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1. 18:26ㆍ이성계의 명조선
我高皇帝卽位欲加兵, 則天下初定, 不之加則無以示威, 拘行人以辱之, 增歲幣以困之, 後至戊辰, 天威始霽, 而蕃國之封定, 蕃國之勢, 與畿內之勢異, 事大之禮, 不可不盡, 而又不可以數也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 즉위하시고 군병을 일으키려 하자 천하가 비로소 평정하여졌으니, 이 군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것이 없어 행인(行人)을 구속하여 욕을 보이기도 하고, 세폐(歲幣)를 늘려 곤란을 주기도 하다가 그 뒤 무진년에 이르러 황제의 위엄과 노여움이 비로소 그쳤고, 번국(蕃國)으로 봉(封)하는 일도 정하여졌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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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년 을해(1455) 7월 5일(무인)
01-07-05[03] 민심 수습ㆍ제도 정비ㆍ강명ㆍ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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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그 문무(文武)의 비상하신 자질로써 새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공경히 종묘(宗廟)에 알현하시니, 이는 정히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게 하실 때입니다. 신이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선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우러러 성총(聖聰)에 번독하는 바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睿鑑)으로 굽어 살피소서.
1. 민심을 얻는 것입니다. 대개 인주가 나라를 누리는 데 있어 그 장단이 바로 민심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 폐해를 제거하고 인민을 구제하는 정신으로 앞에서 창업해 놓으면 이를 계승하는 임금이 다시 그 인민을 능히 사랑해 길러 그 은택이 인심 속에 흡족히 배어 있으므로 비록 쇠잔한 세대에 이르러도 선왕의 덕을 생각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경사(經史)를 가지고 상고컨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비로소 왕업을 열어 놓으니, 무왕(武王)이 이어서 능히 그 공훈을 이루었고, 성왕(成王)ㆍ강왕(康王)이 서로 이어가며 백성을 무육(撫育)하였기 때문에, 인심이 굳게 뭉쳐 8백 년에 이르도록 잊지 않았고, 한(漢)나라의 고제(高帝)가 진(秦)나라와 항우(項羽)의 포학(暴虐)을 제거하고 천하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혜제(惠帝)ㆍ문제(文帝)ㆍ경제(景帝)가 서로 이어가며 인민을 편안하게 휴식시키고 그 정치가 백성을 기르는 데 있었으며, 광무(光武)가 다시 중흥하였고 명제(明帝)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치의 기본을 삼았기 때문에 그의 역년(曆年)이 4백 년에 이르렀으며,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고조(高祖)를 도와 수(隋)나라의 난(亂)을 평정하고 몸소 태평 세월을 이룩하였고, 현종(玄宗)에 이르러서도 개원(開元)의 치(治)가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년(曆年)이 거의 3백 년에 이르렀으며, 송(宋)나라의 태조(太祖)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오계(五季)의 난(亂)을 평정하였고 사종(四宗)이 번갈아 일어나서 백 년간 무사하였다가 고종(高宗)이 강남으로 건너갔으나 〈남송(南宋)〉 효종(孝宗)도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인주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3백 년간 비록 민ㆍ광(閩廣) 지방에 힘을 못펴고 지냈지만 민심은 하루같이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宋)나라의 원가(元嘉)와 수(隋)나라의 문제(文帝)와 주(周)나라의 세종(世宗)과 금(金)나라의 대정(大定)에 이르러서는 소강(小康)을 이루었다고 이를 수 있으나, 혹은 창업한 뒤에 쌓아 나가는 공이 없었고, 혹은 대를 이어 수성(守成)에 힘쓰는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장구한 역년(曆年)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주(周)나라의 인후(仁厚)함과 한(漢)나라의 관인(寬仁)함과 당(唐)나라의 인의(仁義)와 송(宋)나라의 충후(忠厚)와 더불어 같은 날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東方)으로 말하면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그 공덕(功德)이 사람들 머리 속에 남아 있었고, 그 뒤에 성종(成宗)ㆍ목종(穆宗)ㆍ현종(縣宗)ㆍ덕종(德宗)ㆍ정종(靖宗)ㆍ문종(文宗)ㆍ선종(宣宗)ㆍ숙종(肅宗)ㆍ예종(睿宗)ㆍ인종(仁宗)의 10대에 걸쳐 모두가 백성을 기르는 데 힘썼기 때문에 그 역년(曆年)이 5백 년을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신성(神聖)하신 자질로써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셨고, 태종(太宗)ㆍ세종(世宗)ㆍ문종(文宗)께서 서로 대를 이어 일어나셔서 도(道)가 몸에 배시고 정사를 잘 다스리시어 인민이 편안하고 물자가 풍성하게 되었으므로 그 역년(曆年)의 장구할 것을 실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도 또한 하늘이 군왕을 세워 백성을 사랑하게 한 마음과, 전대(前代)에서 민심을 얻어 긴 역년(曆年)을 누리게 된 효험을 가지고 반복해 생각하시고 순전히 생민의 산업을 기르고 민간의 숨은 고통을 구휼(救恤)하는 것을 일삼아 하신다면 본조의 성업이 곧장 단군(檀君)ㆍ기자(箕子)와 삼국(三國), 그리고 전조(前朝)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란 다름아닌,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형벌을 덜어 주는 세 가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1. 제도(制度)를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성을 휴양해 생식(生息)하도록 하는 것은 본시 인군의 선무(先務)이나,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것도 또한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법을 세우는 것은 세상을 규제하는 한 방법으로서 본시 이것은 거행하고 저것은 벌릴 수도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제를 고정하지 않으면 한때의 전장(典章)을 수시로 세우고 고치게 되어 후세 자손들이 실로 빙고(憑考)하여 의지할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周)나라의 성왕(成王)ㆍ강왕(康王)이 예악(禮樂)을 제작하였고,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한가(漢家)의 법도를 세웠으며, 당(唐)나라에서는 정관(貞觀)ㆍ개원(開元) 연간에 다같이 제도를 만들어서 모두 한 조대(朝代)의 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다만 송(宋)나라의 신법(新法)의 제도가 너무 번거로와서 또한 화(禍)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세우지 않을 수도 없으면서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서는 전조(前朝) 때 토지 제도의 전시과(田柴科)와 군사 제도의 부위제(府衛制)의 제도가 지극히 정밀하고 상세하여 잘 정제(整齊)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전제(田制)가 문란해져서 사전(私田)으로 되면서 겸병(兼倂)과 양탈(攘奪)이 자행되어 산과 내로써 토지의 경계로 삼았으며, 병제(兵制)는 폐하여져서 사병(私兵)이 되었으므로 몽고(蒙古)와 왜구(倭寇)가 번갈아 침입해 와도 방어할 만한 군사가 없었습니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조(太祖)ㆍ세종(世宗) 때 《원전(原典)》과 《속전(續典)》이 있었고, 또 《등록(謄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좋은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제(田制)와 의주(儀註)가 아직 일정한 법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병제(兵制)와 공법(貢法)도 임시로 적당하게 한 법이 많았으니, 어찌 성대(盛代)의 불충분한 전장(典章)이 아니겠습니까? 빌건대 대신(大臣)에게 명하시어 이에 다시 검토(檢討)를 더하여 한 조대(朝代)의 제도를 정하시어 자손 만대의 법칙으로 삼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전대(前代)를 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저 당ㆍ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정치는 본시 만대 제왕의 귀감(龜鑑)이 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漢)ㆍ당(唐)ㆍ송(宋)ㆍ금(金)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 모두 법받을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다만 세상의 운수가 후하고 박함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를 법받는다면 백성을 기르는 정치가 지극할 것이며, 한(漢)나라의 고제(高帝)ㆍ광무제(光武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난(亂)을 뿌리뽑고 세상을 건진 공을 어찌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규모(規模)와 기상(氣象)의 광명 정대함을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요ㆍ순(堯舜)과 합치한다.’고 하였으며, 금(金)나라 세종(世宗)의 대정(大定) 연간의 정치는 전대사(前代史)에서도 이를 칭송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당ㆍ우(唐虞)와 삼대(三代)를 법받으시고 겸하여 한(漢)ㆍ당(唐)ㆍ송(宋)ㆍ금(金)의 정치를 취하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또 우리 동방 사람들이 다만 중국의 부성(富盛)함만을 알고 동방의 일들을 상고할 줄 모르는 것은 몹시 불가한 일이니, 빌건대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백성을 구제한 것, 성종(成宗)이 제도를 정비한 것, 현종(顯宗)이 수성(守成)한 것, 문종(文宗)이 양민(養民)한 것을 모범(模範)으로 삼고, 또 의종(毅宗)이 시주(詩酒)를 좋아한 것, 충렬왕(忠烈王)이 응견(鷹犬)을 좋아한 것, 충혜왕(忠惠王)이 연유(宴遊)를 즐긴 것,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서용한 일들로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대 역사에서 구하는 것이 오히려 조종(祖宗)에서 구함만 같지 못하니, 원컨대 태조(太祖)의 용지(勇智)와, 태종(太宗)의 영명(英明)과, 세종(世宗)의 예악(禮樂)의 제작 및 생민(生民)의 무양(撫養)과, 문종(文宗)이 문교(文敎)에 전념하시면서도 무비(武備)를 잊지 않으신 일들을 모범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멀리 다른 데서 구하지 않으셔도 그 다스리는 방법이 다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1. 대체(大體)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인주의 직책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며 어진 이를 서용하여 백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넓은 집과 고운 방석 위에 계실지라도 항상 성려(聖慮)를 더하셔서 현재 여러 관서의 백관(百官)은 무슨 일이 급하며 팔도(八道)의 폐단은 어느 것이 심한가를 살피소서. 이리하여 평안도(平安道)는 유리(流離)하여 옮긴 인민들을 소생 회복케 할 대책을 의논하여 절제사(節制使)를 정하고 관사(官司)를 설치할 지역을 정할 것이며, 함길도(咸吉道)는 육진(六鎭)의 편중이 가져오는 폐해를 고려하여 용성(龍城)에 영(營)을 설치하여서 편리함을 생각할 것이며, 황해도(黃海道)의 역질(疫疾)은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고, 강원도(江原道)의 강무장(講武場)은 어느 것을 없앨 수가 있으며, 경기(京畿) 백성들의 부세(賦稅)는 어떻게 하면 번거롭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하면 요역(徭役)이 무겁지 않게 하겠습니까? 또 하삼도(下三道)는 공법(貢法)의 시행을 살펴 대납(代納)하는 폐단을 제거해야 할 것이며, 충청도(忠淸道) 이남은 누호(漏戶)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하게 하고, 경상도(慶尙道)는 왜인(倭人)을 지대(支待)하는 방법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전라도(全羅道)는 제주(濟州)의 수령을 잘 택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외방(外方)의 폐단으로서 큰 것은 모두 열거(列擧)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안으로 이조(吏曹)에서는 관제(官制)를 정하고, 호조(戶曹)에서는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를 정하며, 예조(禮曹)에서는 의주(儀注)를 정하며, 병조(兵曹)에서는 병제(兵制)를 정하고 진법(陣法)을 심의할 것이며, 형조(刑曹)에서는 노비(奴婢)의 번상(番上)하는 법을 정하고, 공조(工曹)에서는 국토의 지도(地圖)와 지적(地籍)을 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의(謀議)는 의정부(議政府)에 위임하고, 출납(出納)은 승정원(承政院)에 위임하고, 간쟁(諫爭)과 탄핵(彈劾)은 대간(臺諫)에게 위임하고, 논사(論思)는 강관(講官)에게 위임하고, 직사(職事)를 맡기는 일은 육조(六曹)에 위임할 것이며, 인민을 침해 수탈한 외리(外吏)에 이르러서는 창고리(倉庫吏)를 죄주고, 외방의 군민(軍民)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과 대소의 수륙 장수(水陸將帥)로 하여금 이를 단련해서 기르게 하면 내외 백관의 직무가 또한 다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주(周)나라에서 민심을 얻은 소이연(所以然)을 생각하고, 한(漢)나라와 같은 제도를 세우며, 전대의 정치를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을 채용하여 일은 미연에 생각하고, 시종 근신하면서 안정(安靜)을 다스림의 바탕으로 삼고, 강명(剛明)을 행정의 자세로 삼으며, 국속(國俗)을 변경하지 않고, 예로써 중국을 섬기며, 신료(臣僚)를 대접하기를 법도 있게 하고, 문무(文武)를 대하기를 하나 같이 하시면, 인군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결단코 유실함이 없을 것입니다.
1. 작은 일에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큰 변고(變故)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은 이를 소홀하게 여겼다가 결국 망하였으니, 진(秦)나라는 형벌로 망하였고, 전한(前漢)은 외척(外戚)으로 망하였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과 무장(武將)으로 망하였고, 위(魏)나라는 종실(宗室)이 약하여 망하였고, 진(晉)나라는 강호(羌胡)의 처치를 잘못하여 망하였고, 양(梁)나라는 불교를 숭상하고 후경(侯景)을 받아들여서 망하였고, 수(隋)나라는 연유(宴遊)와 고구려(高句麗)의 정벌로 망하였고, 당(唐)나라는 안으로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한 것이 화(禍)의 시초가 되어 번진(藩鎭)과 환관(宦官)이 번갈아 난역(亂逆)을 선동해서 망하였고, 후당(後唐)은 창우(倡優)로 망하였고, 송(宋)나라는 왕안석(王安石) 때문에 망하였는데,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세우고 나서 수대(數代) 사이에 군자와 소인이 원수같이 되었습니다. 남송(南宋)이 망한 것은 원(元)과 더불어 금(金)나라 사람을 협공한 것이 실책이었고, 요(遼)나라는 응견(鷹犬)으로 망하였고, 금(金)나라는 근본이 되는 땅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망하였고, 원(元)나라는 오랑캐로서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니 정령(政令)에 기강(紀綱)이 없어 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족히 따를 만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동방의 신라(新羅)가 망한 것은 여왕의 황음(荒淫) 때문이었고, 백제(百濟)가 망한 것은 갑작스런 승리로 적을 멸시한 때문이었으며, 고구려(高句麗)가 망한 것은 강한 것만 믿다가 병력이 궁진한 때문이었습니다. 전조(前朝)는 처음에는 무신(武臣)의 원한을 사게 되어 대권(大權)을 절취당하였고, 중간에는 고임받는 무리가 그 세력을 믿고 정사를 해쳤으며, 마침내에는 권세 잡은 간신들이 정권을 쥐고 백성을 침해하였는데, 왜구(倭寇)가 네 차례나 침입하여 인민이 생활에 안정하여 살 수가 없게 되어서는 나라를 유지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본조(本朝)는 조종(祖宗)의 공과 덕이 전조에 양보할 것이 없고 가법(家法)의 정대함은 훨씬 앞서고 있으나, 다만 전조 병제(兵制)의 훌륭한 점은 비록 오늘에 와서도 아직 쉽게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시고, 생민을 위하여 극진하게 하시어 일언 일동(一言一動)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고, 일정 일사(一政一事)에도 사리에 합당하도록 힘쓰시어 쉬운 것도 어렵게 도모하시고, 미세한 것에서 큰 것을 이루시면, 종사와 생민을 위하여 크게 다행하겠습니다.
1. 예법(禮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신은 듣건대 서하(西夏)는 그 나라의 예속(禮俗)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원호(元昊)는 본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금의(錦衣)와 옥식(玉食)은 번국(蕃國) 사람 체질에 편리한 것이 아니다’ 하였고, 금(金)나라의 세종(世宗)도 또한 매양 상경(上京)의 풍속을 생각하며 종신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요(遼)나라에서는 남부(南府)ㆍ북부(北府)가 있었고, 원(元)나라에서는 몽관(蒙官)ㆍ한관(漢官)이 있었는데, 원나라 사람은 그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비록 중원(中原)을 잃었어도 사막(沙漠) 이북의 본토는 옛과 같았습니다.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성위(聲威)와 교화(敎化)를 펴 왔으며, 전조(前朝)의 태조(太祖)는 신서(信書)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衣冠)과 언어(言語)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마치 제(齊)나라 사람이 노(魯)나라에 간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전조 때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서로 잇달아서 몽고(蒙古)로 투화(投化)한 것은 한 국가로서는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朝服) 이외에 반드시 다 중국 제도를 따를 필요는 없고, 언어는 통사(通事) 이외에 반드시 옛 습속을 변경하려 할 것이 아니며, 비록 연등(燃燈)ㆍ척석(擲石)이라 할지라도 역시 옛 습속을 좇아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1. 사대(事大)하기를 예(禮)로써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법의 상도(常道)로서, 예로부터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 국가는 실로 동방에 위치한 황복(荒服)의 땅입니다. 멀리 해뜨는 해변에 위치해 있고 또 산과 계곡의 천험(天險)의 지리(地利)를 가지고 있어서 수(隋)ㆍ당(唐)의 창성(昌盛)함으로도 오히려 신하로 삼지 못하였으며,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의 예로 대하였고, 금(金)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송(宋)나라는 빈례(賓禮)로 대하였고, 원(元)나라는 혼인을 서로 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원(元)나라는 전쟁을 일으킨지 수십 년에 마침내 신하로 복속케 하였고 비록 생구(甥舅)로 일컬었으나, 동국(東國)의 모든 일은 옛날과 아주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 즉위하시고 군병을 일으키려 하자 천하가 비로소 평정하여졌으니, 이 군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것이 없어 행인(行人)을 구속하여 욕을 보이기도 하고, 세폐(歲幣)를 늘려 곤란을 주기도 하다가 그 뒤 무진년에 이르러 황제의 위엄과 노여움이 비로소 그쳤고, 번국(蕃國)으로 봉(封)하는 일도 정하여졌던 것인데, 번국의 사세는 기내(畿內)의 사세와 다르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법을 다하지 않을 수도 없고, 또한 자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조에서는 종(宗)이라 일컫고 개원(改元)하였는데, 오늘에 있어서 소소한 절차를 반드시 전례에 구애받을 것은 없고 다만 그 성의를 다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는 상례의 은공(恩貢)에 표문(表文)을 붙여 치사하고 사명(使命)을 번거롭게 하지 말며, 평안한 백성을 좀 휴식케 하시면서 사대(事大)의 체통을 유지하게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문ㆍ무(文武)를 하나 같이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예로부터 문무 사이에는 시기(猜忌)와 혐오(嫌惡)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문리(文吏)는 세력도 있고 청요(淸要)의 직위를 가지는데, 무반(武班)은 근로하면서도 권세가 없어, 만일 인주가 편파적으로 문신을 믿고 언어(言語)와 예모(禮貌)에 있어 그들을 대하는 것이 혹 다르게 되면, 전조 때 경계(庚癸)의 사건이 실로 염려됩니다. 의종(毅宗) 이후 충렬왕(忠烈王)에 이르기까지 무신이 권병(權柄)을 잡고는 온 조정을 죽여 없애버린 것이 거의 다 문무 사이에 서로 얽힌 혐오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의정부와 승정원(承政院)을 비롯하여 대간(臺諫)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무로 교체해 가며 임명하고 있어, 그 배려 또한 주도(周到)합니다. 그러나 병조(兵曹)와 진무소(鎭撫所)의 사령(使令)ㆍ영사(令史)들이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를 대하는 것이 몹시 까다롭고 박하며, 시위패(侍衛牌)에 이르러서는 마치 노예(奴隷)처럼 보곤 합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문무를 대하심이 하나 같다고 이를 만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백 년을 승평(昇平)하더라도 오늘의 일들을 잊지 않으시면 종사(宗社)와 신민을 위하여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광(司馬光)이 이르기를, ‘인군이 마음을 가지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어질고 밝고 용감한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것이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간(諫)하는 것을 따르며,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고 하여 이로써 소(疏)를 지어 4조(四朝)에 바쳤는데, 신도 역시 이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반복 참작하여 임신년 겨울에 상왕(上王)께 바쳤습니다. 이제 그 고본(藁本)이 승정원에 있을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하여 그 1통(通)을 베껴서 올리도록 하시고 특히 예람(睿覽)하여 주시면 이에서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임신년에 올린 소(疏)와 행성(行城)을 파하자는 소를 가져다 보고, 양성지(梁誠之)에게 이르기를,
“너의 두 가지 소(疏)는 모두가 매우 긴절한 것이었다.”
하였다.
【원전】 7 집 6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歷史) / 무역(貿易)
[주-D004] 민ㆍ광(閩廣) :
복건(福建)ㆍ광동(廣東).
[주-D036] 사막(沙漠) :
고비 사막.
[주-D037] 투화(投化) :
귀화.
[주-D039] 척석(擲石) :
오월 단오날에 돌을 던져서 무예(武藝)를 겨루던 민속 놀이의 하나. 대개 두 패로 나누어 강가에서 행하였음.
[주-D040] 황복(荒服) :
중국에서 옛날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5백 리마다 순차적으로 나눈 5복(五服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의 하나. 즉 중국 왕성(王城)에서 가장 멀리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말임.
[주-D041] 생구(甥舅) :
사위와 장인.
[주-D042] 고황제(高皇帝) :
명나라 태조.
[주-D043] 무진년 :
1388 고려 우왕 14년.
[주-D044] 개원(改元) :
기년(紀年)을 고쳐 쓰는 것.
[주-D046] 임신년 :
1452 문종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