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전도병풍 서울에서 서쪽으로 오백 리 떨어진 곳

2022. 9. 19. 18:09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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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집 제2 / ()○강북창화집(江北唱和集) 무진년(1868, 고종5)에서 신미년(1871, 고종8)까지이다.

평양전도병풍을 읊다 일백 일운 무진년(1868, 고종5) 12 〔題平壤全圖屛風百一韻 戊辰臘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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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의 강가엔 눈발 펄펄 날리고 / 江上歲暮雪翩翩
황량한 길엔 인적 끊기고 새들도 자려 하네 / 荒徑人斷鳥欲眠
벽에 걸린 잔등은 저 혼자 빛나고 / 殘釭掛壁炯自照
만리를 유람하는 마음은 참선하듯 앉아있네 / 心遊萬里坐如禪
병풍을 찾아와서 성근 창 막아놓고 / 索取屛風掩疎牖
침상에 기대 그림 보니 그윽도 하구나 / 倚床看畫轉窅然
서울에서 서쪽으로 오백 리 떨어진 곳 / 西去漢師五百里
한 조각 이름난 도시 옛날의 조선일세 / 一片名都古朝鮮
지세는 요동과 말갈을 가까이서 당기고 / 地勢緊控遼鞨路
천문은 기미성 궤도에 해당하네 / 天文正値箕尾躔
관서와 해서 사이 일개 도회지로서 / 關海之間一都會
수려하고 빼어남이 견줄 바 없네 / 塊麗秀奇無與肩
먼 산은 평야를 두르고 강은 성곽을 껴안고 / 遠峀圍野江抱郭
울창한 숲엔 많은 인가에서 피어나는 연기 / 蒼翠鬱鬱萬家烟
밝고 고운 금수산 
- 산 이름 - 은 주진이 되고 / 錦繡明媚作州鎭
한 송이 모란봉 
- 봉우리 이름 - 더욱 사랑스럽네 / 牧丹一朶更可憐
산 정상의 누대 그 이름 을밀대 / 山頂有臺號乙密
여러 승경 조망함에 전경을 볼 수 있네 / 一寓諸勝得之全
부벽루 높은 누대 강가에 솟았는데 / 浮碧高樓臨江起
일찍이 어가가 여기서 돌아갔네 / 曾經龍御此般旋
북쪽 바라보며 토산 위의 옛일 슬퍼하니 / 北望吊古
山上
남겨진 기자 무덤엔 풀만 우거졌네 / 箕聖遺墓草芊芊
제씨의 수구초심 어찌 연연함 없었겠는가 / 齊氏首邱豈無戀
어진 이 자진함은 시세에 순응한 것 / 仁人自靖亦合權
영명사는 한산사와 비슷해 / 永明寺類寒山寺
종소리가 밤중에 장사꾼의 배에 이르네 / 鍾聲夜到賈客船
숲 사이 외로운 탑은 흰 학과 같고 / 林間孤
如白鶴
월암에 든 맑은 가을에 달도 둥그네 / 月巖秋淸桂魄圓
번화했던 구제궁은 지금은 적막하고 / 梯宮繁華今寂寞
황량한 옥섬돌엔 흰 박쥐들만 시끄럽네 / 玉砌荒凉
白蝙
기린굴에 얽힌 기이한 일도 있나니 / 更有異事尋麟窟
동명왕이 옛날에 신선되어 승천했다지 / 東明昔日去昇仙
정호에 남긴 활 어찌 이와 같을까 / 鼎湖遺弓爭何似
지금도 바위 남아 하늘을 향하네 
- 조천석(朝天石) - / 至今片石留朝天
전금문 동쪽엔 너른 평야 푸르고 / 轉錦門東平蕪綠
청류벽 아래엔 못이 검네 / 淸流壁下水囦玄
일대의 능도 
- 능라도(綾羅島) 이름이다 - 엔 방초 우거지고 / 一帶綾島芳菲滿
깊은 강은 옅푸른색으로 화장을 했네 / 深紅淺碧調粉鉛
소소소의 무덤 어디 있는가 / 蘇小小墳在何處
현무문 밖 선연동 
- 기생들 묘지의 이름이다 - 에 있다네 / 玄武門外洞嬋娟
은탄 
- 여울 이름이다 - 의 봄물은 포도 빛으로 푸르고 / 銀灘春水葡萄碧
채색 돛은 때때로 과피편을 보내네 / 彩颿時送瓜皮艑
잡약산 앞에는 부의 치소가 있어 / 雜藥山前開府治
푸른 기와 아로새긴 창이 첩첩이 이어졌네 / 碧瓦綺疏相疊聯
막부 주위엔 창고가 늘어섰는데 / 幕府周遭倉

그 중의 한 집 풍화를 베푸는 곳 / 中有一堂風化宣
평원루와 다경루는 어우러져 정취를 이루고 / 平遠多景渾成趣

평원과 다경은 모두 누대 이름이고, 성취(成趣)는 문 이름이다.

반짝이는 숲엔 쌍 봉황이 날아오르네 / 映帶林樹雙鳳騫
장락전 옛 궁전을 물을 곳 없으니 / 長樂舊殿無處問
궁화만 적막하고 부서진 벽돌 덮여있네 / 宮花寂寞覆碎甎
네 개 부가 똑같이 나뉘고 네거리 곧으며 / 四部平分衢街正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곧 사부(四部)이다.

밤낮으로 덜컹덜컹 수레소리 가득하네 / 日夜轟轟而闐闐
곳곳에 세워진 정자와 관사 마주보며 서있고 / 亭館處處相望起
알록달록 새긴 난간이 줄줄이 이어졌네 / 
鏤檻彌連延
붉은 해 솟자마자 물건 사라 외치는 소리 / 一竿紅日爭叫賣
온갖 잡화가 깊 양편 시전에 널렸네 / 百貨夾道列市廛
그 중에 이 나라 산물 아닌 것으로는 / 就中不數本國

비단과 명향과 계전이 있네 / 綺羅名香與罽氈
물 긷는 이 딸랑이 소리 내며 행보를 맞추는데 / 汲夫鳴鐶行爲節
어깨 밀치고 팔 스치며 선후를 다투네 / 磨肩交臂競後先
인물들 웅건함 이전 역사에도 드러나 / 人物雄强著前史
활과 말에 능하고 날램을 자랑하네 / 便弓嫺馬誇輕儇
신의를 퍽 숭상하고 연소배를 중시하니 / 頗尙然諾重年少
고기 먹고 국수 먹어도 값 따지지 않네 / 啗猪喫麪不論錢
평강방은 풍류의 소굴 / 平康坊裏風流藪
곡강에서 봄놀이하며 붉은 전지에 시 적네 / 曲江春遊題紅箋
이원의 제자 삼백 명은 / 
園弟子三百隊
하나같이 요염하고 귀밑머리는 매미날개 같네 / 箇箇妖艶鬢如蟬
박판 치며 목청 돋우고 수수무를 추니 / 檀板高歌垂手舞
천금의 금두전도 아끼지 않네 / 千金不惜錦頭纏
부호들은 붉은 치마 속에 취할 줄만 알아 / 富豪偏解紅裙醉
소반엔 사치스런 음식 고기가 즐비하네 / 盤飧侈美羅葷羶
서로 만나 의기가 통하면 술동을 기울이고 / 相逢意氣傾樽酒
수양버들에 말 매놓고 금 채찍 들고 읍하네 / 繫馬垂柳揖金鞭
초루의 슬픈 호가소리 회칠한 성가퀴에 가리고 / 譙樓悲笳隱粉堞
장대는 아득히 산꼭대기에 있네 / 將臺縹
山之巓
보통문 앞에 한바탕 달무리가 지니 / 普通門前陣月暈
김 장군 여기에 왜적의 수급을 매달았네 / 金帥於此倭級懸
계월향이 이룬 공 참으로 진기하니 / 桂娘成功眞奇事
끝내 미천한 몸을 나라 위해 바쳤네 / 竟將微軀爲國捐
명나라 군대가 전쟁 일어난 땅에 거듭 왔으니 / 天兵再造先事地
위대한 공적이 기상에 새겨졌네 / 殊勳茂績旂常鐫
무열사와 충무사 서로 가까이 있어 / 武烈忠武祠相近
영웅들의 호매한 바람 불어와 깃발을 스치네 / 英風颯爽拂旄

숭인전 건물은 학교에 접해 있어 / 崇仁殿宇接黌舍
선성과 선사를 함께 제사 지내네 / 先聖先師共豆籩
이런 것 없으면 누가 여기 함께 할 수 있을까 / 微斯孰能與於此
단군 모신 사당도 그 앞에 있구나 / 更有檀君廟在前
대동문 안 대동관에서는 / 大同門內大同館
중국 사신 접대하며 아홉 번 연회를 베푸네 / 每接皇華設九筵
옛날 사대부들 지금은 볼 수 없으나 / 昔時衣冠今不覩
벽 위엔 종종 시편들 남아있네 / 壁上往往留詩篇
쾌재정 위에서 무더위를 씻으니 / 快哉亭上滌煩暑
그윽한 꽃 야윈 바위에 병이 다 나으려 하네 / 幽花瘦石病欲痊

서진(徐振)의 〈조선죽지사(朝鮮竹枝詞)〉에 “야윈 바위 그윽한 꽃이 맑고 얕은 물가에 있나니, 납청정과 쾌재정이여”라는 구절이 있다.

길가 아로새긴 전각에 저녁종소리 울리고 / 街頭彩閣昏鍾動
달그림자 못에 잠김은 연꽃 사랑해서라네 / 月影涵池是愛蓮

애련(愛蓮)은 못의 이름인데, 종루 옆에 있다.

연광정은 패수에 임하여 / 練光亭子臨浿水
아름다운 경치 거느리고 아름다움 독점했네 / 管領風華美獨專
번화한 거리 향긋한 바람 비 한바탕 지나가고 / 紫陌香飇吹雨過
태평성세의 노랫소리 귓가에 이르네 / 太平歌管到耳邊
풍월 누대마다 온통 옛날의 자취 / 風月樓臺渾陳跡

옛날 풍월루(風月樓)가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풍월지(風月池)만 남았다.

작은 못만이 남아 명성을 전하네 / 惟有小池名相傳
덕암이 물을 막아 백성들 익사를 면하니 / 德巖捍水民免溺
깎아 세운 성의 뿌리 크기가 주먹만 하네 / 削立城根大如拳
성 아래 맑은 강은 초록빛으로 물들일 듯 / 城下澄江綠可染
돛의 까마귀 익조 그림 배가 떼로 줄 잇네 / 檣烏畫鷁簇相連
주렴 친 배에 술 싣고 쌍쌍이 지나가고 / 簾舫載酒雙雙去
퉁소 북을 다퉈 울리며 뱃전 두들겨 노래하네 / 
競發歌扣舷
사군정 외로운 정자가 구로를 마주하고 / 思君孤亭對九老

구로(九老)도 또한 정자 이름이다.

한 구비의 맑은 못이 다시금 거슬러 도네 / 一曲淸潭更洄
십 리의 평평한 숲은 푸른 연기와 어우러지고 / 十里平林靑烟合
눈 같은 흰 모래밭은 긴 내를 두르고 있네 / 白沙如雪繞長川
하물며 남포 혼 녹이는 곳엔 / 
復南浦銷魂地
하늘하늘 버들이 이별의 사념을 이끄네 / 細柳裊裊離思牽
주작문은 서쪽으로 옛 성곽과 이어지고 / 朱雀門西連古郭
오거 거리는 활시위처럼 곧네 / 五車街頭直如弦
창광산 아래엔 사원들이 줄지어 / 蒼光山下列祠院
사시로 초서 차려 항상 치성을 드리네 / 四時椒
常致虔
나무 사이 초가집들은 하나같이 깨끗한데 / 樹間屋盡明
집집마다 꽃 피어 붉게 타오르려 하네 / 家家花發紅欲燃
외성의 인사들은 학문 숭상할 줄 알고 / 外城人士知尙學
관아 있는 국당에선 시와 음악 익히네 / 曹處局堂習誦絃
서로 마주한 정양과 함구 
- 모두 성문 이름이다 - / 正陽含毬相對峙
겹겹의 팔각에 용머리가 나란하네 / 八角重重龍首騈

천연히 만들어진 흙 언덕이 있는데, 겹겹이 팔각(八角)을 이루었다.

기자의 궁과 기자의 우물 아직도 터가 남아 / 箕宮箕井尙有處
팔교문을 세워 계몽을 담당하네 / 門設八敎啓蒙顓

팔교(八敎)는 기궁(箕宮)의 문() 이름이다.

성인의 어진 정치가 어찌 시작되었나 보려거든 / 欲觀聖人仁政始
가로세로 여덟로 나눈 정전법을 보시게 / 縱橫八八是井田
가지런한 수레 길, 바둑판같아 / 秩秩軫涂如碁局
위대하다! 왕도에 치우침이란 없네 / 大哉王道無頗偏
진나라의 폭정 여기에 미치지 못한 덕에 / 可幸秦暴不及此
천년 지나도 밭두둑을 분별할 수 있네 / 千載猶能辨陌阡
왜진 서쪽으로 가 옥애 아래에 이르니 / 倭津西赴玉崖下
수덕문 가운데로 물길 하나 뚫려있네 / 水德門中一派穿
천강교는 영귀로에 접했고 / 天降橋接永歸路
양포엔 풀 푸르고 물은 졸졸졸 / 揚浦草綠水潺湲
서산의 푸른 저녁 빛 맑음 떨어지려 하고 / 西山晩翠晴欲滴
날개 펼친 강가 사당엔 채색 서까래 비상하네 / 翼然江祠飛彩椽
작은 정자 한사 
- 한사(閒似)는 정자 이름이다 - 는 그윽이 감상할 만하고 / 小亭閒似足幽賞
차문루는 초록빛 물결에 평평히 임해있네 / 車門平臨綠漪漣
낚싯배를 저물녘 봉대 가에 대니 / 釣舟晩泊鳳臺畔
여울 차가운 수포 거슬러 올라가기 좋겠네 / 寒灘瘦浦好溯沿
양각 두 섬이 강 언덕을 나누고 / 羊角雙島分江岸
이암이 홀로 서서 제연을 엿보네 / 狸巖獨立窺梯淵
긴 숲 다한 곳에 송원 있고 
- 재송원(栽松院) - / 長林盡處卽松院
떨어져 있는 인가가 맑은 샘을 베개 삼네 / 別有人家枕淸泉
성 전체를 한 폭 흰 비단에 모두 베껴놓음에 / 全城輸寫一幅素
농담과 소밀함이 천으로 만으로 다르네 / 澹濃疎密殊萬千
좋구나, 아름다운 금박을 입힌 듯한 땅이여 / 好是佳麗銷金地
절세의 빼어남은 서시에게 견줄만하네 / 絶世堪比西子姸
기억하노니, 옛날 태초에 만물이 개벽할 때 / 記昔鴻荒初開物
단군은 요 임금과 같은 때에 나라 기틀 다졌네 / 檀君肇基幷堯年
편벽한 모퉁이에서 서계 만들 줄 몰라 / 偏隅不知書契出
일천 년 동안의 일이 아득히 묻혔네 / 一千年事屬杳玄
하늘이 문명의 군자국을 여시어 / 天開文明君子國
부사가 동으로 와 간전에 터 잡았네 / 父師東來卜澗

제사와 예법 그 풍속 두터워 / 俎豆禮讓風俗厚
지금껏 은덕 받아 인자하고 어질게 교화되었네 / 于今受賜化仁賢
기자의 시대 쇠하고 선업이 땅에 떨어지자 / 箕氏世衰先業墜
위만이 연나라에서 도망쳐왔네 / 衛滿奔逃來自燕
건원천자가 영토 넓히길 좋아하니 / 建元天子喜邊事
우거가 병사 막으며 깨우칠 줄 몰랐네 / 右渠阻兵不知悛
누선의 깃발이 동해를 뒤덮더니 / 樓船旌旗蔽東海
낙랑이 한나라 강역으로 꺾여 들어갔네 / 樂浪折入漢幅員
고구려가 도읍 세운 것 언제인지 아는가 / 高氏建都知何日
험준한 땅에서 자강하여 여러 대를 이었네 / 據險自强歷世綿
수당 병사의 위세가 천지를 진동했으나 / 隋唐兵威天地動
성 아래서 공적 세우지 못한 채 오래 주둔했네 / 城下無功久屯邅
중국 장수가 와서 도호부를 설치하니 / 天將來鎭都護府
다시 중주에 속하여 호적에 편입되었네 / 復屬中州氓戶編
고려가 이에 서경을 설치해 지키며 / 勝朝爰置西京守
양쪽 변방 제압해 그 목구멍 눌렀네 / 控制兩邊扼其咽
요금에 이르러 국토가 서로 접하더니 / 降及遼金相接壤
백성들 마침내 사납고 굳세게 변했네 / 民俗遂變悍且堅
패강에 다시 〈황하청〉의 송축이 들리고 / 浿江復聞河淸頌

고악부(古樂府)에 〈황하청〉이 있는데, 패강을 황하에 비유하여 기자를 송축한 것이다.

천년만의 태평성세 교화를 즐겼네 / 千一聖世樂陶甄
전쟁터가 이내 가무 즐기는 곳 되고 / 干戈仍成歌舞地
흥망성쇠는 유유한 물따라 흘러갔네 / 盛衰悠悠逝水遷
성곽은 그대로되 사람 바뀜을 어찌 물을까 / 城是人非何須問
요양에 돌아온 학만 공연히 서성일 뿐 / 遼陽歸鶴空
蹁躚
내 이 그림 보니 솜씨 한번 좋구나 / 我見此畫眞良手
지척과 만리가 신묘하고도 상세하구나 / 咫尺萬里得妙詮
정밀하지만 넘치는 생동감 겸하였으니 / 精細又兼生意足
서희와 황전을 논할 필요 있으랴 / 何論徐
與黃筌
혜숭의 작은 풍경화는 더욱 멋들어져 / 惠崇小景尤蕭灑
입신의 경지로 붓 놀리며 빈 곳 잘 채워넣었네 / 經營入神工補塡
황홀 중에 몸이 신령의 경지에 있는 것만 같아 / 恍然身在靈境裏
모래섬의 방초를 뜯을 수도 있을 듯하네 / 汀洲芳草如可

손으로 뜯는 요현에 뭇 산들이 울리니 / 手揮瑤絃群山響
종문의 와유 참으로 편리하구나 / 宗文臥遊眞成便
나는 본디 열수 가에서 나고 자라 / 顧我生長洌水上
단정히 문을 걸어 닫고 학문 연구에 매진했네 / 端居閉戶事鑽硏
눈으로는 담벽 밖 벗어나보지 못했지만 / 眼孔未離墻壁外
마음속의 헛된 망상, 팔방 땅끝을 다 보았네 / 意內虛想窮八埏
옆 사람들 서도의 즐거움 칭송할 때면 / 傍人艶稱西都樂
껄껄껄 문 나서며 괜스레 침만 흘렸네 / 出門大笑空流涎
먼 곳 유람일랑 가난한 선비가 할 수 없는 일 / 遠遊誠非寒士辦
하물며 일에 얽매어 구속된 몸임에랴 / 
復冗累被拘攣
여산의 진면목 보지 못하고 / 未見廬山眞面目
대충 긴 노래 지어 뒷날 인연으로 남겨두네 / 謾成長歌留後緣

[-D001] 기미성(箕尾星) :

별이름이다. 기수(箕宿)와 미수(尾宿)이다.

[-D002] 금수산(錦繡山) :

평양 중부 대동강의 오른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 95미터이다.

[-D003] 모란봉(牧丹峯) :

평양 중심부 대동강 가에 있다.

[-D004] 을밀대(乙密臺) :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밑에 있는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쪽장대로 세워진 정자이다.

[-D005] 부벽루(浮碧樓) :

평양 중구역 금수산 동쪽 청류벽(淸流壁)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영명루(永明樓)이며, 392년에 세운 영명사의 부속 건물이었다. 12세기 초 예종(1106~1122 재위)이 이곳에서 잔치를 연 다음 이안(李顔)에게 명하여 이름을 다시 짓도록 했는데, 그는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청류벽 위에 둥실 떠있는 듯한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했다고 한다.

[-D006] 토산() :

평양성 북쪽에 있는 산으로, 기자의 능묘가 있다고 전한다.

[-D007] 기자(箕子) :

()나라 문정(文丁)의 아들, 제을(帝乙)의 동생,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태사(太師)를 지냈다. 이름은 서여(胥餘)인데, 은나라가 망하자 유민들을 거느리고 동이(東夷)로 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전한다. 기자는 평양에서 죽었기에 평양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는 설도 존재한다.

[-D008] 제씨의 …… 순응한 것 :

제씨는 전횡(田橫)을 말한다. 전횡 형제 세 명은 진()에 대항해 제나라를 세우고 칭왕했다. 후에 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횡은 그 밑에서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아 500명의 문객을 이끌고 바닷가 섬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유방이 보낸 자들에 의해 끌려오다가 낙양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자결하였다. 섬에 남아 있던 500명의 문객은 전횡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자결하였다.

[-D009] 영명사(永明寺) :

지금의 평양 중구역 금수산 동쪽 청류벽에 있었던 사찰로, 625 때에 전소되고 폐사되었다.

[-D010] 종소리가 …… 이르네 :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시에 “고소성 너머 한산사, 한밤중의 종소리가 객선에 들려오네.〔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라고 했다.

[-D011] 월암(月巖) :

영명사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D012] 구제궁(九梯宮) :

영명사는 본래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이었다고 한다.

[-D013] 기린굴(麒麟窟) :

동명왕이 기린을 길렀다는 굴이다. 동명왕은 기린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D014] 정호(鼎湖)에 …… 같을까 :

이 고사와 관련하여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황제가 수산의 구리를 채취하여 형산 아래서 세발솥을 주조했다. 세발솥이 완성되자 용이 수염을 드리우고 황제를 맞이하러 왔다. 황제가 올라타자 군신과 후궁 모두 70여 명이 따라 탔고, 용은 이내 하늘로 올라갔다. 나머지 소신들은 미처 올라가질 못해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용 수염이 뽑혀 떨어지고 황제의 활도 같이 떨어졌다. 백성들은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우러러 바라보며 활과 수염을 끌어안았다고 한다. 후에 그 곳을 ‘정호’라 이름하고 그 활을 ‘오호’라 불렀다.〔黃帝采首山銅 鑄鼎于荊山下 鼎旣成 有垂胡鬚下迎黃帝 黃帝上騎 群臣後宮從上者七十餘人 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 鬚拔墮 墮黃帝之弓 百姓仰望黃帝旣上天 乃抱其弓與胡鬚 故後世因名其處曰‘鼎湖’ 其弓曰烏號〕”

[-D015] 조천석(朝天石) :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밟고 갔다는 바위이다. 기린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D016] 전금문(轉錦門) :

평양 중구역 경상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문이다.

[-D017] 청류벽(淸流壁) :

평양 을밀대 근처에 있는 긴 석벽이다.

[-D018] 능도(綾島) :

능라도(綾羅島)이다. 평양 대동강 안에 있는 섬으로, 대동강의 하중도로서 모란봉 부벽루와 마주한다. 남북 길이 2.7, 해안선 길이 6㎞이며 평균해발은 10미터이다.

[-D019] 소소소(蘇小小) :

남제(南齊) 때 전당(錢塘)의 명창(名娼)이다. 《방여승람(方輿勝覽)》에 “소소소의 묘는 가흥현(嘉興縣) 서남 60()에 있다. 곧 진()의 가희(歌姬)인데, 지금 편석(片石)이 통판청(通判廳)에 있고, ‘소소소묘’라고 적혀 있다.”라고 했다.

[-D020] 현무문(玄武門) :

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으로,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D021] 선연동(嬋娟洞) :

모란봉 아래에 있는 기생들의 공동묘지 이름이다.

[-D022] 은탄(銀灘) :

백은탄(白銀灘)으로, 평양 능라도 근처에 있는 여울이다.

[-D023] 과피편(瓜皮艑) :

작고 허름한 배이다.

[-D024] 잡약산(雜藥山) :

평양에 있는 산 이름이다.

[-D025] 계전(罽氈) :

융단으로 짠 모직물로, 양탄자의 일종이다.

[-D026] 평강방(平康坊) :

당나라 장안(長安) 단봉가(丹鳳街)에 평강방(平康坊)이 있었는데, 기녀(妓女)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기에 기방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주-D027] 곡강(曲江) :

지금의 중국 서안시(西安市) 동남에 있는 강으로, 당나라 때 황제의 원림(園林)이 있던 곳으로 저명한 경승지였다.

[-D028] 이원()의 제자 :

당나라 현종(玄宗)이 거느렸던 교방(敎坊)의 기녀들이다. 송나라 정대창(程大昌)의 《옹록(雍錄)》에 “이원은 태극궁(太極宮) 서금원(西禁苑)의 안에 있다. 개원(開元) 2, 봉래궁(蓬萊宮)에 교방(敎坊)을 설치하고 상()이 스스로 법곡(法曲)을 가르쳤는데 이들을 이원 제자(園弟子)라고 한다. 천보 연간에 동궁에 의춘북원(宜春北苑)을 설치하고 궁녀 수백 인을 이원 제자로 삼았다. 곧 이원이란 안악(按樂)하는 곳이고, 가르침에 참여한 자를 제자라고 이름 불렀을 뿐이다.”라고 했다.

[-D029] 수수무(垂手舞) :

이원 제자들이 추었다는 춤 이름이다. 두 손을 곧게 늘어뜨리고 앞으로 세 걸음, 뒤로 반걸음 물러나며 춘다. 주로 등장할 때 추었으며 경쾌하고 빠르다.

[-D030] 금두전(錦頭纏) :

기녀의 가무 값으로 주는 비단이나 돈을 말한다.

[-D031] 장대(將臺) :

평양성에 있는 대() 이름이다.

[-D032] 보통문(普通門) :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위치한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그 서문으로 처음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와 개건되어 오다가 조선 시대인 1473년 고쳐 지은 것이다.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국방상ㆍ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고구려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되었다.

[-D033] 김 장군 :

김응서(金應瑞)를 말한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명나라 군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장군이다. 나중에 강홍립과 함께 후금(後金)에 거짓 투항하여 정보를 조정에 알리려고 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D034] 계월향(桂月香) :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애첩으로 평양성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 김응서가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인 고니시히의 목을 베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해 평양성 탈환에 기여했다.

[-D035] 기상(旂常) :

교룡(蛟龍)을 그린 기() 깃발과 일월(日月)을 그린 상() 깃발을 말하며, 왕후(王侯)의 기치(旗幟)이다.

[-D036] 무열사(武烈祠) :

평양에 있는 사우(祠宇)이다. 1593(선조26) 명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파견함에 큰 역할을 한 석성은 평양과 서울 수복 이후 울산ㆍ남원 전투에서 왜군에 패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가, 뒤에 심유경(沈維敬)의 화의 실패로 인한 모함을 받아 옥사했다. 이 사실을 안 조선에서는 명군이 처음 참전한 평양에 무열사를 세웠는데, 건립과 함께 사액을 내렸으며 뒷날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ㆍ양원(楊元)ㆍ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 등을 추가 배향했다. 1871(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남아 있었다.

[-D037] 충무사(忠武祠) :

평양에 있는 사우로, 김양언(金良彦, 1583~1627)과 을지문덕을 배향한 사우이다. 김양언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선익이다. 평양 출생으로 1618년 아버지가 살이호 전투에서 전사하자 복수를 결심하고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의 자손 500명을 모아 복수군을 조직해 변방 수비에 공을 세웠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척후장으로 안령에서 공을 세워 진무 공신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에 봉해졌다. 이후 군기시 주부를 지냈고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안주에서 많은 적들을 사살하고 전사했다. 사후 중추부판사 겸 의금부판사에 추증되고 평양의 충무사, 안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D038] 숭인전(崇仁殿) :

평양시 중구 종로동에 있는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를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지내는 전각으로 평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325(충숙왕12)에 창건한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D039] 선성(先聖)과 선사(先師) :

기자와 공자이다.

[-D040] 대동문(大同門) :

평양시 동쪽에 있는 성문이다. 조선 태종(太宗) 때 창건(創建)되어 중종(中宗) 때 소실된 것을 1577(선조10)에 다시 재건했다. 구조가 웅대(雄大)하고 기교가 정교(精巧) 3층 누문(樓門)인데, 조선 시대 건축의 일품으로 꼽힌다.

[-D041] 아홉 번 연회 :

임금을 대신하여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9번의 연회이다.

[-D042] 쾌재정(快哉亭) :

평양 대동관(大同館)의 동쪽 헌()이다.

[-D043] 연광정(練光亭) :

평양 중구역(中區域) 대동문동(大同門洞)에 있는 누정이다. 경치가 빼어나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혔고, 제일루대ㆍ만화루 등으로도 불렸다. 현존하는 누정은 1670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연대가 다른 글자를 새긴 기와가 20여 종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여러 번 보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난간의 바깥쪽 대동강 벼랑에는 성벽을 쌓았고, 그 위에 담장을 쌓아 연광정을 둘러막았다. 남쪽채의 대들보는 굵직하며, 천장은 통천장을 기본으로 하고 일부에만 소란반자를 댔다. 전반적으로 모루단청을 입혔고, 대들보에 비단무늬를 그렸다. 북한 사적 제5호이다.

[-D044] 패수(浿水) :

대동강의 옛 이름이다.

[-D045] 덕암(德巖) :

연광정(練光亭)이 세워져 있는 바위 이름이다.

[-D046] 돛의 …… 그림 :

원문의 ‘장오(檣烏)’는 돛대 위에 있는 까마귀 모양의 일종의 풍향계이다. 익조(鷁鳥)는 물새의 일종으로 헤엄을 잘 쳐서 배 앞에 그려넣어 침몰을 막는 상징으로 삼았다.

[-D047] 남포(南浦) :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대동강(大同江)〉시에 “비 갠 긴 제방에 풀색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전송하니 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물은 언제나 마르려나,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라고 했다.

[-D048] 창광산(蒼光山) :

평양에 있는 산 이름이다.

[-D049] 초서() :

산초 향과 정미(精米)로 만든 제물이다.

[-D050] 국당(局堂) :

경서와 문학을 가르쳤던 학교이다.

[-D051] 수덕문(水德門) :

평양 서쪽 외성(外城)에 있던 문이다.

[-D052] 천강교(天降橋) :

평양 외성(外城) 북쪽에 있던 문이다.

[-D053] 차문루(車門樓) :

대동강 가에 있는 누대이다.

[-D054] 양각(羊角) :

대동강 안에 있는 섬으로 평양직할시 중구역에 속한 섬이다.

[-D055] 이암(狸巖) :

제연(梯淵) 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D056] 재송원(栽松院) :

평양에 있는 역관(驛館) 이름이다.

[-D057] 서계(書契) :

사물(事物)을 나타내는 부호(符號)로서의 글자이다.

[-D058] 부사(父師) :

기자(箕子)이다.

[-D059] 간전() :

두 물의 이름으로, 간수(澗水)와 전수()를 말한다. 모두 지금의 낙양시(洛陽市) 경내를 지나 낙수(洛水)로 흘러들어간다.

[-D060] 위만(衛滿) :

위만 조선의 창시자이다. 중국 연나라의 관리로서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으로부터 변경 수비의 임무를 맡았다. 유망민을 기반으로 힘이 커지자 준왕을 축출하고 위만 조선을 세웠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94년부터이나 언제까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D061] 건원천자(建元天子) :

한 무제(漢武帝, 기원전 156~기원전 87)이다. 기원전 140(건원 원년)에 즉위했다.

[-D062] 우거(右渠) :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서 위만의 손자다.

[-D063] 누선(樓船) :

다락을 높이 세운 병선(兵船)을 말한다.

[-D064] 낙랑(樂浪) :

한나라의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로 4군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유일한 군이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북부의 중국 변군(邊郡)으로 존속하였다. 일부 학자들 및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 또는 요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D065] 수당 병사 :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의 고구려 침략을 말한다. 모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양만춘(楊萬春) 등의 고구려 장군에 의해 크게 패전하고 돌아갔다.

[-D066] 도호부(都護府) :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 100현으로 나누고 초대 도호(都護)로 설인귀(薛仁貴)를 주둔시켰다.

[-D067] 서경(西京) :

고려는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서 북방개척을 강화했다.

[-D068] 요양에 돌아온 학 :

정영위(丁令衛)의 요동학(遼東鶴)을 말한다. 정영위가 도술을 닦아 학이 되어 고향 요동으로 돌아와서 “성곽은 예전 같은데 사람은 다르네.”라고 했다.

[-D069] 서희() :

남당(南唐)의 화가로, 종릉(鍾陵) 사람이다. 화죽(花竹)ㆍ금어(禽魚)ㆍ소과(蔬果)ㆍ초충(草蟲) 등을 잘 그렸다.

[-D070] 황전(黃筌) :

903~965. 자는 요숙(要叔)으로, 오대(五代) 서촉(西蜀)의 화가이다. 성도(成都) 사람이며, 한림대조(翰林待詔)를 지냈다. 산수, 인물, 용수(龍水), 송석(松石), 화조(花鳥), 초충(草蟲) 등을 잘 그렸다.

[-D071] 혜숭(惠崇) :

북송(北宋) 승려 화가로, 건양(建陽) 사람이다. 소경(小景)을 잘 그렸다.

[-D072] 종문(宗文) :

종병(宗炳, 375~443)으로, 남조(南朝) ()나라 화가이다. 자는 소문(少文), 남열양(南涅陽) 사람이다. 서법과 회화, 그리고 거문고에 뛰어났다. 젊어서 여러 곳을 유람했는데 늙어서 병으로 돌아다닐 수가 없자, 유람했던 곳을 그림으로 그려서 거실에 걸어두고 스스로 말하기를 “회포를 맑게 하고 도()를 보려고 누워서 유람을 한다.”라고 했다.

[-D073] 여산(廬山)의 진면목 :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시에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음은, 몸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