의 제도도 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사모는 각(角)이 너무 길고 단령은 소매가 너무 넓으며 품대(品帶)는 너무 헐렁하다. 우리나라에서 금관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옛날의 진현관(進賢冠)이다. 진현관을 쓰면 별도로 방리(方履)를 신어야 하는데, 가죽신을 신는 것은 불합리하다.
난공 : 장희(場戱)는 어떤 점이 좋습니까?
담헌 : 장희가 정상적인 놀이는 아니지만 취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난공 : 다시 명(明) 나라 때의 위의(威儀)를 보자는 뜻이 아닙니까?
형암은 논한다.
이 뒤로 현명한 임금이 나와서 예를 만들려 한다면 불가불 광대들의 관복(冠服)을 취하여 그 제도를 상고하게 될 것이다.
담헌 : 중국은 모든 것이 다 정밀하고 좋지만 머리를 깎는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메게 합니다. 우리는 해외에 살고 있지만 사는 것이 즐겁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 일을 생각하면 슬프기만 합니다. 하지만 머리털을 보존하고 있는 것만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이간재(李幹才)의 자는 독생(篤生)이다. 명 나라가 망하자 머리를 깎지 않고 18일간 음식을 끊고서, 친구에게 생제(生祭)를 갖추어 달라 했다. 그리고는 두건을 벗고 방포(方袍)만 입은 채 제사를 받은 다음 죽었다. 허덕부(許德溥)의 자는 원박(元博)으로 머리를 안 깎으려 했으나 아버지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머리를 반쯤 깎았는데, 흡사 중의 모습이었다. 당시에 선비들이 상복을 입은 채 일생을 마친 이도 있고 도사(道士)라 일컬으면서 누른 관을 쓰고 일생을 마친 사람도 있었으니, 이것은 어떻게라도 머리털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난공이 역암과 우리 여관에 왔다가 돌아가려 하면서, 난공이,
“고의(高誼)에 감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흐르게 합니다.”
하고는 붓을 던지고 일어나 읍(揖)하면서 두 줄기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이어 문 밖으로 창황히 나가려 하니 곁에서 보던 사람들도 모두 처연한 기색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담헌이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다시 앉으라 청하니, 역암이 말했다.
“우리는 천성이 순박한 사람으로서 진정한 친구를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모였다가 이별하게 되니 슬퍼서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박미중(朴美仲 미중은 박지원의 자) 선생이 ‘영웅과 미인은 눈물이 많다.’ 하였다.
나는 영웅도 미인도 아니지만 한 번 이《회우록(會友錄)》을 읽으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만약 참된 지기를 만났다면 서로 대해서 흐느낄 뿐 필담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이《회우록》을 읽고 나서 마음을 상하지 않는다면 이는 올바른 인정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과는 친구를 맺을 수 없다.
담헌이 현금(玄琴)을 꺼내어 평조(平調)를 타니, 난공이 또 눈물을 머금고 오열했다. 담헌도 심회가 언짢아서 한 곡조만 타고 그치면서,
“이는 우리나라의 토속 음악입니다. 중국의 군자들에게 들어달라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하니, 난공이 말했다.
“두 분 형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죽고만 싶게 합니다.”
형암은 논한다.
무릇 문장과 현가(絃歌)로 사람을 울리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담헌이 일생토록 거문고를 배워 전당(錢塘) 반 난공(潘蘭公)으로 하여금 한 번 눈물을 흘리게 했으니, 충분히 운인(韻人)ㆍ아사(雅士)라 할 수 있겠다. 난공이 ‘사람으로 하여금 죽고만 싶게 한다.’ 했는데, 만약 죽은 사람이 지각이 있어 지하에서 지기를 만난다면 어찌 기꺼이 살려 하지 않겠는가?
역암 : 중국에서 물품을 사고파는 상인들이 귀국에 가게 되면 소식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담헌 : 해마다 우리나라에서 진공(進貢)하러 오는 사신이 있으니, 그 사신편에 전하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우리나라는 바닷길로 통화(通貨)하지 않기 때문에 문헌(文獻)이 더욱 희귀하다. 따라서 서적이 미비되고 삼왕(三王)의 사적도 모르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강남(江南)과 통상했으므로 명 나라 말기의 고기(古器)ㆍ서화(書畵)ㆍ서적ㆍ약재(藥材) 등이 장기(長崎)에 꼭 차 있다. 일본의 겸가당(蒹葭堂) 주인 목세숙(木世肅)은 서적 3만 권을 비장하고 있고 또 중국의 명사들과 많은 교제를 맺고 있다. 그래서 문아(文雅)가 바야흐로 성대하여 우리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다. 또 고려 때는 송(宋) 나라의 상선이 해마다 왔었는데 그때 고려 왕이 후한 예로 공궤(供饋)했으므로 문물이 매우 구비되었었다.
담헌이 그곳 팔경(八景)을 두고 역암과 난공에게 시(詩) 지어주기를 요구하였다.
형암은 논한다.
옛사람이 팔경을 만들어낸 것은 우연히 일컫다 보니 여덟이 된 것인데 뒷사람들은 이를 법전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일컬을 만한 것이 일곱뿐이라도 억지로 하나를 더 보태고, 일컬을 만한 것이 아홉일지라도 주저없이 하나를 빼버리니, 이것을 어찌 융통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팔경을 말함에 있어 반드시 억지로라도 대어(對語)를 만들고 있는데 이 또한 부당한 일이다. 노홍을(盧鴻乙)의 종남초당도(終南草堂圖)와 왕마힐(王摩詰)의 망천절구(輞川絶句)가 조금은 옛뜻이 있지만, 그러나 초당도가 끝내 망천 절구의 고아함만은 못하다.
역암 : 슬픈 감회가 얽혀 눈물이 흐릅니다. 아, 이국 사람과 지기를 맺은 것은 천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너무도 감격하여 손이 떨리니 피차 묵묵히 이런 마음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형암은 논한다.
묵(黙)이란 글자의 본의는 매우 좋다. 세상 사람들이 대개 이 글자를 따다 호를 짓기는 하지만 속례(俗例)를 면치 못하고 있다. 또 묵자를 겹쳐 묵묵이라 말하면 유유(悠悠)와 적적(寂寂)이라 말하는 것처럼 전혀 뜻이 없는 것 같지만 이 묵묵이라는 말의 뜻은 그 얼마나 신령한가? 가만히 음미해 보면 묘한 이치가 무궁하다.
역암 : 대장부가 천리를 사이에 두고 사귐에 있어 어찌 번번이 만나서 아녀자들처럼 즐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번 지기를 만나니 더없이 기뻐서 울려 해도 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오직 하늘을 우러러 길이 탄식할 뿐, 멍멍한 상태에서 온갖 생각이 엇갈릴 따름입니다. 아, 천하에 유정한 사람은 진실로 묵묵히 이 마음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나도 이제 묵묵히 그 뜻을 알겠으니, 담헌이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이런 시를 지은 적이 있다.
단정히 앉았으니 정경이 묵묵한 가운데 맑아지고 / 端居情境黙黙澄
외로이 거니니 먼 곳의 친구가 그립구나 / 孤廻難堪念遠朋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묵 자의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친구와의 교분에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역암이 양허에게 말했다.
“존형이 지으신,
평생 강개한 마음 있었는데 이제는 흰 머리 되었고 / 平生感慨頭今白
이역에서 지기 만나니 기쁜 마음 그지없네 / 異域逢迎眼忽靑
한 시는 진정 지극히 오묘했습니다. 또,
문에 나서서 손 잡은 채 해저무는 줄 모른다 / 出門摻手己寒星
는 구는 더더욱 천고의 절창(絶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어양(王漁洋)과 같은 분이 살아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손뼉을 치면서 감탄했을 것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왕어양의 이름은 사진(士禛)이고 자는 이상(貽上)이며 별호는 완정(阮亭)으로 제남(濟南) 사람이다. 벼슬은 상서(尙書)에까지 올랐다. 그의 시는 화완(和婉)하면서도 침울(沈鬱)하여 청초(淸初) 제일의 대가가 되었다. 또 학문이 넓고 인품이 청아하여 옛도 행하기를 좋아하였고, 그의 저서도 모두 전해오고 있다.
난공 : 귀국의 경번당(景樊堂)은 허봉(許篈)의 누이동생으로 시에 능해서 그 이름이 중국의 시선(詩選)에 실렸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헌 :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전혀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이생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 人間願別金誠立
저생에서 두목지를 따르고 싶네 / 地下長從杜牧之
이 시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난공 : 아름다운 부인이 못난 남편과 부부가 되었으니, 어찌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형암은 논한다.
듣건대 경번은 스스로 지은 호가 아니고 부박한 사람들이 기롱하는 뜻으로 붙인 것이라 한다. 담헌도 이에 대해서는 미처 분변하지 못했다. 중국의 책에는 허경번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다른 사람이라 했고, 또 ‘그의 남편이 왜적의 난에 절조를 지키다가 죽자 허씨는 여자 도사가 되어 일생을 마쳤다.’ 했으니, 와전됨이 너무 심하다. 난공이 만약 시화(詩話)를 편집할 때 담헌의 이 말을 싣는다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 그의 시가 전수지(錢受之 수지는 전겸익(錢兼益)의 자)의 첩인 유여시(柳如是)의 경우와 같아 결함을 지적하자면 걸리지 않는 것이 없으니, 또한 기박한 운명이다. 세상에서는 허씨의 시를 모두 맹랑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첩이 직녀가 아니니 / 妾身非織女
낭군이 견우일 수 있으랴 / 郞豈是牽牛
한 이 시도 중국 사람의 시이기 때문이다.
역암과 난공이 물었다.
“귀국에서는 비단옷을 입지 않습니까?”
담헌이 자기가 입고 있는 명주옷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겨울에 먼 여행을 나섰기 때문에 이런 명주옷을 입은 것입니다. 집에 있을 때는 우리나라 토산인 무명옷을 입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검소함을 숭상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가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신라(新羅) 때는 국산품으로 대소화(大小花)ㆍ어아금(魚牙錦)ㆍ조하금(朝霞錦)ㆍ백첩포(白氎布)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루어 당시의 부유함과 백성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역암 : 석씨(釋氏)의 교리는 《능엄경(楞嚴經)》이고 도가(道家)의 교리는 《황정경(黃庭經)》이고 유가(儒家)는 징분질욕(懲忿窒慾)과 교경경타(矯輕警惰) 여덟 글자입니다. 내가 유가에서 대강 안 것은 이러합니다. 내가 《능엄경》을 본 것은 바로 병이 위독해서 죽게 되었을 무렵이었는데,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된 점이 매우 많았었으니, 한 첩(貼)의 청량산(淸凉散)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병을 앓을 때 지(地)ㆍ수(水)ㆍ풍(風)ㆍ화(火)의 사대(四大)가 임시로 모여 이루어진 것이 몸뚱이니, 무슨 일인들 버릴 수 없으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끝내 이 때문에 병이 나았으나 그 뒤로는 다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난공 : 엄형은 매일 반드시 대비주(大悲呪)를 왼답니다.
역암 : 그것은 병중에 죽음을 두려워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석가의 교리가 현격하게 유가의 책만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하필 이단(異端)을 취하겠습니까?
담헌 : 늦게라도 불로(佛老)에서 빠져나왔으니, 순화(醇和)에 귀의하는 데 뭐가 해롭겠습니까? 바라건대 아주 빠지지는 마십시오.
형암은 논한다.
《능엄경》에서 세존(世尊)이 파사닉왕(波斯匿王)에게 ‘너의 얼굴은 비록 쭈그러졌으나 너의 성정(性情)은 쭈그러지지 않았다. 쭈그러진 것은 변한 것이고 쭈그러지지 않은 것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했으니, 이 말이 도에 가깝다. 대저 각박함이 많으면 사람이 즐겁지 않게 되는 것으로 이른바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세상의 생각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부모와 처자를 하찮게 여긴 채 속히 죽기만 바라는 것으로 구경법(究竟法)을 삼을 뿐이다.
역암 : 마음이란 유념하면 보존되고 방심하면 달아나는 것으로 출입하는 시기가 없고 가는 곳도 모른다는 말은, 바로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간직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또 한창려(韓昌黎)도 선행을 베풀면 복을 받는다는 중들의 교리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불씨의 취지를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근세에 어떤 중이 ‘한 문공(韓文公)에 대해서는 화낼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씨의 정미로운 곳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를 가리킨다)은 지극히 미묘한 곳까지 알면서 배척했으니, 이 점이 매우 유감스럽다.’ 했다.
역암 : 우리가 시 짓기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어찌 성현이 허여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들은 여사(餘事)를 좋아하는 마음이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만 못할까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담헌 : 형께서 심학(心學)에 힘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절실하고 오묘한 말은 좌우(座右)에 써서 붙이고 늘 이로써 자신을 극복한 뒤에야 진보가 있는 것이니, 이는 초학자로서 최대한 힘써야 될 점이다.
역암 : 주자는 소서(小序 모장(毛萇)의 《시경》소서를 말한다)를 달리 해석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만, 이제 소서를 보건대 매우 정당하여 따를 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이 주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본조의 주죽타(朱竹垞) 같은 사람은 《경의고(經義考)》2백 권을 저술하였는데, 역시 주자의 견해가 옳지 않다고 배척하였습니다. 또 전해오는 의논에도 주자가 소서와 달리 고친 것은, 대개 문인들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과(木瓜 《시경》의 편명)는 제 환공(齊桓公)을 찬미하였고, 자금(子衿 《시경》의 편명)은 학교의 피폐를 풍자하였으며, 그 밖에 야유만초(野有蔓草 《시경》의 편명)와 유녀동거(有女同車 《시경》의 편명)에서 정(鄭) 나라 태자 홀(忽)을 풍자한 것과 유왕(幽王)을 풍자한 등등의 모든 시를 살펴보면, 경전(經傳)에서 전거를 댈 수가 있는데도 주자는 기필코 모두 반대로 해석하였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주죽타의 이름은 이준(彛尊)이고 자는 석창(錫鬯)으로, 장서(藏書)가 많았고 학식이 넓어 청 나라 제일의 학자가 되었다. 《명시종(明詩綜)》 및 《일하구문(日下舊聞)》을 저술했고, 서건학(徐乾學)과 함께 《경해(經解)》를 교감했다. 죽타는 주문각(朱文恪)의 증손으로 일찍이 오령(五嶺)을 넘어 운삭(雲朔) 지방을 유람했고 배를 타고 창해(滄海)를 두루 돌면서 금석문(金石文)을 찾아 망라했으므로 증거가 정박(精博)했다.
담헌이 난공에게 말했다.
“형의 모습이 전일에 비하여 너무 안됐습니다.”
난공이 말했다.
“두 분을 만나본 뒤로 홀홀히 이별할 것을 생각하느라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담헌이 말했다.
“나 역시 침식이 편안치 못했습니다. 고국으로 떠나기 전에 절교서(絶交書)를 보낼 수밖에 다른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다.”
난공이 절교서라는 세 글자에 권점(圈點)을 치고서 말했다.
“어찌 절교서를 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매우 묘하고도 묘합니다.”
담헌이 말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저녁에 혼례 올리고 새벽에 고별하니 / 暮婚晨告別
너무 바쁘게 서두는 것이 아닌가 / 無乃太怱忙
바로 우리들의 정경을 두고 읊은 것 같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무릇 이별하는 데는 기일에 앞서 아무날 이별하게 될 것이라고 하게 되는데, 이때의 마음은 자연히 타는 듯이 초조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이별하는 그날에는 적군을 앞에 둔 장사나 초례를 치른 처녀가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심정과 같아서, 기일 전의 마음에 비하면 마음을 졸이는 도수가 작아지는 것이다. 이별하고 나서는 머리를 돌리고 탄식만 할 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담헌 :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외로이 여관에 앉았으니 마음이 에는 듯하여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부득이 억지로 이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나와 저분들과는 각각 7천 리 밖에 살기 때문에 도저히 서로 만날 수가 없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 본들 역시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하고 혼자 말하고 혼자 웃으면서 이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정마(情魔)가 전처럼 내습해 와서 심장에 서리어, 이른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이미 씻은 듯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이 괴이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輪回說)이 사실이라면 간절히 원하노니 내세에는 함께 한 나라에 태어나 아우가 되고 형이 되고 스승이 되고 친구가 되어 이생에서 다하지 못한 인연을 끝맺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는 이미 다시 만날 수가 없으니, 각각 자식들에게 경계하여 대대로 이 정의를 강구케 함으로써 감히 잊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식들로 하여금 오늘 우리들처럼 인연을 다시 맺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장연(長淵)과 풍천(豊川)의 언덕에서 항주의 언덕에 이르는 데는 한 강을 사이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 사는 격이다. 이때 담헌은 송골매가 되어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반생(潘生)과 엄생(嚴生)의 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웠을 것이고, 가슴에는 눈물이 파도를 이루고 있으나 눈물만 흘리지 않았을 뿐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이토록 슬프고 괴로운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별할 적에 짓는 시는 매우 슬프고도 애타게 짓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사단(四端)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칠정(七情)의 애(哀)가 바로 이 경우를 위해서 준비된 것이다. 이런 슬픔을 쌓아만 두고 발산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 쓴단 말인가?
담헌 : 주자(朱子)의 집주(集註) 가운데 유독《중용》ㆍ《대학》ㆍ《논어》에 매우 많은 공력을 들였고《맹자》의 집주가 그 다음입니다. 《시경》에는 정밀한 검토와 정력을 들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육의(六義 풍(風)ㆍ아(雅)ㆍ송(頌)ㆍ흥(興)ㆍ비(比)ㆍ부(賦))가 분명하지 못하고 훈고(訓詁)의 해석이 겹쳐지고 대지(大旨)를 억지로 끌어다 맞춘 것 등은 비록 나의 소견에도 다소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서에 얽매인 견해를 깨뜨리고 문리(文理)에 따라 활발하게 해석했으므로 맛이 없는데도 맛이 느껴지고 소리가 없는데도 소리가 들려 진실로 읊는 사이에 흐뭇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형암은 논한다.
《송사(宋史)》유림전(儒林傳)에 있는 왕백(王柏)의 말에 ‘《시경》3백 5편이 어찌 모두 공자의 손에 의해 산정(刪定)된 것이겠는가? 그 중에 삭제되었던 시도 혹 여항(閭巷)의 부박한 사람들의 입에 남아 있는 것을 한유(漢儒)들이 취하여 삭제된 부분을 보충했을 수도 있다.’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소서에도 한유들이 부회(傅會)한 말을 따라 엮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담헌 :《시경》의 연대가 이미 멀어 다른 증거가 없습니다. 단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하는 법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자는 일필(一筆)로 단정하여 관저(關雎 《시경》의 편명)는 궁인(宮人)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했습니다. 이 말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뜻이 매우 합리적이고 문장상에도 구애가 없습니다. 부유(婦孺)의 구기(口氣)는 모두가 천기(天機)인 것으로, 허심 탄회한 마음으로 외면서 그 풍채를 상상하고 뜻을 음미해 보면 진실로 중용(中庸)에 맞는 유음(遺音)이 있으니, 그 작자가 누구인가는 우선 불문에 붙이는 것이 옳습니다.
소서의 말은 나도 대략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 관저장에 대해서 공자의 말을 꾸며서 글을 엮었는데, 문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자의 변설이 완벽합니다. 대개 소서에는 전인의 말을 답습하고 표절하여 억지로 말을 만들었으니,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 것이 너무 심합니다.
형암은 논한다.
소서는 고대와 시간적으로 그리 멀지 않으니 어찌 한두 가지 정도야 믿을 만한 것이 없겠는가? 담헌이 소서를 너무 심하게 공박했다. 소자유(蘇子由 자유는 소철(蘇轍)의 자)가 처음으로 ‘의거한 바가 있다.’ 했으므로, 《시경》을 해설하는 사람들이 자유의 말을 받들어 주자를 공격하였다. 소서를 공격한 사람은 정협제(鄭夾漈)였는데, 주자는 아마도 그의 설에 근본한 것 같다. 대저 소서에서 시를 해설한 것은 편마다 모두 주인공이 있어서 ‘이것은 아무의 시다.’ 했으나 반드시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요점을 간추려 취해야 할 것이다.
역암이 종이 위에 옛제도의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입은 형상 하나를 그리고, 또 홍모(紅帽)와 호복(胡服)을 입은 형상 하나를 그렸다. 담헌이 그 그림을 가리키며 난공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좋습니까?”
난공이 홍모를 쓴 형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좋습니다.”
이어 담헌이 사모를 쓴 형상에다 ‘철교 선생 진상(眞像)’이라 쓰고, 또 홍모를 쓴 형상에는 ‘반 학사(潘學士) 진상’이라고 썼더니,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난공이 또 농담을 했다.
“머리를 깎은 데에 매우 묘한 뜻이 있습니다. 상투에 빗질을 하는 번거로움과 가려운 데를 긁는 괴로움이 없으니 상투를 튼 사람들은 이 맛을 모를 것입니다.”
담헌이 말했다.
“신체(身體)와 발부(髮膚)를 감히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이 그림을 놓고 본다면, 증자(曾子)는 사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었다.
형암은 논한다.
명 나라 때 이탁오(李卓吾)는 긁기가 번거롭다 하여 공공연히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이천(伊川)의 피발(被髮)과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
담헌 : 망건(網巾)은 말의 꼬리털로 만드는데 이를 사람이 머리 위에 쓰고 있으니, 관과 신의 위치가 전도된 것이 아닙니까?
역암 : 어째서 벗어버리지 않습니까?
담헌 : 옛 법을 편히 여기는 습성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명 나라의 제도를 차마 잊을 수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부인들에게 전족(纏足)하게 하는 법이 있는데, 이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된 것입니까?
난공 : 이에 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당(南唐) 때 이소(李霄)의 딸에서부터였다 합니다.
담헌 : 이것도 매우 나쁜 관습입니다. 내가 일찍이 ‘머리에 망건을 쓰고 발을 전족하는 것은 바로 중국의 액운에 대한 조짐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망건은 말의 꼬리라서 좋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이마에 흔적을 남기게 되니, 매우 좋지 못하다. 전족에 대해서는 여담심 회(余澹心懷 담심은 자)가 그 시원에 대해 저술한 바 있고, 이어(李漁)의 《일가언(一家言)》에 자세히 실려 있다. 또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때에 금지했으나 그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한다. 머리에 망건을 쓰게 하고 전족하게 하는 것이 뭐 좋은 법이라고 만들어냈단 말인가?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발을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액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암 : 본조(本朝)는 매우 정대하게 나라를 세웠습니다. 큰 도적을 멸하고 대의를 폈음은 물론이고, 중국에 주인이 없을 때 세운 것이요 천하를 욕심낸 것은 아닙니다.
담헌 : 하하, 천하를 욕심내지 않았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역암 : 강외(江外)에 기담(奇談)이 있는데 ‘보내오는 예물(禮物 천하를 가리킴)을 어째서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담헌 : 오 삼계(吳三桂)가 보낸 예물입니까?
이때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난공 : 국초(國初)에 궁전 가운데서 한 폭의 글씨를 얻었는데 거기에 ‘삼가 만리 강산을 바친다.[謹具萬里江山]’ 했고, 그 아래에 ‘문팔고(文八股) 배정(拜呈)’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역암 : 이는 전에 명 나라가 문(文)을 중히 여기고 무(武)를 경시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경계한 말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틈적(闖賊) 이자성(李自成)이 중국에 악한 독소를 뿌렸고 오랑캐가 관외(關外)에서 왕호(王號)를 참칭했으니, 서로 비등비등하다고 하겠다. 처지를 바꾸면 이자성도 순치(順治 청 세조(淸世祖)의 연호)가 한 일을 했을 것이니, 대의를 폈다는 말은 매우 구차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역암도 어찌 이를 몰랐을까마는 부질없이 한 말일 것이다.
담헌 : 우리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을 도와 재건해 준 명 나라의 은혜에 대해 형들은 들은 적이 있습니까?
난공ㆍ역암 : 무슨 말입니까?
담헌 :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에 왜적이 대거 우리나라를 침공해 왔었습니다. 그때 신종께서 천하의 군대를 동원하고 천하의 재물을 소비해 가면서 7년이 걸린 뒤에야 평정했습니다. 지금까지 2백 년 동안 우리나라 백성들이 즐겁게 사는 것은 모두 신종께서 내려준 덕택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지금 세상에 명 나라를 슬피 사모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내가 일찍이 남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明)이란 글자를 쓸 때 한 자 높여 썼더니, 어떤 부박한 사람이 크게 웃으면서 ‘명 나라는 이미 망했으니 구태여 높일 것이 뭐 있는가?’ 했다. 또 전해 듣기로는 어떤 사람이 만주 사람을 부를 때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라 한다 하니,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말은 이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담헌 :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호)가 성(性)에 대해 논한 글이 어떠합니까?
역암 : 지론이 매우 훌륭합니다. 가지고 가서 간행하려 합니다.
담헌 :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 선비들이 크게 시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초학자들에게는 실제 긴급히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형암은 논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조금은 검속(檢束)할 수 있으나 끝까지 궁구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을 알려고 하는 것이 급무는 아니다.’ 할 것이니, 이런 사람은 일생 동안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채 죽는다. 또 약간 끝까지 궁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아도 검속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퇴(進退)와 유낙(兪諾)만을 준수하는 것이 참 학문인 것은 아니다.’ 할 것이니 이런 사람은 일생 동안 수행(修行)하지 못한 채 죽는다.
담헌이 귤병(橘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난공이 자기의 전대에서 계속 꺼내어 주었다.
형암은 논한다.
식물(食物)은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즐기는 것을 보고 계속 꺼내주는 것은 천리와 인정이 발동한 일단이라 하겠다.
난공 : 들으니 형이 천문학에 매우 정통하다는데, 사실입니까?
담헌 : 누가 그런 망령스러운 얘기를 했습니까?
난공 : 집에 혼천의(渾天儀)가 있다니 어찌 천문(天文)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담헌 : 삼신(三辰)의 전차(躔次 별자리)와 운행 도수에 대해서 약간 그 개요를 듣기는 했습니다. 과연 혼천의는 있지만 어찌 천문을 안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형암은 논한다.
햇무리나 달무리, 이(珥)나 살별이 흐를 때에 그 광망(光芒)의 흔들림을 보고 길흉을 미리 판단하는 것이 천문가(天文家)이고, 전리(躔離 해가 운행하는 길)의 운행에 근본하여 중성(中星)의 별자리를 헤아려 사시(四時) 절기의 늦고 빠름을 살펴서 백성에게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 역가(曆家)이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도 천문 21가(家)와 역보(曆譜) 18가가 있어 판연히 둘로 구분했다.
담헌 : 두 분 형께서는 병서(兵書)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난공 : 《태백음경(太白陰經)》ㆍ《망강남사(望江南詞)》ㆍ《화룡비서(火龍祕書)》ㆍ《육임병전(六壬兵詮)》등의 책을 대강 보았습니다.
담헌 : 《육임》은 모두 허황한 말입니다.
난공 : 실로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역암 : 기문둔갑(奇門遁甲)의 진부와 태을(太乙)은 어떤 것입니까?
담헌 : 모두가 모호한 것입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팔진도(八陣圖)도 기문둔갑의 유(類)로 돌렸으니 가소로운 일입니다.
난공 : 실제로 기문둔갑에 근본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나는 《육임》은 전혀 믿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오월춘추(吳越春秋)》등의 책에서 이미 명백하게 징험되고 있다. 단지 월장(月將 해와 달이 서로 만나는 것)이라는 이름은 무가(巫家)의 말이 끼여든 것이다. 태을성은 자미궁(紫微宮)에 있고 수(水)에 속한다. 천일생수(天一生水)이기 때문에 태을이라 일컬었으니, 을(乙)은 일(一)이다. 물[水]은 조화의 근본이기 때문에 술가(術家)에서 이를 미루어 한 말이니, 《육임》도 태을이다. 대체로 참위(讖緯 예언을 말한다)의 일종으로 모두《주역》의 일단이다. 팔진도도 정전법(井田法)으로부터 추출해낸 것이다. 두헌전(竇憲傳)의 연연산명(燕然山銘)에 ‘팔진을 새겼다.’ 했으니, 옛날에 이런 법이 있었던 것을 제갈량이 미루어 부연한 것이다.
난공 : 제갈 무후에 대해 진수(陳壽)가 병법을 모른다고 기롱했으니, 팔진도가 과연 사업에 무슨 보탬이 되었습니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제갈 무후는 위 무제(魏武帝 조조(曹操))를 대적하지 못했으니, 남병산(南屛山)에서 동남풍을 빌었다는 말도 후세의 호사자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마속(馬謖)이 패한 것도 실은 제갈 무후 때문이었으니, 참으로 삼대(三代) 이후에 제일가는 큰 인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떠드는 데 따라 일컬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형암은 논한다.
서세부(徐世溥)가 무후무성론(武侯無成論)을 지어 기롱한 것은 너무 지나치게 배척한 것이고, 설 능(薛能)은 이런 시로 기롱했다.
당년에 제갈공명 무슨 일 이루었나 / 當年諸葛成何事
일생 동안 용처럼 누워있는 게 지당하네 / 只合終身作臥龍
서세부는 만년에 도적에게 죽었고, 설능은 주급(周岌)의 난에 죽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모두 구업(口業)에 대한 업보였다.’ 했으니, 난공은 조금쯤 생각해 보았어야 했을 것이다.
난공 : 조선에도 혼인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여자가 있습니까?
담헌 : 폐백을 들인 뒤면 이미 혼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개가(改嫁)하지 못합니다.
난공 : 이는 정의(情義)에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출가를 했더라도 묘현(廟見 신부가 시댁의 사당에 배알하는 것)하지 않고 죽은 여자는 친정집으로 운구(運柩)해다 장사지낸다 했으니, 이는 부도(婦道)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집가지 않고 절개 지키는 것을 옛사람이 음분(淫奔)한 사람에 비교했으니, 이는 어진 사람들의 과실이라 하겠습니다.
역암 : 이것은 예법에 없는 예(禮)입니다. 그러므로 정녀(貞女)에 대해서는 으레 정포(旌襃)를 청하지 않는 것이지만, 정포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대관(大官)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면 다리의 살을 베어 어버이를 봉양한 효자와 같이 정표를 내립니다.
담헌 : 우리나라에서는 개가하지 않는 것이 예사이기 때문에 정표하는 일이 없습니다.
역암 : 혼인도 않고 절개 지키는 사람을 정표하는 것을 율법(律法)에 싣지 않은 것은, 싣게 되면 이를 권유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부인에게 해당되는 세 가지 명목이 있다. 남편이 죽고 나서 절개 지키는 사람을 절부(節婦)라 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 따라 죽거나 또는 난을 당하여 굴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열부(烈婦)라 하고, 폐백을 받고 나서 남편이 죽었는데도 절개 지키는 사람을 정부(貞婦)라 한다. 우리나라의 사대부집에서는 개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남편의 상중에 죽은 사람만을 정표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죽는 것을 열부라 할 수 있겠으나 역시 정당한 경상의 도리는 아닌 것으로, 상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죽은 효자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역암 : 본조(本朝)에서는 명 나라 때 정장(廷杖 조정의 뜰에서 간하는 신하를 때리던 일)하던 법을 없애버렸는데, 이는 매우 관대한 처사라 하겠습니다. 명 나라의 경우에 과도관(科道官)들이 도리어 정장 맞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니, 이는 좋지 못한 정사였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원래 정장법(廷杖法)은 곤장 맞는 사람의 좌우에 다른 물건을 높이 쌓아 곤장을 쳐도 상하지 않게 해서 욕만 보일 뿐이었다. 그랬는데 명 나라 말기에 와서는 진짜로 곤장을 쳤으므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담헌 : 우리나라의 문장으로는, 신라에는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호)이 있고, 고려에는 이규보(李奎報)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있고, 본조에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간이(簡易) 최립(崔笠)ㆍ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ㆍ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있습니다.
형암은 논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을 뺐으니 결전(缺典)이라 하겠다. 또 따로 문목(門目)을 세운다면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ㆍ문강공(文康公) 서경덕(徐敬德)ㆍ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ㆍ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등을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담헌 : 우리나라의 과거(科擧) 제도는 3년 만에 한 번씩 보는데 이를 대비과(大比科)라 하고, 또 진사시(進士試)가 있는데 이는 소과(小科)라 하고, 이 밖에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면 과거를 실시하는데 증광(增廣)ㆍ별시(別試)ㆍ정시(庭試)ㆍ알성(謁聖) 등의 과거 이름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학교의 월과(月課) 등 소소한 과거 이름은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형암은 논한다.
만약 공거법(貢擧法)을 행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과거법만 시행할 것이고, 그 밖에 소소한 잡과는 파해 버려야 한다. 국체(國體)가 날로 손상되고 사습(士習)이 날로 야박해지며, 재력이 소모되고 관직(官職)이 용잡해지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다.
이제 《회우록(會友錄)》의 비본(秘本)을 발췌, 나의 논평을 아울러 실어 이 편을 만들었다. 장엄한 말과 해학적인 말이 잇달아 나오니, 참으로 기서(奇書)요 이사(異事)라 하겠다. 편지에 대해서도 내가 평론한 글이 있지만 초하여 싣지 못함이 유감스럽다.
[주-D001] 갱재가(賡載歌) :
갱재가는 임금의 노래에 화답하는 신하의 노래이다. 거상 중에는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서경》을 읽을 때 갱재가의 구절을 읽지 않았다.
[주-D002] 유여시(柳如是) :
청 나라 때 오강(吳江)의 명기이다. 재주와 미모가 다 뛰어났었는데 전겸익(錢謙益)의 첩이 되었다. 명 나라가 망하자 유여시가 전겸익에게 순국(殉國)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겸익이 듣지 않았다. 뒤에 겸익이 죽자 유여시도 따라서 죽었다.《淸畫家詩史癸 上》
[주-D003] 이천(伊川)의 피발(被髮) :
나라가 망하기에 앞서 예의가 먼저 없어진다는 뜻. 《左傳 僖公22年》에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으로 갈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제사 지내는 사람을 보고 ‘백년이 못 되어 이 땅이 오랑캐의 소유가 될 것이다.’ 했다.” 하였다.
[주-D004] 이자성(李自成) :
명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 원래는 무뢰배였는데 틈왕(闖王)이라 자칭, 반란을 일으켜 서안(西安)에서 왕이라 자칭했는데, 결국 북경을 함락시켰고 장렬제(莊烈帝)는 순국(殉國)했다. 뒤에 오삼계(吳三桂)가 청병(淸兵)을 이끌고 들어오자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구궁산(九宮山)에서 자살했다.《明史 卷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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