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지(耽羅誌

2022. 9. 5. 19:46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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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48 속집 / 사방(四方) 2

탐라지(耽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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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라(乇羅)는 남해 가운데 있는 작은 나라인데, 너비가 400리이고, 해로(海路)로 970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구이(九夷)의 일종이다. 상고(上古)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그곳 사람의 시조가 되었다. 세 시조가 터를 닦은 곳을 상도(上都), 중도(中都), 하도(下都)라고 한다.

 

고을나의 15세손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이 처음으로 신라와 교통(交通)하였는데, 이때 객성(客星)이 신라에 나타나니 신라왕이 고후를 성주(星主)라고 부르고 고청을 왕자(王子)라고 불렀는데, 왕자는 총애하는 자에게 붙이는 명칭이다. 당초 두 고씨가 바다를 건너와 탐진(耽津)에 정박하였기 때문에 국호를 탐라(耽羅)로 하도록 명하였다. 후세에 백제에 항복하여 탐탁라(耽乇羅)가 되고 은솔(恩率)의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 뒤에 좌평(佐平)이 되었다. 고려 태조 20년(937)에 탐탁라가 그 아들 말로(末老)를 보내와 조회하였고, 숙종(肅宗)이 등극해서 그 나라를 멸망시켜 군현으로 만들었다. 원종(元宗) 때에 이르러 탐탁라가 반란을 일으키니,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원나라가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소, 말, 낙타, 노새, 양을 방목하였다가 충렬왕 20년(1294)에 총관부가 혁파되어 다시 고려에 소속되었다.

 

고려는 제주목(濟州牧)을 설치하였는데, 6년 뒤에 원이 다시 군민만호(軍民萬戶)를 설치하여 내구마(內廐馬)를 방목하다가 곧이어 폐기하였고, 공민왕 21년(1372)에 원이 다시 만호부를 설치하였으나 원이 망하자 다시 고려에 소속되었다.

 

홍무 7년(1374, 공민왕23)에 원나라 목자(牧子)가 난을 일으켜 자칭 동서합적(東西哈赤)이라고 하면서 관장을 죽이니 고려 조정에서 최영(崔瑩)을 보내 토벌하여 모두 죽였고, 우리 태조 5년(1396)에 주(州)와 목(牧)을 설치하고 판관(判官)을 두었다.

 

태종 2년(1402)에 성주와 왕자를 혁파하여 좌우 도지관(左右都知管)을 삼고, 정의(旌義)와 대정(大靜) 두 현(縣)을 설치하였다.

 

세종 27년(1445)에 좌우 도지관을 혁파하고 그 읍에서 준수한 인재를 뽑아 상진무(上鎭撫)를 두었다.

 

주(州)의 치소(治所)는 두무악(頭無嶽) 북쪽에 있는데, 북쪽 지역은 항상 북풍이 많아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하여 기울어 있다. 정의와 대정 두 현은 두무악의 남쪽에 있는데, 남쪽 지역은 바람이 없고 장무(瘴霧)가 많아서 낮에도 어둡다.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칭인데, 또한 부악(釜嶽)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주의 치소에서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여러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못이 있으며 지세가 평평하기 때문에 두무악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정상에 백록홍(白鹿泓)이 있고, 춘분과 추분 초저녁에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 보인다.

 

부악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가 장올악(長兀嶽)인데 높이가 부악과 같고 위에 깊은 못이 있다. 큰물이 지거나 가뭄이 들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산이 높아서 5월에도 눈이 쌓여 있고, 8월에 갖옷을 입는다. 주의 치소 동쪽 50리 지점에 장사퇴(長沙堆)가 있다.

 

주와 현이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에 있어 토지가 모두 모래와 자갈인데 주의 치소 옆에 있는 광양(廣壤)만이 붉은 진흙이다.

 

그 지역은 장수하는 사람이 많고, 풍속은 음사(淫祠)를 좋아하며,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아서 여자가 남자의 일을 하므로 여정(女丁)이라는 이름이 있다.

 

섬사람들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해녀들은 치마를 입지 않고 한 자쯤 되는 베를 몸에 묶는다.

 

그곳에서 재배되는 곡물은 기장, 피, 콩, 보리이고, 생산되는 물화는 빈주(璸珠), 대모(玳瑁), 나패(螺貝)이고, 잡히는 어물은 전복, 상어, 웅어인데 태생(胎生)이고 알로 낳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과일은 귤(橘), 유자(柚子), 등자(橙子), 감자(柑子), 치자(梔子), 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난다.

 

산은 높고 바다는 사나워 그곳 사람들은 사냥과 낚시를 업으로 삼는데 그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산기슭의 땅은 돌이 많고 흙이 적기 때문에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는 밭을 밟는다. 벌레와 뱀이 많고 지네는 한 자 남짓한 크기이며, 향서(香鼠)가 난다.

 

산에는 범이나 표범, 곰, 시랑 따위의 사나운 짐승이 없고, 여우와 토끼도 없다. 날짐승으로는 황새, 까치, 부엉이가 없고 산중에는 기괴한 새들이 보인다. 공물로 바치는 짐승으로는 사슴, 돼지, 해달(海獺)이 있다.

 

탁라, 화탈(火脫), 여서(餘鼠) 사이는 바닷물이 시퍼렇고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잦다. 매해 봄과 여름에 남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면 높은 돛대에 큰 돛을 단 배가 무수히 지나간다. 이곳은 흑치국(黑齒國) 오랑캐가 중국과 교통하는 길목이고 또한 바다 건너 여러 만이(蠻夷)의 물화가 교통하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백해(白海)가 바라보이는데 최부(崔溥)가 표류하여 동풍을 타고 7일 만에 백해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너머는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D001] 구이(九夷) :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사시려고 하였다.”라고 한 부분의 주자(朱子) 주(註)에 “동방의 이(夷)는 9종(種)이 있다.” 하였고, 《후한서(後漢書)》 권58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이(夷)는 9종이 있는데,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이다.” 하였다. 이 중에서 탐라는 어느 종족인지 알 수 없다.

[-D002] 흑치국(黑齒國) :

고대의 나라 이름인데, 고적(古籍)에 설이 분분하여 확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산해경(山海經)》 권9 〈대황동경(大荒東經)〉에 흑치국조가 있는데, 곽박(郭璞)의 주에 보면 “왜(倭)의 동쪽 40리 지점에 나국(裸國)이 있고 나국의 동남쪽에 흑치국이 있는데 배로 1년 걸리는 거리이다.” 하였다.

[-D003] 최부(崔溥) :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7년(성종18)에 제주 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같은 배에 탄 43명과 함께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표류하여 온갖 고초를 겪고 반년 만에 귀국하였다. 즉시 왕명으로 일기 형식의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을 소개하였다. 특히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 방법을 배워와서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 때 이를 사용하게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1497년(연산군3)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단천(端川)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당하였다가 뒤에 신원(伸冤)되었다. 《成宗實錄 19年 8月 4日, 23年 1月 14日》 《中宗實錄 6年 3月 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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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9 / ()

원외(李員外) 탐라일기(耽羅日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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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친하게 지내는 기성랑(騎省郞) 이군(李君)이 어사(御史)로서 제주(濟州)로 나가게 되었으니, 전임 관리의 불법을 조사해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 김에 신악(神嶽)에 제사 지내고, 장오죄(贓汚罪)를 지은 관원을 내쫓고, 백성들의 고충을 살피고, 문무(文武) 재예(才藝)를 시험하고,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는 사람과 효자와 절부(節婦)와 선행이 있는 사람을 찾아보고, 여러 진(鎭)의 방수(防戍)와 요해처(要害處)를 살펴보게 하였으며, 또 토민(土民)들의 호소로 인하여 귀양 온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간악한 짓을 행하는 실상을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하게 한 일 등 모두 13조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금상 6년(1680, 숙종6) 겨울 10월에 명을 받고 하직인사를 한 뒤, 백제 땅 천여 리를 지나 강진(康津) 바닷가에 이르러서 38일 동안 바람을 기다리다가 순풍을 만나 2일 만에 제주의 화북(禾北)에 이르렀으니, 바닷길로 970리를 건너간 것이었다.

옛날 동방의 구이(九夷) 가운데 하나가 탁라()인데, 고려 때 토벌해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제주를 두었다. 원나라가 모두 3세(世)에 걸쳐 이곳에 목장을 설치했는데, 그간 고을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킨 적도가 둘이 있었으므로 김방경(金方慶), 최영(崔瑩)을 보내어 모두 쳐서 평정시켰다. 우리 태종 2년(1402)에는 험고한 지세를 믿고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한라산(漢拏山) 남쪽에 두 고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외이기(外夷記)》에,

“탁라는 목축을 좋아하고,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며, 예양(禮讓)을 알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남쪽 끝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항상 흐리고 맑은 날이 적으며 사나운 바람이 자주 불고 장마가 길며 겨울에도 벌레들이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주현(州縣)은 모두 해변과 산기슭에 있으며, 부악(釜嶽)이 가장 높고 큰데 사방이 400리이다.”

하였다.

일을 마치고 그 이듬해 4월에 복명(復命)했으니, 왕래한 거리가 수륙으로 4000리였다. 그의《남행일기(南行日記)》에는 해외의 산천(山川)ㆍ언어(言語)ㆍ기욕(嗜欲)ㆍ물산(物産)ㆍ진괴(珍怪)ㆍ풍속(風俗)ㆍ공물(貢物)ㆍ치첩(雉堞)ㆍ군려(軍旅)ㆍ병기(兵器)ㆍ저축(貯蓄)ㆍ고사(古事)ㆍ고적(古跡)ㆍ조망(眺望)ㆍ도리(道里)ㆍ기예(技藝)ㆍ성악(聲樂)ㆍ학교(學校)ㆍ사당(祠堂)ㆍ경작(耕作)ㆍ공상(工商)ㆍ백례(百隷)에 이르기까지 빠뜨림 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도 어사를 파견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현량(賢良)을 찾아내고,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며, 국가의 덕과 은혜를 펴고, 고을 관리들의 불법 행위와 공적, 산천ㆍ토전(土田)ㆍ농상(農桑)ㆍ민업(民業)ㆍ풍속ㆍ물화(物貨)를 살피게 하여 민속을 바로잡았으니, 모두 사자(使者)의 직책이다.

훌륭하다! 그대는 사자의 일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지금 이 글을 사방의 도적(圖籍)에 열거하여 국가 정치를 맡은 사람과 국경 방비를 담당한 사람의 요법(要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신유년(1681, 숙종7) 중추(仲秋) 한로절(寒露節)에 미수는 쓴다.

[-D001] 기성랑(騎省郞) :

병조의 낭관을 가리킨다.

[-D002] 신악(神嶽) :

한라산(漢拏山)을 가리킨다.

[-D003] 탁라() :

제주의 고호이다.

[-D004] 부악(釜嶽) :

한라산의 다른 이름으로, 두무악(頭無嶽)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