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통치한 270년 동안 끝내 당인이 각립(角立)해서 사의(私意)가 횡행한 폐해는 없고 분의(分義)와 기강이 지극히 준엄하였습니다

2023. 4. 11. 14:16이성계의 명조선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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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明朝, 1368년 ~ 1662년)는 중국 역대 왕조 중 하나로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 왕조이다. 정식 국호는 대명(大明)이며,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 청나라의 거듭되는 침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고 그 뒤에는 청나라가 이자성의 반군과 남명(南明)을 제압하고 중국을 지배하였다

 

(1392+270=1662).(1368+294=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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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7 신유(1741) 2 8(계묘) 맑음

17-02-08[31] 석강을 행하여 《춘추집전》을 강하고, 유수원의 출신에 관한 문제, 《관제서승도설》의 내용에 관한 문제, 이덕수를 서울에 머물도록 권유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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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申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석강(夕講)을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특진관 김성응(金聖應), 동지경연사 서종옥(徐宗玉), 참찬관 신택하(申宅夏), 시독관 윤득경(尹得敬), 검토관 민백행(閔百行), 부호군 유수원(柳壽垣), 가주서 이수봉(李壽鳳), 기주관 권우(權祐), 기사관 변시중(邊是重)이 입시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유수원은 미처 오지 못하였는가?”

하니, 신택하가 아뢰기를,

“집이 멀어서 미처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신문(新門) 밖에 있는가?”

하니, 신택하가 아뢰기를,

“서소문(西小門) 밖에 있습니다.”

하였다. 윤득경이 읽었는데, 《춘추집전(春秋集傳)》 26권 제12판 ‘하사월 사복교 부종 내불교(夏四月四卜郊不從乃不郊)’부터 21판 ‘동 성방(冬城防)’까지였다. 상도 이와 같이 읽었다. 윤득경이 아뢰기를,

()나라를 토벌한 일은 그들이 ()나라를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민백행이 아뢰기를,

“진(晉)나라가 지극한 정성으로 정나라를 대하였기에 수십 년에 이르도록 정나라가 더 이상 진나라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여기서 감탄하는 바가 있다.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제후들을 믿고 따르게 할 수 있었다면 그 당시 어찌 패주(霸主)가 있었겠는가. 아침에 동맹을 맺고 저녁에 배반을 일삼던 정나라를 진나라 도공(悼公)은 오히려 성심으로 복종하게 만들었는데, 나는 작은 조선(朝鮮)을 가지고도 조정의 신료를 성심으로 복종하게 만들지 못해서 아직도 당파를 세우는 습속이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진나라 도공이 위강(魏絳) 현명한 계책을 사용하였기에 이렇게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석(金石)의 악기(樂器)를 절반이나 하사한 것을 보면 위강의 공로를 알 수 있다. 또한 지무자(知武子) 말을 썼기에 초나라와 싸우지 않았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이는 임금이 거울삼아 경계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 자를 쓰고 써서 차례만 쓰지 않은 것은 대체로 그것이 예법(禮法) 어긋남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고, 윤득경은 아뢰기를,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이는 국경 밖의 일을 말한 것이다.’라고 은 비록 전적으로 계손씨(季孫氏)를 지척해서 나온 말이지만 또한 이보다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국경 안이라 하더라도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직(社稷)에 이로운 일이라면 어찌 행할 수 없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윤득경이 아뢰기를,

정무정(定無正)’ 정공(定公) 원년(元年) 정월(正月) 쓰지 않은 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가?”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나라 왕안석(王安石) 《춘추》를 조각조각 잘려진 조정의 기록이라고 하며, 오로지 자학(字學) 숭상하고 《춘추》를 폐하였습니다. 호씨(胡氏)는 12년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춘추》에 전념해서 공부하였기에 그 당시 《호씨전(胡氏傳)》을 만들어 바치게 한 것이니, 《호씨전》 가운데 ‘신(臣)’ 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씨전》은 자못 억양(抑揚)이 심해서 논설에 지나친 데가 있다.”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차례 물러났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유수원은 옛사람의 책을 많이 읽었고 문장을 하는 선비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덕수(李德壽)도 그의 문장을 인정하였습니다.”

하니, 신택하가 아뢰기를,

“문장이 남보다 뛰어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저술이 있는가?”

하니, 신택하가 아뢰기를,

“저술한 문장도 많이 있습니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신이 신만(申晩)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유용한 인재입니다. 그 책에 적힌 내용이 비록 세상에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하는 데 애썼으니, 이와 같은 사람이 사무를 담당한다면 어찌 볼만한 성과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니, 신만의 뜻도 매우 옳게 여기며 그의 재주를 칭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삼고(三考)하는 법을 시행하더라도 어찌 사사로움이 없겠는가. 만사(萬事)가 기강을 수립하는 것만 한 게 없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비록 《동서(東書)를 가지고 보더라도 국조(國朝)의 고전(古典)과 팔방(八方)의 사무(事務)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공부한 것이 넓고도 부지런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하니, 신택하가 아뢰기를,

“갑술년(1694, 숙종20)생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런가.”

하였다. 신택하가 아뢰기를,

“이조와 병조를 합친다는 말은 전배(前輩)에도 있었습니다.”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세상에서 이 사람을 쓰지 않은 것은 대체로 당론(黨論)의 과격함을 의심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세히 알지 못한 탓입니다. 이 사람은 일찍이 신축년(1721, 경종1) 임인년(1722) 사이에 당론에 준엄했던 자들과 이견을 내세운 일이 있고 상소를 올린 일도 있습니다. 신이 비록 그 상소가 언제 무슨 일을 지적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논의가 본래 과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조부(祖父)는 옛 상신(相臣) 유상운(柳尙運)의 동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 정승의 조카인가. 그 용모가 유 정승과 닮았다.”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신은 공교롭게도 유 정승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제(官制)를 한번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신은 폐질(廢疾)에 걸린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천만뜻밖에도 불러들이라는 명을 외람되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귀머거리 병으로 인해 실제 연석(筵席)에 나아갈 가망이 없으므로 감히 정리해서 기록해 둔 문자를 상소에 첨부하여 올렸습니다. 지금 한번 상세하게 진달하도록 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습니다만, 급작스럽게 들어오는 바람에 가쁜 숨이 가라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자가 산만하고 분명하지 않아 모두 아뢰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지적해서 하문해 주시면 신이 조목조목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동서》와 이 책 이외에 민간의 일이나 나랏일에 대해서 평소 온축해 온 내용을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평상시 어전(御前)에 나아오기 쉽지 않으니 모두 아뢰도록 하라.”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진달하고 싶은 것이 더러 있습니다만, 신의 구구한 마음에 오직 진달한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만이 혹 나랏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염치를 무릅쓰고 올렸습니다.”

하고, 이어 신택하를 돌아보며 아뢰기를,

“날이 저문 뒤에 비지를 받들고서 10리 길을 달려 들어온 다음 곧바로 어전에 나아오느라 숨이 가쁘니, 조금 쉰 후에야 일을 아뢸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숨이 차는가? 조금 일어나서 기운을 안정시키고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자, 유수원이 엎드린 채로 꽤 오랫동안 휴식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등과(登科)한 지는 오래되었는가?”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고(故) 판서 홍현보(洪鉉輔)와 동방(同榜)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자년(1720) 이전이다.”

하였다. 신택하가 아뢰기를,

“그가 본래 병이 있으니 존엄하신 성상의 지척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두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종성(李宗城) 양득중(梁得中) 논한 로 보건대, 남을 논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호문정(胡文定 호안국) 어찌 누구나 같아질 있는 바이겠는가.

하자, 서종옥이 아뢰기를,

“사람마다 모두 호문정과 같다면 선배(先輩)들이 어찌 굳이 호문정을 유독 칭찬하였겠습니까. 이 사람은 병이 있어서 말을 주고받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는가?”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선발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귀머거리 병에 걸린 사람은 매양 정밀하지 못한 법인데, 이 사람은 외모를 보더라도 매우 정밀하다. 틀림없이 들을 만한 게 많을 것이니 다시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진달하고 싶은 것이 비록 이것에 그치지 않습니다만, 신이 기어이 《관제서승도설》로 진달한 것은 신의 뜻이 주(周)나라 제도를 따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삼대(三代) 이후로 명(明)나라 제도가 가장 훌륭하였는데, 그 가운데 관제(官制)는 더욱 주나라 관제의 정밀한 의의를 잘 터득하였으니, 오늘날 시행한다면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간혹 명나라 조정에도 당론이 있어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만, 신은 명나라에는 본래 붕당(朋黨)이 없었으니, 이는 우리나라 유자(儒者)들이 일찍이 명나라 사적(事跡)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나라 조정에도 어찌 붕당이 없었겠는가.”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과연 동림당(東林黨) 및 제당(齊黨), 초당(楚黨), 절당(浙黨)이라는 세 붕당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이 비록 망하였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부모 나라이니 이런 말을 진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성덕(聖德)이 중년 이후로는 점차 처음과 같지 않아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재위 후기 30년 동안 신료를 접견하지 않았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며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이 전혀 모양새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서 일시적으로 당파의 명칭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나라 우이(牛李) ()이나 ()나라 낙삭(洛朔) 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는 마치 주인이 없는 집에 노복들이 스스로 서로 다투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일시적으로 정사가 어지러워 그렇게 된 것이므로 이것 때문에 정말 당론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명나라가 통치한 270년 동안 끝내 당인이 각립(角立)해서 사의(私意)가 횡행한 폐해는 없고 분의(分義)와 기강이 지극히 준엄하였습니다. 대체로 예로부터 나라를 창업해서 법제를 전해 주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법이니,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라를 창건한 초기라야 바야흐로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고조(漢高祖)와 당 태종(唐太宗)은 모두 제왕(帝王)의 학문이 없었고, 오직 대명(大命)의 고황제(高皇帝)가 비록 임금의 자질에 있어서 더러 병통이 없지는 않았지만 즉위 후 30년 동안 시종일관 학문에 매진해서 경사(經史)에 근거하여 법제를 창립하였는데 모두 의리에 맞았으니, 실로 한나라나 당나라 제도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청(淸)나라 사람으로 말해 보더라도, 저들이 비록 이적(夷狄)이지만 저들 역시 순전히 이적의 도리로 정사를 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세운 지 100년이 되도록 당론의 폐해가 없는 것은 전적으로 명나라 제도를 써서 그런 것이니, 이 역시 명나라 조정에 당론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신은 끝내 만력 연간(萬曆年間)의 일시적인 일을 당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이외에 어찌 당론이 없었겠는가.”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여항(閭巷) 사람은 간혹 명나라 사적에 대해 언급하더라도 단지 만력 중반 이후에 붕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는 세종조(世宗朝)의 장총(張璁)과 계악(桂萼) 및 만력 초기의 고공(高拱)과 장거정(張居正)이 각기 당여(黨與)가 있었던 것을 가리켜서 이러한 하교를 하신 듯합니다. 이는 여항의 선비들이 잘 집어내지 못하는 것들인데, 성상의 학문이 참으로 고명(高明)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 역시 한때 국사를 담당했던 신하들이 약간의 당여를 가졌다가 곧바로 흩어져 버린 것에 불과하니, 또한 당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승(序陞)하는 제도라 하더라도 인재가 침체되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주서에게 써서 보여 주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동중서(董仲舒)나 가의(賈誼)와 같은 인재는 어떻게 되는가?”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동중서나 가의와 같은 현인(賢人)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서승하는 법제로 말해 보면, 정자(正字)로 3년이 지나면 수찬(修撰)으로 승진하고 점차 차례대로 승진해서 15년이 지나면 당상관인 부제학으로 승진하고, 27년이 지나면 정2품으로 승진합니다. 비록 동중서나 가의와 같은 현인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관제를 적용한다면 또한 침체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과 같다면 첩경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또한 어찌 침체되는 폐단이 없겠는가. 대체로 이 책에서 그 고심(苦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또 주서에게 써서 보여 주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정자를 선발할 때와 삼고(三考)해서 서승할 때 사사로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강이 없다면 법에 따라 모두 폐단이 생길 것이다.”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대명(大明)의 전시(殿試)는 황제가 친림(親臨)해서 거자(擧子)의 작문(作文)을 시험하였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엄밀하였습니다. 또한 정자를 고선(考選)할 때에도 어제(御題)를 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러한 제도에 따라서 정자를 선발한다면 어찌 사사로움을 행할 근심이 있겠습니까. 서승하는 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 참하관(參下官)을 차례대로 승진시키는 것과 같이한다면 틀림없이 사사로움을 쫓을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관(武官)과 음관(蔭官)의 제도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성인이 《주역》을 만드실 때 끝없이 변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으니,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하면 통(通)한다.’라고 하는 게 이것입니다. 오늘날 무과(武科)로 말해 보면 그 숫자가 몇천 몇만이 되는지도 모를 지경이니, 병조 판서가 비록 공도(公道)를 적용하고자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모두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 폐해가 이미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금 문장에 능한 자는 강론하게 하고 사격에 능한 자는 사격하게 해서 이것으로 고선하여 내삼청과 군문의 장관(將官) 등속(等屬)에 나누어 차임하도록 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벼슬살이한 것을 관찰해서 차차 고과(考課)하는 법으로 차례대로 승진시켜 간다면 곤수(閫帥)의 직임에 이르기까지도 틀림없이 적임자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관에 관한 법제도 어찌 고과하여 서승하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하자, 상이 주서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렇게 써서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고, 이어 주서에게 써서 보이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것은 비록 가상한 일이지만, 나는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하나는 기강을 수립하는 것, 하나는 공도를 따르는 것,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법제가 있다 하더라도 기강이 없다면 사심이 횡행할 것이니 그것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수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매번 기강을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시는데, 신은 기강이 위엄이나 형벌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강을 세우고 공도를 넓히는 요체는 참으로 서승하는 법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玉堂)으로 말해 보더라도, 오늘 파직했다가 내일이면 서용(敍用)해서 옥당에 제수하고, 오늘 또 패초를 어겨서 파직했다가 내일이면 또다시 시종신(侍從臣)으로 삼곤 합니다. 시종신은 백관의 본보기인데 전혀 부지런히 힘써 공무를 행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데 기강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서승하는 법으로 말해 보면, 정자로 3년이 지나면 수찬으로 승진하고, 수찬으로 3년이 지나면 교리로 승진하고, 교리로 3년이 지나면 응교로 승진하니, 이처럼 15년이 지나면 응교가 당상관인 부제학으로 승진하는 것이 마치 참봉이 봉사로 승진하고 봉사가 직장으로 승진하는 제도와 같다면, 어찌 패초에 나오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차례로 승진시키는 법이 예로부터 이와 같았던 것은 관작과 봉록으로 신하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힘써 공무를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당우(唐虞) 시대로 말해 보더라도 반드시 두루 시험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을 등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9 동안 삼고해서 출척(黜陟)하는 제도가 생기게 된 까닭입니다.”

하자, 상이 곧바로 칭찬하며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이 사람은 일찍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 도설(圖說) 역시 좋다. 이 법처럼 시행된다면 근래 수령이 되기를 바라는 문관들은 틀림없이 명환(名宦)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비국 낭청에 궐원(闕員)이 있는가?”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신도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종성도 문낭청(文郎廳)을 지냈으니, 대신(大臣)과 더불어 묘당에서 계책을 상의한다면 틀림없이 도움이 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비국 낭청에 제수하도록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서종옥)가 대신에게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유수원에게 물러 나가라고 명하였다. 유수원이 물러 나갈 때 문 안에서 곡배(曲拜)하였다. 신택하가 아뢰기를,

“그는 귀머거리 병이 있으니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만, 문 안에서 곡배하였으니 일의 체모에 어긋합니다.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그는 틀림없이 내가 의미 없게 여긴다고 생각했을 터이니, 그가 어찌 품고 있는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한 탄식이 없겠는가.”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그가 본래 분수를 지키며 곤궁하게 살다가 오늘 성은(聖恩)을 받들어 성상을 가까이 뵐 수 있었으니, 그가 틀림없이 감읍했을 것입니다. 어찌 모두 아뢰지 못했다는 한탄이 있겠습니까.”

하고, 신택하는 아뢰기를,

“그가 직명이 없는 사람인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니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마음이 틀림없이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사람됨이 매우 정밀하다. 귀머거리 병이 있는 사람은 매양 정밀하지 못한데, 일찍이 시임 수령 아무개가 종신(宗臣) 아무개와 함께 들어왔을 때 내가 보았다. 이 사람은 예의와 용모가 매우 훌륭하고 품은 재주와 포부가 큰 사람이니, 조용할 때 말을 주고받으면 틀림없이 들을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이덕수(李德壽)의 귀머거리 병은 이 사람보다는 나았다.”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이덕수의 문장은 옛날에도 드물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덕수는 내가 깊이 알고 있다. 그는 사람됨이 꾸밈이 없고 진실하며 충성스럽고 질박하니, 지금 세상에서 귀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다. 서울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뜻이 있는가?”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신이 근래 이덕수를 만나 보니, ‘성상의 권우(眷遇)가 융숭하여 여러 달 동안 머뭇거리며 감히 돌아가겠다는 뜻을 고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매우 고민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문장과 학업은 옛사람에게서 구해야 할 것이니, 지금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더욱 유념해서 머물도록 권유하시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연(胄筵)을 개강(開講)하는 날에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나 역시 반드시 머물도록 권유하고자 한다.”

하니, 서종옥이 아뢰기를,

“주연에서 강설(講說)할 때 틀림없이 보탬이 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원량(元良)을 이 사람에게 맡기고자 한다. 이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 귀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다.”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D001] ()나라를 …… 때문입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11년 경(經)에, 정나라가 송(宋)나라를 침공했다가 제후들이 토벌해 오자 화친을 맺었는데, 정나라가 또다시 초나라와 연합해서 송나라를 침공하였으므로 양공이 진후(晉侯) 등과 회합해서 정나라를 토벌하였다. 결국 정나라가 복종하여 소어(蕭魚)에서 회합하였다. 이때부터 정나라는 24년 동안 진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D002] 진나라 …… 있었습니다 : 

《춘추좌씨전》 양공 11년 전(傳)에, 진나라 도공이 융적(戎狄)과 화친(和親)하여 중원(中原)을 바로잡도록 권유했던 위강의 가르침 덕분에, 8년 사이 아홉 번이나 제후를 회합할 수 있었다. 이에 도공이 그 공로를 치하하며 위강에게 자신이 소유한 악기와 악인(樂人)의 절반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D003] 지무자(知武子) …… 않았다 : 

《춘추좌씨전》 양공 10년에, 초나라와 정나라가 연합해서 송나라를 토벌하였으므로, 제후 연합군이 회합해서 정나라를 토벌하였다. 이에 초나라 공자(公子) 정(貞)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이때 진나라 난염(欒黶)은 계속해서 정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지무자가 “지금 정나라를 치면 초나라 군대가 반드시 구원할 것이니,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며, 정나라에 원한을 품었다는 뜻을 전해 훗날 토벌할 구실을 만들어 놓고 일단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지무자의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제후군이 물러가자 초나라도 군대를 물렸다고 하였다.

[-D004] () …… 것입니다 : 

《춘추좌씨전》 양공 11년 경에, “여름 4월에 교제(郊祭)를 지내는 것이 길(吉)한지 흉(凶)한지에 대해 네 차례 거북점을 쳤으나 길하지 않아 교제를 지내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주석에 교제를 지내는 것은 천자(天子)의 예법이니, 노(魯)나라에서 교제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D005] 호씨(胡氏) ……  : 

《춘추좌씨전》 양공 12년 경에, “주왕(周王) 3월 거(莒)나라 사람이 노나라 동쪽 변경 고을을 침략하여 태읍(台邑)을 포위하였다. 이에 계손숙(季孫宿)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태읍을 구원하고 드디어 거나라 운읍(鄆邑)으로 쳐들어 갔다.”라고 하였는데, 호안국이 주석에서 계손숙이 명을 받들지 않고 독단으로 운읍으로 쳐들어간 것을 지적하며 “옛날에 명을 받은 장군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국경 밖의 일이니,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직에 이로울 수 있는 것은 전단(專斷)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국경 밖의 일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6] 정무정(定無正) ……  : 

《춘추집전》 양공 12년 호안국(胡安國)의 전에, “소공(昭公)이 정공 원년에 정월이 없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만들어진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정공(定公) 원년에, “소공이 바른 마침이 없었기에 정공도 바른 시작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노나라 소공은 대부 계손씨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고, 그 후에 정공이 즉위하였으므로 이렇게 기술한 것이다.

[-D007] ()나라 …… 폐하였습니다 : 

왕안석은 《춘추》를 “조각조각 잘려진 조정의 기록이다.”라고 비판하며 학관(學館)에서 축출하였다. 《宋史 王安石列傳》

[-D008] 동서(東書) : 

유수원이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루기 위한 사회 개혁 방안을 저술하고 《우서(迂書)》라고 명명하였는데, 조현명(趙顯命)은 이 책을 《동서》라고 명명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3年 10月 24日》

[-D009] 신축년과 임인년 : 

연잉군(延礽君)의 왕세제(王世弟)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 문제를 놓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정치적 분쟁이 벌어졌던 때를 가리킨다. 이때 소론이 노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정권을 차지했던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일어났다. 《이희환, 조선후기당쟁연구, 국학자료원, 1995, 225~239쪽》

[-D010] 관제(官制) : 

이날 부호군 유수원이 올린 상소에, 자신은 귀머거리 병에 걸려 알현하라는 특교를 받들 수 없으니 대신 자신이 저술한 《관제서승도설》을 상소에 첨부하여 올린다고 하였다. 이에 영조가 이날 석강(夕講)에 함께 입시하라는 비답을 바로 내렸다. 《承政院日記 英祖 17年 2月 8日》

[-D011] 이종성(李宗城) ……  : 

1729년(영조5) 2월 입시한 자리에서 장령 양득중이 이전부터의 논계(論啓)를 전하다가 홍원명(洪源命)의 계사에 이르자 자신이 시골에 있을 때의 일이기 때문에 들은 바가 없어서 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일을 두고 신하들이 조정의 체모에 맞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종성이 이로 인해 영조가 선비들을 업신여길까 두려우니 양득중 때문에 산림(山林)의 선비를 경시하지 말라고 청하였다. 이에 조현명(趙顯命)이 이종성이 아뢴 바가 논사(論思)하는 체모를 얻었다고 칭찬하였고, 영조도 옳다고 여겼다. 《承政院日記 英祖 5年 2月 21日》

[-D012] 호문정(胡文定) …… 바이겠는가 : 

북송(北宋)의 양시(楊時)가 만년에 채경(蔡京)의 추천을 받아 기용되었는데, 조정에 있으면서 크게 건의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호안국은 홀로 “저들이 당시에 양시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폐해를 절반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가 이를 두고 공정한 논의라고 자주 말하였다. 《晦齋集 附錄 恭書御札答館學諸生疏後》

[-D013] ()나라 우이(牛李) () : 

당나라 목종(穆宗) 때부터 무종(武宗) 때까지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알력이 심하였다. 그로 인해 결국 우승유, 이종민(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이길보(李吉甫), 이덕유 부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新唐書 李德裕列傳》 《通鑑節要 穆宗紀》

[-D014] ()나라 낙삭(洛朔)  : 

북송 철종(哲宗) 무렵 서로 다투었던 두 당파를 이른다. 낙(洛)은 낙양(洛陽) 사람 정이(程頤) 일파를 말하고, 삭(朔)은 삭방(朔方)의 유지(劉摯) 일파를 말한다. 촉인(蜀人) 소동파(蘇東坡) 일파와 함께 각기 낙당(洛黨), 삭당(朔黨), 촉당(蜀黨)이라고도 하고 원우삼당(元祐三黨)이라고도 한다.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당(舊法黨)이 사마광의 사후에 이 세 당파로 나누어졌다. 《小學紺珠 名臣類 元祐三黨》

[-D015] 9 동안 : 

원문은 ‘九考’이다. 《영조실록》 17년 2월 8일 입시 기사에 근거하여 ‘考’를 ‘載’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