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1. 18:56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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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5년 기유(1729) 10월 3일(갑진) 맑음
05-10-03[34] 희정당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이정소(李廷熽) 등이 입시하여 《동국통감》을 진강하고, 김시홍(金時泓)의 일에 대한 처분, 유배된 서종하(徐宗廈)의 아들 서명년(徐命年)의 입격(入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유엄이 아뢰기를,
“성왕(聖王)이 창업할 때는 반드시 이인(異人)이 있는데, 송(宋)나라에는 진희이(陳希夷)가, 명(明)나라에는 철관도인(鐵冠道人)이 있었으며, 고려에는 도선(道詵)이 있어 의지한 바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려 태조가 도선에게 미혹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규모는 한(漢), 당(唐)을 훨씬 능가하여 큰 공업과 성대한 덕을 자손들에게 넉넉하게 드리웠고, 태종(太宗), 세종(世宗)께서 보위를 빛나게 이어 예악이 크게 갖추어져서 불도(佛道)가 세상을 어지럽힐 염려가 없어졌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열성(列聖)께서 더욱 힘써 불교를 배척하셨으니,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칭송하며 흠탄하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외방의 사찰에는 아직도 요상하고 괴이한 중들이 모여 삽니다. 내사(內司)의 원당(願堂)이라 칭하기도 하는 것은 지난번에 박필기(朴弼琦)가 상소에서 이미 이런 폐단에 대해 논열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광릉 참봉(光陵參奉)으로 있을 때 봉선사(奉先寺)에 산다고 하는 중이 이 절은 광릉마님의 원당이라고 하기에, 신이 듣고 매우 놀라서 그 중을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불교가 멋대로 통행되는 것은 대부분 이런 따위들입니다. 이제부터는 더욱 통렬히 배척하여야 풍속을 어지럽히는 우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영조 4년 무신(1728) 2월 17일(무술) 맑음
04-02-17[26] 희정당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이제(李濟) 등이 입시하여 《황명통기》를 진강하고 이어 진강할 책을 인출하는 일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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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이 아뢰기를,
“소신은 사학(史學)에 노둔하여 문단마다 분석하고 문의(文義)를 추론하고 연역하지는 못하지만, 사서(史書)를 읽는 방법은 그 사적(事迹)을 기억하기만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먼저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야 격물(格物)의 도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유는 먼저 한 왕의 규모(規模)를 살펴 한 시대의 성패를 헤아리는 것을 역사를 살피는 법으로 여겼습니다. 명나라를 들어 논하자면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운 규모는 매우 협소하여 신하들을 예우하지 않고 사부(士夫)들을 대우하지 않아 끝내 토적(土賊)에 의해 나라가 망하였지만 그것을 근심하는 자는 매우 적었습니다. 신하 된 자가 대우가 박절하다는 이유로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런 자를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실로 예양(禮讓)을 잘 꾸미고 절의(節義)를 장려한 뒤에야 세교(世敎)를 세울 수 있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법률이 번거롭고 가혹하여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점차 유적(流賊)이 일으킨 난이 사방에서 이리저리 터져 나와 결국 나라가 이 때문에 망하였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도모한 창업은 끝내 멀리까지 경영하는 계획이 될 수 없었고, 신종(神宗)에 이르러 황장손(皇長孫)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태자은(太子銀)을 지급한 것 또한 후세를 풍족하게 하는 계획에는 크게 부족하였으니, 이런 부분을 더욱 경계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