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9. 12:34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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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9권 / 설(說)
우리 나라의 지계에 대한 설[東國地界說] 무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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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서북쪽은 산악이 막혀 있으니 실제로는 4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는 나라이다. 바닷길로 말하자면 왜(倭)와 서로 접하여 있는데 동남의 연해가 가장 가깝다. 저들의 대마도(對馬島)ㆍ일기도(一歧島)ㆍ옥람도(玉藍島)ㆍ평호도(平戶島) 등의 섬 및 서해(西海) 구국(九國)의 땅은 모두 바람에 돛을 달면 하루나 2, 3일의 노정이요, 은기(隱歧)ㆍ백기(伯耆) 등 여러 주(州)는 강원도의 동해와 역시 3, 4일의 노정에 불과하다. 그러니 만약 그들과 화친이 깨진다면 3면의 연해가 모두 그 해를 받게 된다. 서해의 1면은 왜환(倭患)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늘 바다의 풍랑이 걱정거리가 되어 왔고, 또 중국과 흔단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수륙(水陸)으로 한꺼번에 이르러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회양(淮陽)ㆍ절강(浙江)으로부터 돛을 올리고 오니, 한(漢)ㆍ위(魏)ㆍ수(隋)ㆍ당(唐)의 일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동ㆍ서ㆍ남쪽은 각기 바다를 경계로 삼아 강역(疆域)을 다투는 일이 없지만, 서북쪽은 육지로 이어지고 산융(山戎)과 접해 있으며 또 중국과 통해 있어서 득실(得失)이 무상하다. 근본을 따져서 논하자면 요동(遼東)의 절반 땅인 오랄(烏喇) 이남은 모두가 우리 땅이다. 그런데 수(隋)ㆍ당(唐)ㆍ송(宋)의 즈음에 발해(渤海)ㆍ거란(契丹)ㆍ완안(完顔) 등의 잡종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땅의 경계가 점차 줄어들었다. 애석하게도 신라 문무왕 이후로 모두 원대한 뜻이 없어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평정하는 것으로 뜻이 이미 만족하여 다시는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해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서 커지게 하였다. 뒤에 고려 태조가 요(遼)와 국교를 끊은 것은 뜻이 또한 우연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불행하게도 훙서(薨逝)하였고, 그 뒤의 왕들은 비록 뜻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북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삼는 데 그쳐 요동의 1보의 땅도 넘보지 못하였다.
우리 조선이 개국(開國)함에 이르러 명 나라에게 국호(國號)를 청하면서 화령(和寧)으로 하고자 했으니, 화령이란 영흥(永興)의 별호다. 우리 태조대왕이 처음에 화령백(和寧伯)에 봉해지고자 한 것은 무릇 국호가 그 봉작(封爵)의 칭호일 뿐만 아니라 이 땅이 일월(日月)을 배태(胚胎)한 곳이기 때문에 성상(聖上)의 뜻은 그 곳을 병탄하고자 하여 이로써 봉호를 청한 것이었다. 오랑캐가 점점 강성해짐에 선춘(先春)의 옛 강토도 보전을 못하고 덕릉(德陵 목조(穆祖)의 능)ㆍ안릉(安陵 목조의 비인 효공 왕후(孝恭王后)의 능) 두 능도 이역(異域)으로 들어가 두만강과 압록강이 하나의 큰 철한(鐵限)이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바로 뜻있는 선비가 길게 한숨쉬고 짧게 탄식하는 까닭이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기자(箕子)의 강토와 고구려의 토지를 회복한다거나 목조(穆祖)ㆍ익조(翼祖)의 구거(舊居)를 회복하자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옛 일을 많이 알아 그 계한(界限)을 밝혀 스스로 강해질 길을 찾아야 할 뿐이다. 일찍이 듣건대,
“숙묘(肅廟) 임진년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강계(疆界)를 정하던 때에 마땅히 분계강(分界江)으로 한계를 삼았어야 한다. 분계는 두만강의 북쪽에 있는데, 그 이름을 분계라고 한 것은 대개 이곳이 피차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공공연히 수백 리의 땅을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북방 사람들이 대다수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니 그 당시 일을 맡은 사람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왕자(王者)의 다스림은 덕을 힘쓰는 것이요, 땅을 넓히기를 힘쓰는 것은 아니니 이는 작은 일에 해당된다. 참으로 크게 우려되는 점은, 만약 중국에 변이 생겨 완안(完顔)이 남으로 옮겨간다면 요(遼)와 심양(瀋陽) 일대에 또한 자립하여 세력을 확장해나갈 자가 있을 것이니, 예를 들자면 공손(公孫), 모용(慕容), 대씨(大氏), 동진(東眞) 같은 부류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구려는 강성할 때를 당했기 때문에 이씨(二氏)의 환난을 당하지 않았고, 신라의 경우는 요(遼)는 멀리 있고 대씨는 바야흐로 저들의 국내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북(浿北)의 땅만을 잃었으며, 고려는 몽고의 지원을 얻었기 때문에 동진이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원(元)의 순제(順帝)가 북쪽의 본굴(本窟)로 달아나자 흥경(興京)ㆍ오랄(烏喇) 동쪽의 수천 리 땅에 족히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요, 국경이 접해 있어 우리가 옛 예(禮)에 따라 조공을 바치다 보니 그 이해(利害)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국경의 분쟁이 일어나고 내반(內叛)의 틈이 생겨났으니, 소손녕(蕭遜寧)이 와서 고구려의 옛 지역을 요구하고 명 태조(明太祖)가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고 하던 때에 만약 서희(徐熙)와 박의중(朴宜中)의 적절한 대답이 없었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뻔했고, 조휘(趙暉)가 쌍성(雙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한순(韓恂)이 의주(義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만약 우리가 대국(大國)을 의탁하여 중국 경내의 지역과 같은 의리를 갖추지 않았다면 결국은 잃고 말았을 것이다.
또 천하에 일이 많아 도적이 종횡하면서 해동(海東)의 한 지역은 항시 망명하는 곳이 되어 왔다. 전국(戰國)의 말기에 한인(韓人)이 바다를 건너와 삼한(三韓)을 세웠고, 연(燕)의 난리에 위만(衛滿)이 동으로 오면서 기씨(箕氏)가 망했고, 대씨(大氏)가 멸망함에 남은 무리 수만 명이 모두 우리 나라로 들어왔는데 저들은 약하고 우리는 강했기 때문에 위씨(衛氏)가 쓰던 꾀를 답습하지는 못했고, 거란(契丹)이 망했을 때에 김시(金始)ㆍ김산(金山) 등이 또한 우리 나라로 와서는 옛날에 신하로서 섬기던 예(禮)를 요구하고 크게 노략질을 해 갔으니, 그 형세가 또 발해(渤海)의 주변에 몽고(蒙古)만이 있던 것과 달랐다. 발해는 동진(東眞)이 그 근처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몽고의 힘을 빌려서 평정을 했고 내안(乃顔)이 원을 배반했다가 사로잡힘에 여당(餘黨) 합단(哈丹)이 또다시 동으로 달아나 노략질을 하자 역시 원의 힘을 빌려 평정했던 것이다. 원이 망함에 나하추(納哈出)가 크게 이 지역으로 들어가자 홍건적(紅巾賊)이 난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들어왔는데, 이 때에는 대국의 지원도 없어 형세가 매우 위급했다. 다행히 우리 태조(太祖)의 신무(神武)와 세 원수(元帥 정세운(鄭世雲)ㆍ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의 용력(用力)에 힘입어 마침내 평정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명(明)이 망할 때도 우리가 먼저 침략을 받았다. 그러니 예로부터 천하의 용병(用兵)이 항상 동북쪽에 있었으며, 우리 나라가 화를 받은 연유를 전철을 통해 환히 알 수 있다. 이것을 본다면 나라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선비는 바다를 방비하고 변경을 방어하는 대책에 대해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34 > 공양왕1(恭讓王一) > 공양왕(恭讓王) 1년 > 12월 > 왕이 우왕·창왕의 처형을 태조 영전에 고하다
1389년 12월 29일(음) 계해(癸亥) ,
1390년 1월 15일(양)
왕이 우왕·창왕의 처형을 태조 영전에 고하다
○계해. 왕이 효사관(孝思觀)에 가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처형한 일을 태조(太祖)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조선(朝鮮)의 말년에 나라가 조각조각 나뉘어 78개에 이르렀는데, 약한 나라는 망하고 강한 나라가 병탄하여 모두 세 개의 큰 나라가 된 뒤로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성조(聖祖)께서 왕업을 일으키시자 하늘의 군대[天戈]가 향하는 곳에서 많은 도적들이 평정되어 김부(金傅)는 빈객(賓客)이 되었고 견훤(甄萱)은 조정에 들어왔으며 신검(神劍)은 머리를 바쳐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손이 서로 전하여 457년이 되었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적신(賊臣) 이인임(李仁任)이 국정을 전단하기를 도모하여 신돈(辛旽)의 비첩이었던 반야(般若)의 소생 우(禑)를 세워 군주로 삼고 족제(族弟)인 이림(李琳)의 딸을 아내로 들여 아들을 낳아 창(昌)이라고 하였으니, 부자가 서로 이으면서 국운[國祚]이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근자에는 창이 친조(親朝)하기를 청하였는데,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이성(異姓)이 왕이 된 것을 질책하였습니다. 자문이 이르자 이림은 재상[上相]으로서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시중(侍中) 이(李)【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떨치고 대의를 주창하여 왕씨(王氏)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니,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지용기(池湧奇)·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박위(朴葳)·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의 여덟 장상(將相)이 그 계책에 찬동하여 종친 및 백관들과 함께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궁에 가서 함께 비의 교지를 받들고 천자의 명을 선포하여 우 부자를 폐하였으며 신, 태조의 후예인 신왕(神王, 신종)의 7대손으로 하여금 정통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백관을 거느리고 조종의 묘(廟)에 반정을 고합니다.
우·창을 남겨두고 천자의 명을 기다리던 중 간관(諫官) 오사충(吳忠等) 등이 우·창을 처형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서 난신(亂臣)·적자(賊子)는 누구나 벨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먼저 행한 이후에 알려도 될 것이니, 반드시 사법관[士師]이 해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은 상언하기를, ‘두 흉악한 사람은 조종의 죄인이니, 왕씨의 신하로서 하늘을 함께 이고 있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하루도 왕씨의 땅 위에 둘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감동하여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렸는데, 모두 간관들의 논의와 같이 청하였으므로 마침내 우·창을 처형하였습니다. 이미 그 죄를 바로잡았으니 재계하고 날을 잡아 감히 성조의 어진(御眞) 앞에서 고합니다.
처음 우가 세워졌을 때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이 말하기를, ‘그는 진짜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이인임은 그를 내쫓았습니다. 신돈의 첩 반야가 스스로 말하기를, ‘우는 내가 낳은 자식이다.’라고 하자 이인임이 그를 죽였습니다. 김유(金庾)·최원(崔源)은 황제에게 말하기를, ‘우는 왕씨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가 모두 도륙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아버지는 감히 그 아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남편은 감히 그 부인에게 이야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아는 자가 점점 적어지고 또한 그 인척이 서울과 지방에 근거하고 있으니 발본색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부흥한 것은 실로 우리 조종께서 가만히 도와주신 공 덕분입니다.
아아, 이성이 이미 제거되고 종사가 이미 이어졌으니, 어기지 않고 잊지 않으면서 성조(聖祖)의 성헌(成憲)을 따르는 것이 신이 마음을 다해야 할 일입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조께서는 공신(功臣)에게 성의를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주시고 국사(國史)에 기록하여 만세에 귀감으로 삼으셨으니, 하나라도 따르지 않는다면 신은 효성스러운 자손이 아닐 것입니다. 오직 원하건대 하늘에 계신 영령들께서는 신의 성의를 살피시고 신의 뜻을 도우시어 실추함이 없게 하시고 큰 왕업을 계승함으로써 만세의 기틀을 열도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공신들에게 상을 준 것을 고하는 글에서 이르기를,
“탕(湯)은 이윤(伊尹)을 기용하여 우(禹)의 옛 제도를 계승하였습니다. 태갑(大甲)이 끝까지 잘 한 것은 이윤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척(伊陟)은 태무(大戊)를 도와 상제(上帝)까지 감격시켰습니다. 태공(太公)은 용맹을 떨쳐 천하가 주(周)를 섬기도록 하였는데, 주공(周公)과 더불어 왕실을 보좌하여 제(齊)에 봉해졌던 일이 맹부(盟府)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후손인 환공(桓公)도 천하를 바로잡아 주를 높였습니다. 탕의 종사(宗祀)가 600년이나 이어지고, 주(周)가 그 연대를 뛰어넘어 국운의 장구함을 후세의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이윤과 여상(呂尙, 태공)이 보필하였던 공을 잊지 않고 그 자손에게서 선대를 본받은 충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漢)은 삼걸(三傑)에 힘입었으나, 장량(張良)을 황제가 된 자의 스승으로 삼고서도 도를 논하지 못하게 하며 벽곡(辟穀)만을 허락하였고, 소하(蕭何)는 도필리(刀筆吏)로서 재상이 되었으나 또한 옥에 갇혔으며, 한신(韓信)은 멸족되었고, 경포(黥布)는 반란을 일으켜 화살이 황제의 몸을 적중하였습니다. 나라에 사람이 없어졌기에 대를 전해도 중간에 끊어져 유씨(劉氏)가 거의 진(秦)과 같아졌으니, 상(商)과 주가 개국의 공을 세운 아형(阿衡, 이윤)과 상부(尙父, 태공)로 하여금 후사를 보좌하도록 하여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렀던 것에 비교할 때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 멀 수 있습니까.
성조께서는 공에 보답하고자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유검필(庾黔弼)·최응(崔凝) 등 여섯 공(公)의 형상을 그려 어진과 마주보게 하고 태묘(大廟)에서 함께 제사지내도록 하시어 봄·가을마다 어긋난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후〉 31대를 전하여 공민왕에게까지 이르렀는데 자식도 없이 갑자기 훙서하시어 국운이 중간에 끊어졌으니, 공민왕의 장례에서 무지개가 해를 거듭 둘러쌌으며 우가 처음 제사[蒸]를 올릴 무렵에 올빼미가 태실(大室)에서 울어 천지가 진동하였습니다. 이듬해 3월 의릉(毅陵, 충숙왕)의 기일에는 큰 바람이 불어 비가 내렸고 천둥번개와 함께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우가 작위를 물려받을 때에 이르러서는 큰 바람이 조묘(祧廟)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함으로써 태실의 취두(鷲頭)가 부러지고 묘의 문이 넘어졌으며, 조묘 침원에 있던 소나무가 태반이 뽑혀나갔고 쥐가 태실의 신주 받침을 갉아먹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어름(御廩)에 화재가 일어났으며, 지난해 6월에는 창이 세워 둔 말이 전국보(傳國寶)의 궤짝을 발로 차서 자물쇠를 부수고 옥새를 부러뜨린 뒤 뛰쳐나가 달아나기도 하였습니다. 조종께서 이성(異姓)에게 진노하시어 그의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위엄을 보여 이를 끊으셨던 것이니, 비록 면전에서 명하여 귀를 끌어당긴다 한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인임이 이미 우를 세우고는 우의 생모 반야를 죽여 그 입을 막자 사평문(司平門)이 무너졌습니다. 그 뼈를 묻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공민왕의 궁인으로, 실제 우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자 관의 휘장이 불탔으며 이를 바꾼 뒤에도 다시 불이 났습니다. 재상 김속명을 축출하고서 김유와 최원을 살해하니, 사람들은 모두 기운이 꺾여 말이 신씨(辛氏)에 관계되면 아연실색하여 멸족을 당할 것이라고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우와 창의 인친이 심복이자 호위[爪牙]가 되어 안팎으로 뿌리를 박았으므로 이를 제거하는 어려움은 산을 뽑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중 이【태조의 옛 이름】가 충성을 다하고 의로움을 떨쳐 앞장서서 〈왕씨를〉 부흥시킬 것을 제창하니, 심덕부 등 여덟 장상이 좇으면서 그를 도와 드디어 두 흉인을 제거하였고, 우리 조종에서의 31대에 걸쳐 하늘에 배향한 제사를 다시 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문왕(文王)은 네 사람이 아니었다면 주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며, 무왕(武王)은 아홉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큰 공을 이루었습니다. 지금의 이 부흥은 진실로 성조의 도우심에서 비롯된 것이자 또한 오로지 이【태조의 옛 이름】 등의 충성이 해와 달을 꿰뚫어 공정함이 삼한(三韓)에 드러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크게 순응하였으므로 하늘이 위에서 도왔고, 크게 신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아래에서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이인임과 우·창이 길렀던 자들로 하여금 서둘러 마음을 돌려 순종하도록 할 수 있었으니, 저자에서는 점포를 옮기지 않고 사람들은 안색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하루도 되지 않아 왕씨에게로 귀부하였습니다. 이에 성조의 어진에 나아와 공을 아뢰고 포상을 시행하오니, 이【태조의 옛 이름】는 식읍을 주고 군(君)으로 봉하여 세습하도록 하며, 심덕부 이하는 충의군(忠義君)으로 봉하고 모두 세습을 허락하여 대대로 그 녹을 받게 하고, 형상을 그려내고 공적을 새겨 마르고 닳도록 맹서하며 이를 종묘에 보관합니다.
바라건대 성조께서는 뒤를 이을 왕과 아홉 사람의 후손을 도우시어,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하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위로는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는 생령을 보존하며 하늘의 녹을 함께 누림으로써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아홉 사람의 자손은 비록 대역죄를 범하더라도 감면하여 가벼운 형벌에 두도록 의논할 것이고, 다시 그 후사를 구하여 작위를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도록 할 것이니, 대대로 끊어짐이 없게 함으로써 아홉 사람의 공에 보답할 것입니다. 뒤를 이을 왕이 중흥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아홉 사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혹은 작위나 식읍을 잃게 한다면, 성조께서 그에게 죄를 주시어 나라를 누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아홉 사람의 후손으로서 그 조상의 충성을 잊어버리고 간교한 마음을 품으면서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안을 망치고 나라에 해가 되는 자가 있다면, 성조께서는 그에게 죄를 주시고 그의 작위와 식읍을 다시 다른 자손에게 지급하시어 아홉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토록 제사[血食]를 받게 하십시오. 〈이는〉 신이 아홉 사람을 사사롭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아홉 사람이 만방으로 죽음을 무릅쓴 계책을 내어 사직에 몸을 맡기고 왕씨를 부흥시킴으로써 우리 조종의 제사로 하여금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도록 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종친과 문무의 기로 및 신료들이 중흥하고 반정할 때에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향하여 어려운 속에서도 나를 호위하였으니, 신은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깁니다. 원하건대 성조께서는 영원히 그 후손을 도우시어 이들로 하여금 우리 왕실을 호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아홉 공신에게 녹권을 하사하였다. 우리 태조를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 화령군 개국충의백(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和寧郡 開國忠義伯)으로 삼고 식읍 1,000호와 식실봉(食實封) 300호, 전지 200결과 노비 20구를 하사하였으며, 심덕부를 청성군 충의백(靑城郡 忠義伯)으로 삼은 뒤 전지 150결과 노비 15구를 하사하였고, 정몽주·설장수 등 7인을 모두 충의군(忠義君)으로 삼은 뒤 각각 전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