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2. 16:04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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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1권 /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잠룡 때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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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는 곧 도조(度祖)의 외손인데, 다 힘이 세고 말타고 활쏘기를 잘 하였다. 불량한 소년들을 모아 북쪽 국경지대를 횡행하면서도 태조를 무서워하여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타스테물[塔思帖木兒]의 군사를 막으러 갔다는 말을 듣고, 여진을 유인하여 함부로 침략을 하니, 철관(鐵關)덕원(德源)에 있다. 이 모두 함몰되었다. 태조가 서북면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크게 패배시키니, 삼선과 삼개가 여진으로 달아났다. 《용비어천가》에 갑진년에 태조가 동북면 병마사로서 삼선과 삼개를 화주(和州)에서 쳤다고 하였다.
○ 태조는 천성이 인후하여 구족(九族)이 매우 화목하였으니, 비록 단문복을 면한 친족이라도 어루만지기를 매우 도탑게 하였다. 서형(庶兄) 원계(元桂), 서제(庶弟) 화(和)와 더불어 우애가 극진하여 항상 같이 거처하였고, 화의 어머니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를 서울 집에 맞아 들여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고, 나아가 뵐 때에는 항상 층계 아래에서 꿇었다. 공민왕이 자주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고, 또 교방(敎坊)의 음악을 하사하여 포상하여 총애함을 표시하였는데, 태조가 임금의 하사를 영화롭게 생각하여 전두(纏頭)를 많이 주었다. 환조(桓祖)가 별세하니, 원계가 스스로 적사자(嫡嗣子)라고 하면서 마음으로 태조를 꺼렸다.
마침 태조의 종 가운데 관청에 송사하여 양민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원계가 강우(康佑)의 처인 누이와 뜻이 맞아 모의하고 그 종과 연락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다가 뜻대로 못하였지만, 태조는 개의치 않고 대우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원계가 고려에 벼슬하여 장작판사(將作判事)가 되었는데, 살인죄에 걸려들어서 죽게 되었다. 태조가 그를 구하고자 하여 힘써 청하였지만 되지 못하니, 매우 슬퍼하며 여러 어린 것들을 사랑하여 길러서 혼인을 시켰다. 강우의 집이 가난하므로, 태조가 동정하여 많은 노비를 주었다. 개국한 뒤에 원계의 아들은 모두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다. 《동각잡기》
ⓒ 한국고전번역원 | 이병도 (역) | 1966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15년 계축 > 7월 6일 > 최종정보
세종 15년 계축(1433) 7월 6일(정사)
15-07-06[02] 검찬성 강우에게 사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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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찬성(檢贊成) 강우(康佑)에게 사제(賜祭)하였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군신의 의리는 유명(幽明)에 간격이 없는 것이니, 친족의 은혜는 마땅히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야 할 것이매, 이에 애뜻한 은전을 내리어 적이 영령을 위로하노라. 생각하건대, 경은 성품이 본디 온후하고 선량하며, 행실이 매우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므로 공훈 있는 옛 신하의 후손으로 왕실의 친척이 되어서, 태조의 조정에서 인연을 맺고, 태종의 때까지 오래 벼슬하여 두 어른의 원종 공신이 되어 한 마음으로 힘든 일에 복무하였도다. 태상(太常)의 의전(儀典)을 맡기도 하고 군적(軍籍)의 일을 통솔하다가, 중년에 이르러 병을 얻어 요양을 위하여 사퇴를 청했는데, 조정의 일을 사면하고서도 복무하는 정성을 항상 품었고, 사사집에서 조용히 있으면서도 임금 충성은 항상 간절하였도다. 언제까지라도 함께 지내리라 생각하였더니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부음이 들린단 말인가. 공훈과 친척의 의리를 추억하매 모두가 마음과 가슴이 아플 뿐이노라. 이에 변변찮은 의식을 베풀어 정의의 은전을 조금이나마 표하노라. 아아, 수명이 정한 바 있어 비록 구천(九泉)에 갔을지라도 생시나 사후나 다름이 없으매 부디 한 차례 흠향할 지어다. 이에 교시하노니 그리 알아주기 바라노라.”
하였다.
【원전】 3 집 489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