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 15:54ㆍ제주도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 2월 28일 계사 4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유구국 사신 선위사 이계손의 문견 사목(聞見事目)
유구국(琉球國) 사신(使臣)의 선위사(宣慰使) 이계손(李繼孫)이 《문견 사목(聞見事目)》을 올리기를,
"신과 정사(正使) 보수고(普須古)와 부사(副使) 채경(蔡璟)과 더불어 한담(閑談)을 통하여 《문헌통고(文獻通考)》182) 에 기재된 유구국의 풍속(風俗)에 대한 일에 의거하여 조목에 따라서, 남녀의 복식(服飾)과 관대(冠帶)의 제도를 묻고서 중국 통사[漢通事] 강치화(康致和)로 하여금 말을 전(傳)하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남자는 반란(斑爛)183) 의 옷을 입는데, 지금 반인(伴人)의 옷을 보면 알 수 있으며, 관(冠)은 귀국(貴國)의 중[僧]이 쓰는 죽립(竹笠)과 같다. 여자는 의상(衣裳)이 하나같이 중국 여자와 같은 데, 다만 반란(斑爛)의 옷을 더해서 머리를 덮어서 내리며, 관(冠)은 남자의 갓[笠]과 같은데 조금 크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그 풍속(風俗)에 남자는 새깃[鳥羽]으로 관(冠)을 만들고 진주(眞珠) 조개로써 장식하고 붉은 털로써 꾸미며, 부인(婦人)은 나문(羅紋)의 백포(白布)로써 모자를 만들며, 모두 잡 깃으로써 옷을 만든다.」고 하였는데, 어찌 대인(大人)의 말과 같지 아니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상고(上古)의 일은 알지 못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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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유구국도(琉球國圖)》에 의거하여 묻기를, ‘귀국(貴國)에서부터 일본(日本)에 이르기까지 경과하는 섬[島] 이름과 국내의 두두 지명(頭頭地名)191) 은 무엇인가?’ 하니, 그 대답한 말이 지도(地圖)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르기를, ‘조선(朝鮮)에서부터 떠나서 유구국(琉球國)으로 향하려면, 일본(日本)의 서쪽 해변(海邊)을 따라서 동남쪽으로 향하여 간다.’ 하였는데, 이 말이 지도와 각각 달랐습니다. 신이 다시 지도에 의거하여 묻기를, ‘나는 전에 들으니, 일본의 서쪽 해변을 따라서 서쪽으로 향하여 간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서남쪽으로 향하여 가면 강남(江南)으로 가는 길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지도에 의거하여 부상(扶桑)·영주(瀛洲)·나찰국(羅刹國)·대신(大身)·대한(大漢)·발초(勃楚)·삼불제(三佛齊)·흑치발해(黑齒勃海)·미거(尾渠) 등의 나라가 있는 곳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하였다. 다만 우리 나라의 돌 표면(表面)에 영주(瀛洲)라고 써서 새겼으니, 나는 생각건대 필시 호사인(好事人)들의 한 짓이라 여긴다. 또 일본과 우리 나라의 부상(扶桑)이라고 칭(稱)하는데, 또한 딴 부상(扶桑)이란 나라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부사(副使)가 근정전(勤政殿)에서 처음에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기를, ‘가지고 온 천축주(天竺酒)를 바치도록 명하시니 영광이 비(比)할 데가 없었으나, 마침내 항아리를 열어서 보니, 술이 아니고 사탕(砂糖)이었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무슨 말로 하겠으며 만번 죽더라도 유감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따뜻한 말을 하시고 위로하여 감정을 풀어 주시었지만, 이로부터 이후로 매양 목을 찔러서 그 수치를 씻으려고 하였으나, 다만 수종(隨從)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염려하여서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복명(復命)하면 반드시 죄책(罪責)이 있을 것이고, 또한 귀국(貴國)에 대해서도 반드시 사례(謝禮)해야 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모화관(慕華館)에서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기를, ‘왜인(倭人)으로서 우리 나라에 온 자가 모두 이르기를, 「조선(朝鮮)에서 임금이 활 쏘는 것이 천하(天下)에 무쌍(無雙)하다.」 하더니, 지금 와서 눈으로 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습니다. 성상께서 미신(微臣)으로 하여금 잔[爵]을 올리도록 하시고 옥체(玉體)를 잡도록 명하시니, 놀라움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감격(感激)함이 더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부사(副使)가 후원(後苑)에서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기를, ‘내가 중국(中國)과 외국(外國)에 두루 가보지 않는 데가 없는데, 지금 귀국(貴國)에 이르니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습니다. 모든 조신(朝臣)들의 거동(擧動)이 복건(福建)의 장락현(長樂縣)의 풍속과 비슷한데 다른 외국(外國)이 미칠 바가 못되며, 임금의 활쏘는 능력도 또한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부사(副使)가 후원(後苑)에서 관화(觀火)192) 하던 날에 말하기를, ‘화포(火砲)가 맹렬(猛烈)하여 천하(天下)에 비(比)할 데가 없으나, 다만 불꽃의 빛깔이 붉을 뿐인데, 만약 동말(銅末)193) 과 장목(樟木)194) 의 기름을 합하여 사용하면 불꽃의 빛깔이 희여질 것입니다.’고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불꽃의 빛깔이 본래 붉은데 어찌 흰 것을 쓰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통의 것을 변(變)하게 하는 것이 귀(貴)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부사(副使) 등이 상사(賞賜)하는 예물(禮物)을 받으면 반인(伴人)으로 하여금 검사하여 보게 하였고, 물건 하나마다 반드시 손을 들어 경례(敬禮)하면서 말하기를, ‘금일 전하(殿下)의 상사(賞賜)는 오로지 우리 나라 전하(殿下)의 덕(德)입니다.’ 하고, 반인(伴人)들도 또 정사(正使)·부사(副使)에게 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상사(賞賜)를 받은 것은 오로지 정사·부사의 덕(德)입니다.’ 하고 서로 칭찬하며, 얼굴에 기쁜 빛을 나타냈습니다. 부사(副使)가 또 말하기를, ‘상사한 잡물(雜物)은 모두 희귀(稀貴)한 물건입니다. 그러나, 다른 물건은 한때의 소용(所用)이지만, 서적(書籍) 같은 것은 만세 자손의 이익입니다. 더구나 정교(精巧)하기가 비(比)할 데 없으니, 귀국(貴國)의 정채(精彩)195) 가 이것에서 더욱 드러납니다.’고 하였습니다.
부사(副使)는 매양 여러 고을에 이를 때마다 산천(山川)의 수려(秀麗)함과 관우(館宇)의 넓직함이 천하(天下)에서도 또한 미칠 바가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창원부(昌原府)에 이르러 감사(監司)를 알현(謁見)하고 말하기를, ‘전하께서 미천(微賤)한 무리들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어 관(館)에서 대접하기를 넉넉하고 후(厚)하게 하시고 상사(賞賜)를 거듭 주셨고,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서도 또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시어, 방석을 겹쳐 깔고 앉고 음식 그릇을 줄지어 놓고 먹으니, 성은(聖恩)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부사(副使)가 포구(浦口)에 이르러, 국왕(國王)에게 사송(賜送)하는 예물(禮物)을 열어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희귀하고 정화(精華)한 물건입니다. 또 봉과(封裹)한 것이 견고하니, 이로 인하여 전하께서 교린(交隣)에 정성과 공경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대장경(大藏經)은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구(求)하는 물건인데, 전부 사송(賜送)하시니, 우리 전하께서 반드시 신들을 보내어 사은(謝恩)할 것입니다. 우리 정사(正使)·부사(副使)·압물(押物) 중에서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금년 2월 초8일에 작별에 임할 때에 정사(正使)·부사(副使)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물으시거든, 우리들은 대인(大人)께서 「배 가운데 1백여 인이 모두 성상의 덕(德)을 입어 모두 질병이 없고 여행할 몸차림도 이미 완전합니다.」고 아뢰어 주시기를 원합니다.’고 하였습니다.
2월 11일에 배를 출발시켰는데, 강 어귀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또 고두(叩頭)하면서 말하기를, ‘전하의 은혜가 끝이 없으니, 공효(功效)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진귀(珍貴)한 물건은 없지만 마땅히 진상(進上)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정사는 환도(環刀) 1자루를, 부사는 갑옷 1부(部)를 신에게 부탁하여 진상하였는데, 신이 말하기를, ‘무릇 사객(使客)이 진상하면 반드시 회봉(回奉)196) 이 있는데, 대인(大人)들이 출발할 날이 임박하여 회봉(回奉)이 미치지 못할 터이므로, 잘 아뢰겠으나 가지고 가서 진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처럼 추악(麤惡)한 작은 물건들은 진상하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성이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마음의 정성을 상달(上達)하고자 하는 것뿐인데, 어찌 회봉(回奉)을 바라겠습니까?’ 하므로, 신이 부득이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또 신에게 이르기를, ‘대인(大人)께서 우리를 위하여 험하고 먼 길을 왕래하면서 맞이하고 전송하시는데, 상종(相從)한 날이 오래이고 서로 사귄 도리가 날로 깊었으니, 지금 서로 작별하는 때를 당하여 정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환도(環刀) 1자루, 장검(長劍) 1자루, 철전(鐵箭) 6개, 호초(胡椒)197) 30근(斤), 목향(木香) 3근(斤)을 주므로, 신이 의(義)에 의거하여 받지 않으니, 대답하기를, ‘무기(武器)는 몸을 방어하는 물건이고 호초(胡椒)와 목향(木香)은 약물(藥物)이니, 당신에게 재화(財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을 표시할 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한 굳이 사양하니, 저들이 부끄러워하고 원망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부득이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부사(副使)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각궁(角弓)을 나의 각궁(角弓)과 바꾸고자 하였기 때문에 신이 즉시 바꾸어 주고 말하기를, ‘물건을 보거든 사람을 생각하라. 이 활을 잃어버리지 말고, 길이 애호(愛好)하기를 바란다.’ 하니, 부사(副使)가 말하기를, ‘내가 바꾼 것도 또한 그 때문이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7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7책 521면
· 【분류】
외교-유구(琉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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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琉球國使臣宣慰使李繼孫上《聞見事目》曰:
" 正副使到浦, 開見國王處賜送禮物曰, "此皆我國稀貴精華之物。 且封裹堅固, 因此可知殿下交隣誠敬之意。 況大藏我殿下誠求之物, 全部賜送, 我殿下必遣臣謝恩。 我正副使、押物中, 必復來矣。" 臣於今二月初八日臨別之時, 正副使曰, ‘殿下若問我等, 願大人啓曰: ‘船中百餘人, 共蒙上德, 皆無疾病, 裝束已完。’ 當於二月十一日發船江口, 待風而行。
용재집 제10권 / [산문(散文)]
수록대부(綏祿大夫) 당양군(唐陽君) 홍공(洪公) 비명(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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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상(常)이고 자는 자강(子剛)이며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고려조에 휘 자번(子藩)이 충렬왕(忠烈王)을 보좌하여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고 경흥군(慶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니, 공은 그 후손이다. 고조 휘 유룡(有龍)은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고, 증조 휘 덕보(德輔)는 증(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며, 조부 휘 심(深)은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다. 부친 휘 응(應)은 석덕(碩德)과 중망(重望)으로 여러 조정에 걸쳐 재상으로 있으면서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이 되고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성종(成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모친은 모현(某縣) 이씨(李氏)로 부호군(副護軍) 이발생(李發生)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맑고 순수하여 신골(神骨)이 단정하였다.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명숙공주(明淑公主)를 위해 부마(駙馬)를 간택할 때 공을 한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는바, “좋은 아이[佳兒]이다.”라고 칭찬하고는 마침내 공주의 남편으로 삼았으니, 공의 나이 막 열 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보제원(普濟院)으로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갔을 때 한 환관이 나는 버들솜을 가리키면서, “하늘에서 사화(四花)의 꽃비가 내린다.”라고 문득 칭하(稱賀)하여 상의 뜻에 아첨하자, 공이 웃으면서 “천화(天花)가 아니라 버들꽃이다.” 하였으니, 소싯적부터 강직하기가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진급하여 숭덕대부(崇德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당양군(唐陽君)에 봉해져서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병환이 들었을 때 공이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로서 시약(侍藥)하여 병이 낫자, 성종대왕께서 몹시 기뻐하셔서 곧 광덕대부(光德大夫)로 품계를 올려 주시고 민전(民田)을 특별히 후하게 하사하셨다. 일찍이 대궐 뜰에서 종친과 재신(宰臣)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을 때 충정공(忠貞公)이 당시 정승으로서 공과 더불어 서대(犀帶)를 띠고 참석하였는데, 충정공의 띠 갈고리[帶鉤]가 끊어지자 공이 띠고 있던 서대를 풀어서 바쳤다. 상께서 이 사실을 듣고 즉시 내탕고(內帑庫)의 서대 하나를 하사하시니, 보는 이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여러 차례 도총관이 되었고 오래 금병(禁兵)을 맡았는데, 성종이 매양 밀지(密旨)를 내려 공에게, “군정(軍政)은 의당 너그럽게 하고 침요(侵擾)를 금해야 한다.”고 일렀다. 공은 정성껏 심력(心力)을 다하여 그 아름다운 분부를 어김이 없었으니, 아랫사람들은 원망하는 말이 없고 장자(長者)라 불렀다. 제조(提調)로 있을 때 국가의 중책을 많이 맡아 다른 의빈(儀賓)들은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였다.
폐주(廢主) 때 재차 품계가 올라 수록대부(綏祿大夫)가 되었으니, 의빈(儀賓)으로서는 최고의 품계이다. 갑자사화 때 공은 함평(咸平)으로 찬축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이 참작되어 안성(安城)으로 배소가 옮겨졌는데, 그래도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찬축되었다. 이윽고 임금의 공에 대한 원망이 날로 깊어져 반드시 죽이고자 하여 공을 제주도(濟州島)로 유배하였다. 제주도는 옛날의 탐라국(耽羅國)으로 바닷길이 무려 900리라 큰 벌을 받는 중죄인(重罪人)이 아니면 감히 이곳에 보내지 않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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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15권 / 기행(記行)
범해록(泛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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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16년(1638, 인조16) 9월, 바다를 유람하였다.
신해일, 옛 삼천진(三千鎭)에서 숙박하고 새벽 밀물을 이용해 바다로 들어가니 바다 위로 두어 길 정도 높이에 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뱃사람이 서쪽으로 노량해협(露梁海峽)을 가리키면서 남쪽 해안에는 충민사(忠愍祠)가 있고 그 앞에 남해대전비(南海大戰碑)가 있으며, 또 북쪽 해안에는 만력(萬曆) 연간에 왜군을 정벌한 명나라 장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수군 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새벽에 창선도(昌善島)에 정박하였다. 이때에 새벽 기운이 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동방에 별이 하나둘씩 희미해져 갔다. 날이 밝은 뒤에 바라보니 이 모든 것이 고기잡이배의 횃불과 소금 굽는 연기였다. 섬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동쪽의 섬은 흥선도(興善島)라 하고 서쪽의 섬은 창선도라 하였다. 산에는 소나무와 산초나무가 많이 자라며, 태복시(太僕寺)에서 이곳에다 감목관(監牧官)을 두어 말을 기르고 있다. 섬 안의 땅은 비옥하여 수확이 잘되었고 밭두둑에는 모두 울타리를 쳐서 말들로 인해 곡식이 해를 입지 않도록 방비하였다.
무리를 지은 말 떼를 만났는데 각종의 훌륭한 말들이 많이 보였고, 산속으로 달아난 말 가운데에도 준마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 가운데 신마(神馬)가 있어 운무(雲霧) 사이로 왕왕 그 모습을 보인다고도 하였다.
저녁에 다시 배에 올라 남해의 제암(梯嵒)에 정박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배를 집 삼아 살고 잠수를 잘하여 조개를 잡아 생활하는데, 누더기 옷에다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충지(臝蟲誌)》에서 이른 단만(蜒蠻)에 해당되는 미개인들로서 그 성질이 변덕스럽고 간사하다.
다음 날 아침 비자당(榧子堂)을 방문하였다. 서쪽으로 남해현(南海縣)과는 20리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해안의 산목(山木)들이 온통 비자나무였다. 그 위에는 신사(神祠)가 있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에 어떤 왕자가 섬으로 들어와 죽어서 신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바다 가운데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영향신사(迎享神詞)〉를 지었다. - 사(詞)의 내용은 습유(拾遺)에 보인다. -
가랑비 속에 금산(錦山)에 도착하였다. 산 주위로 석축(石築)이 쌓여 있는데 오래되어 어느 해에 쌓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옛날에 이곳에서 말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곡포 권관(曲浦權管)의 옛 보루가 있다. 산 아래에서 귤을 감상하였다.
어스레한 황혼에 맑은 날씨였다. 산에 올라 깊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물은 맑고 바위들은 하얗게 빛나는데 간간이 바위 절벽과 깊은 연못이 보였다. 계곡을 따라 깊이 들어가자 길이 끊기고 없었다. 그래서 돌다리를 건너고 그늘진 벼랑 아래 바윗길을 타고 산꼭대기로 간신히 올라갔다. 바닷가의 9월 서리는 초목을 죽일 정도는 아니어서 잎들이 아직은 시들지 않았다. 산꼭대기에는 연대(烟臺)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글씨를 새겨 놓은 바위가 있었는데, ‘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由虹門上錦山〕’라는 여섯 자와 또 ‘가정 임진년(1532, 중종27)에 전 한림학사 주세붕 경유, 이응 한지, 상주포 권관 김구성이 함께 오르다.〔嘉靖壬辰前翰林學士周世鵬景遊李鷹翰之尙州浦權管金九成同登〕’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밖에 돌에 새겨진 글들은 깨어져 나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연대의 북쪽 층석(層石)은 위가 평평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고, 가장 높은 곳은 안개와 노을이 늘 감돌고 있어 하석대(霞石臺)라 불렀다. 산꼭대기 서쪽에는 오래된 사당이 있는데, 남해 사람들이 성조신사(聖祖神師)를 섬기는 곳으로서 무당을 두어 제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검매도(黔魅島) 서쪽은 해안이 저습하고 바닷물이 혼탁하며, 동쪽은 푸른 바다〔碧海〕이다. 연하도(烟霞島) 바깥으로는 혼탁한 기운이 미치지 않으며 그 바깥은 따뜻한 바다〔溫海〕로서 하늘과 그 경계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끝은 푸르고 물의 끝은 검기 때문에 이것으로 하늘과 물을 구분할 수 있다.
바다에는 섬이 많고 그 가운데 거제도(巨濟島), 한산도(閑山島), 사량도(蛇梁島), 적량도(赤梁島), 검매도, 나라도(娜羅島) 등에는 연대(烟臺)와 수루(戍壘)가 있다. 그 섬들 바깥은 외양(外洋)에 해당하는데, 연하도(烟霞島)와 욕지도(蓐芝島)가 외양에 있으며 오랑캐들은 이곳에 와서 정박한다. 동남쪽으로 멀리 일본(日本)이 있고, 서쪽으로는 탐라(耽羅)가 있다. 바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1년에 고작 두세 번 보이는데, 보이게 되면 큰 비가 내린다.
그 남쪽에는 해외의 오랑캐 국가들이 있는데, 그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민(羽民), 사화(沙華), 과와(瓜蛙), 유구(琉球), 마라노(麻羅奴) 등이며, 《외이지(外夷誌)》에는 이들 나라가 모두 바다 가운데 있으며 천하의 동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남해중감회시(南海中感懷詩)〉 2수를 지었다. - 시는 습유(拾遺)에 보인다. -
[주-D004] 단만(蜒蠻) :
중국 광동(廣東)과 복건(福建) 지방에 살던 부족을 이른다. 《남해기(南海記)》에 의하면, 그들은 배 안에다 방을 만들어 생활하는데, 그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종족, 바닷속에 들어가 진주조개를 잡는 종족, 나무를 베어서 생활하는 종족 등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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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계록(湖南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22년(1885)
4월 16일 승정원 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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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興陽) 지방 발포(鉢浦)의 관할 구역인 삼도(三島)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하고 있는 영국의 선척은 일체의 동정을 다시 탐찰하여 보고해 오기를 기다려 차례로 등문(登聞)할 계획이라고 하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즉시 도착한 이달 초7일 해시(亥時)에 성첩(成貼)한 흥양 현감(興陽縣監) 홍형주(洪瀅周)의 첩정(牒呈)에, “이달 초7일에 도착한 같은 달에 낸 본현의 삼도 동임(三島洞任) 김지홍(金智弘)의 문보(文報 공문)에, ‘본도(本島) 앞바다에 영국의 화륜선이 이르러 정박한 연유는 전에 이미 치보(馳報)하였습니다. 일본의 어선(漁船) 백여 척이 또 앞바다를 가득 채우고 혹은 대오를 지어 육지에 내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추후의 상황을 특별히 더 채탐하여 차례로 수보(修報)할 계획입니다. 연유를 우선 치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차례로 도착한 이달 12일에 성첩한 흥양 현감 홍형주의 첩정에, “본현 삼도 앞바다에 머물러 정박하고 있는 영국 병함(兵艦)의 정황을 특별히 탐찰하여 치보할 계획이라고 하는 상황은 전에 이미 첩보(牒報)하였습니다. 해당 도(島)에 정탐(偵探)하러 갔던 장리(將吏)가 이제 비로소 돌아왔으므로 요사이의 동정을 자세히 더 채탐한 뒤 한결같이 장리의 수본(手本 상사(上司) 또는 관계 관서에 보고하는 문서)에 의거하여 특별히 건기(件記 사람이나 물품의 이름 혹은 금액을 열기(列記)해 놓은 문서)를 작성하고 또 선체(船體)와 지형(地形)을 모사(模寫)하여 붙여서 올립니다. 대개 이 삼도는 현치(縣治)의 동남쪽에서부터 바다와의 거리가 5백여 리인데, 3개의 작은 섬이 줄지어 놓여있고 4개의 마을이 뒤섞여 거주하는데 덕흥(德興)ㆍ죽전(竹田)ㆍ추자(抽子)ㆍ장작(長作)이라는 마을이고 거주하는 백성들은 땅을 개간하고 새우와 게를 잡아 생계를 꾸려갑니다. 높은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는 고래의 굴택(窟宅)으로서 우리나라 사람은 삼도라 하고, 영국인은 보도화밀돈(寶道華蜜頓)이라 하고, 왜인은 거문도(巨文島)라 합니다. 이른바 거문도는 곧 본현의 여러 섬들 중 하나이고 땅은 탄환 같이 작고 민호는 10호를 채우지 못하며 거문도부터 삼도까지의 수참(水站)이 3백여 리인데 왜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삼도에 지금 현재 머물러 정박하고 있는 영국 선박이 6척인데 철삭(鐵索)을 강에 빠뜨려 가로지르고 기표(旗標)를 산에 세워 몰래 엿보는 등 각종 거동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도민(島民)에게 효유(曉諭 알아듣도록 타이름)하여 각기 안도(安堵)하여 동요하지 말게 하였으며 연유를 아울러 치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2통의 첩정(牒呈)이었습니다.
지금 해당 현감의 보고를 통해 보자면 영국함의 동정과 일본 선척의 왕래가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여러 선척의 정황을 다시 더 상탐(詳探)하여 성화같이 치보하라는 뜻으로 특별히 신칙하여 제사를 보내고, 영국선의 사정기(事情記) 및 선체와 지형을 모사한 것은 한결같이 해당 현감의 보고에 의거하여 아래에 개록(開錄)하며, 추후의 상황은 보고해 오기를 기다려 차례로 등문(登聞)할 계획입니다. 연유를 아울러 치계(馳啓)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광서 11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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