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김용휘는〉 고가노(高家奴)의 처와 간통하였는데,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는데도 김흥경이 왕의 생신이라는 것을 이유로 왕에게 사면을 청하여 마침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2023. 4. 11. 22:24이성계의 명조선

 일찍이 〈김용휘는〉 고가노(高家奴)의 처와 간통하였는데,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는데도 김흥경이 왕의 생신이라는 것을 이유로 왕에게 사면을 청하여 마침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공민왕 임자 21년(1372) 고가노(高家奴)는 고려의 신하인가? 

 

고려사절요 29 / 공민왕 4(恭愍王四)

임자 21(1372), 대명 홍무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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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정월에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 오산불화(於山不花)ㆍ나하추(納哈出)ㆍ고가노(高家奴) 등이 와서 이성(泥城)ㆍ강계(江界) 등지를 침범하였다. ○ 지윤(池奫)을 서북면 원수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나이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여기에 소속시키고,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에게 맡게하였다. 홍륜(洪倫)ㆍ한안(韓安)ㆍ권진(權瑨)ㆍ홍관(洪寬)ㆍ노선(盧瑄) 등이 음란함으로써 왕의 사랑을 얻어 항상 침실에서 모시었다. 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여 홍륜ㆍ한안의 무리로 하여금 여러 비와 강제로 관계시켜서 사내아이를 낳게 하여 자기 아들로 삼으려 하였다. 정비(定妃)ㆍ혜비(惠妃)ㆍ신비(愼妃) 세 비는 죽음으로 항거하고 따르지 않았다. 대전보마배행수(大殿寶馬陪行首) 조준(趙浚)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인도가 없어졌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더구나 왕이 형벌을 주고 은전(恩典)을 베풀어 벼슬을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모든 일을 항상 여러 많은 소인들과 의논하고, 군자와는 의논하지 않으니, 오늘날의 사세는 매우 위태하다." 하였다. ○ 왕이 정릉(正陵)에서 제사지냈다. 제사를 마친 후에 능의 영역(塋域)을 둘러보고 배회하여 거닐며, 슬피 생각하고 공주의 화상을 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원 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며, 술잔을 주고 받는 것을 공주의 생전처럼 하였다. 종친과 재ㆍ추들도 모두 잔치에 참여했다. ○ 왕이 양릉(陽陵)에 배알하고 궁에 돌아왔는데, 전리판서 조민수(曹敏修)의 아들 취귀(取貴)가 어가를 호종하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쳐서 죽였다. 취귀가 일찍이 신돈에게 사랑을 받았으므로, 행신(倖臣) 김흥경(金興慶)이 참소하였다

 

고려사 > 권124 > 열전 권제37 > 폐행(嬖幸) > 김흥경 > 김흥경이 공민왕의 총애로 수개월만에 삼사좌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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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경이 공민왕의 총애로 수개월만에 삼사좌윤이 되다

김흥경(金興慶)은 시중(侍中) 김취려(金就礪)의 증손(曾孫)으로,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나 말을 잘 하면서 아첨을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 우달적(于達赤, 우다치)에 선발되어 임명되었으며,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여 내속고적(內速古赤, 내수구르치)으로 삼았다. 남색[龍陽]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항상 침전에서 왕을 모셨으며, 하루 저녁도 휴가를 받지 못하였다. 몇 개월 사이에 관직이 뛰어 올라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으며,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으로 옮기는 등 왕의 총애가 날로 깊어졌다. 일찍이 입직(入直)하여 호상(胡床)에 걸터앉았는데, 왕이 이를 보고 노하여 상호군(上護軍) 노숙(盧璹)을 시켜 주먹으로 구타하여 거의 죽게 만들었다. 뒤에 왕이 또 어떤 일로써 김흥경에게 태형을 가했는데, 김흥경이 노하여 내시(內侍) 송양철(宋良哲)을 구타하고 다시 거짓으로 왕의 명령이라고 하고 그에게 곤장을 때렸다. 〈김흥경이〉 대언(代言)에 임명되었을 때 상호군 김용휘(金用輝)가 김흥경에게 아부했는데, 일찍이 〈김용휘는〉 고가노(高家奴)의 처와 간통하였는데,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는데도 김흥경이 왕의 생신이라는 것을 이유로 왕에게 사면을 청하여 마침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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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15

임자년 공민왕 21( 태조 홍무 5, 1372)

○ 지연(池淵)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았다.

당시 명(明)이 원(元)의 잔당(殘黨)을 거의 다 거두어 복속시켰으나 유독 납합출(納哈出)만이 금산(金山)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산불화(於山不花)ㆍ고가노(高家奴) 및 동녕부(東寧府)에 남은 무리인 호발도(胡拔都)ㆍ장해마(張海馬) 등과 함께 여진 잡종(女眞雜種)을 이끌고 자주 이성(泥城)ㆍ강계(江界) 등지를 침구하므로 지연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 우리 태조를 화령윤(和寧尹)으로 삼았다.

왜가 종횡으로 침구하여 동북계(東北界)가 모두 노략질을 당하자, 이에 우리 태조를 화령부윤(和寧府尹) 화령은 지금의 영흥(永興) 으로 삼고, 이어 원수(元帥)로 삼았다. 

11 사신을 명에 보내어 말을 바쳤다..

○ 이해에 요양(遼陽)의 고가노(高家奴)가 명(明)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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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16 을묘 고려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부터, 무진 14년 6월까지 14년간

무오년 전폐왕 4( 태조 홍무 11, 1378) 

11.

○ 고가노(高家奴)가 와서 투항(投降)하였다.

고가노는 원(元)의 평장(平章)으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 사이에 있으면서 명(明)에 붙기도 하고, 원에 귀부(歸附)하기도 하다가 이때에 와서 군사 4만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와서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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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16

병인년 전폐왕 12( 태조 홍무 19, 1386 

12 

명에서 사신을 보내어 말을 사고, 요동과 심양(瀋陽)의 유민(流民)을 찾아 돌아갔다.

황제가 지휘첨사(指揮僉事)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을 보내어 말 5천 필을 사고, 또 기해년 이후의 요동과 심양의 유민 4만여 호를 추쇄(推刷)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전 원(元)의 심양로(瀋陽路) 달로화적(達魯花赤)인 교주(咬住) 등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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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15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 19년에 신우 12년 지휘첨사(指揮詹事) 고가노(高家奴) 등을 보내어 기단(綺段)과 포필(布疋)을 가지고 고려로 가서 말을 사게 하였는데, 말 1필당 문기(文綺) 2필, 포 8필을 주게 하였다. 《속문헌통고》

20년에 신우 13년 고가노(高家奴) 등이 고려에서 말을 사고는 돌아와서 고려 왕이 말값을 받지 않겠다고 표문을 올려 청하였다고 아뢰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예부에 유시하기를,

“짐이 여러 번국(藩國)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성실과 믿음으로 하기에 힘써 왔다. 고려에서 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고는 값을 주고 말을 사는 것을 허락하였기에 사람을 파견해서 말을 사들였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말 값을 감히 받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그들의 본심이겠는가. 대개 위세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다. 위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짐이 할 바가 아니다. 너는 짐의 이 뜻을 자문에 써 보내어 고려의 국왕에게 알리라.”

하고, 이어 연안후(延安侯) 당승종(唐勝宗)에게 유시해서 고려의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쓸만한 말을 가려 값을 갚아 주고 노둔하고 허약한 말은 값을 적당하게 감한 다음 이어 고려의 국왕에게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다. 이 칙서가 요동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려에서 보낸 말 3천 40필이 요동에 도착하였다. 당승종이 칙서의 내용대로 값을 쳐주었다.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가노(高家奴)ㆍ서질(徐質) 등이 고려로 말을 사러 갈 때에 미쳐서 예전에 원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 교주(咬住) 등이 이 사실을 말하자, 황제가 고가노 등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가 판 말을 보내는 편에 이들을 보내어 드디어 요양과 심양에서 옮겨간 유민 나타리(奈朶里)ㆍ불반(不反) 등 45호(戶) 3백 58명이 돌아왔다. 《이상 모두 엄주별집(弇州別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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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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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종[奴]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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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오재집 제2권 / 시(詩) 유관에서〔楡關〕 [DCI]ITKC_BT_0447A_0020_010_1200_2014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유관은 예로부터 중국에 속했는데 / 楡塞從來屬漢封 거란족이 침범하여 원나라 멸망했지 / 契丹渝後渥溫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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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29 / 공민왕 4(恭愍王四)

갑인 23(1374), 대명 홍무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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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김흥경(金興慶)을 언양(彦陽)으로 귀양보내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 동사강목 제15하 > 최종정보

동사강목 15

계축년 공민왕 22( 태조 홍무 6, 1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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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체복사(體覆使) 이걸생(李傑生)을 죽였다.

이에 앞서 강하 만호(江河萬戶) 하을지(河乙沚) 등이 왜를 방어하지 못해 걸생이 장배(杖配)하여 봉졸(烽卒)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은 걸생이 경솔하게 그 죄를 결정했다 하여 죽였다. 걸생은 형(刑)에 임하여 담소(談笑)하며 태연자약하였다. 당시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이 권세를 전행(專行)하여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사람들이, 걸생이 강직하고 말을 거리낌없이 하여 일찍이 흥경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