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5. 21:25ㆍ고대사
태종 4년 갑신(1404) 11월 28일(병인)
04-11-28[02] 권근이 《예경천견록》을 찬집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는 전문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권근(權近)이 《예경천견록(禮經淺見錄)》을 찬집(撰集)하고자 하여, 전(箋)을 올려 사면(辭免)하기를 구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전(箋)은 이러하였다.
“권근(權近)이 말씀드립니다. 옛날 신(臣)의 좌주(座主) 한산(韓山) 이색(李穡)이 일찍이 신(臣)에게 이르기를, ‘육경(六經)이 모두 진(秦)나라 때 불탔는데, 《예기(禮記)》가 더욱 심하게 산일(散逸)되었었다. 한(漢)나라 때 유자(儒者)가 불탄 나머지를 주워 모아서, 그 얻은 바대로 선후(先後)로 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 글이 뒤섞여 혼란하고 질서가 없었다. 선유(先儒)가 《대학(大學)》 한 책(冊)을 밝혀 내어 구절(句節)의 차례를 상고하여 정하였으나, 그 나머지는 손대지 못하였다. 나에게 이르러, 부문(部門)을 나누어 유(類)대로 모아 따로 한 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네가 그것에 힘써라.’ 하였습니다.
신(臣)이 지시하여 준 것을 받들어 매양 차례대로 편찬하려고 하였으나, 종사(從仕)하여 바쁘게 일하다가 보니, 또한 능히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 때에는 죄를 얻어 귀양가게 되었으나, 다행히 태상왕(太上王) 전하의 흠휼(欽恤)하는 인정(仁政)을 입어, 성명(性命)을 얻어서 보존하여, 향리(鄕里)에 안치(安置)되었는데, 신미년 봄부터 임신년 가을까지 십 수개월 간을 비로소 이 경전(經典)을 연구할 수 있게 되어, 편(編)에 따라 유(類)대로 차례를 정하여 이에 그 초고(草藁)를 이룩하였습니다. 다만 본경(本經)의 문자가 호양(浩穰)하기 때문에 모두 쓰기가 쉽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로지 매절 처음과 끝에다 몇 자 적기를, ‘아무데에서 아무데까지는 옛날 아무 절의 아래에 있었으니, 지금 마땅히 아무데에 있어야 한다.’ 하고, 가끔 또한 억견(臆見)의 설(說)을 그 아래에 덧붙여 주(註)하였을 뿐입니다. 장차 본경(本經)의 정문(正文)을 다 쓰고, 다음으로 《진씨집설(陳氏輯說)》을 쓴 뒤에, 억견(臆見)의 설(說)을 덧붙여 하나의 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수 개월 사이에 붓하나의 힘으로 가히 갖출 수 있는 바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시에 있어서 능히 탈고(脫稿)하지 못하고, 남은 여생을 기다려 그 완성을 끝내고자 하였습니다. 개국(開國)하던 처음에 불러 쓰심을 입었고, 전하가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또한 공(功)이 없는 이를 외람되게 공신의 반열에 참여시켜, 지위가 재보(宰輔)에 이르고, 다시 같이 맹세하는 데 참여하게 하니, 감격함이 하늘에까지 사무쳐 몸이 죽어 가루가 되더라도 은혜를 갚기 어렵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신(臣) 권근(權近)은 자질이 본디 병이 많아서 가끔 병이 발작하는데, 지금 또 발작이 더하여 그 병세가 더욱 위독하여져서, 팔다리와 몸이 여위어 지치고, 머리와 눈이 어찔어찔하여 정신이 흐려 잘 잊어버리고, 귀가 먹어 듣기가 힘드니, 봉직(奉職)하기가 어렵습니다. 술자(術者)가 또 말하기를, ‘오는 을유년부터 정해년ㆍ무자년에 이르기까지 수년 동안은 모두 액운(厄運)이므로, 거의 무사히 지나가기가 어렵다.’ 하니, 그 말이 비록 족히 믿을 것이 못되나, 신이 병이 많기 때문에 점쳐 본 것이니, 능히 향수(享壽)할 수 없는 것도 또한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이 책을 편찬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제 1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편(篇)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하루 아침에 질병을 고치기가 어려워 해는 서산(西山)에 가까워지므로, 갑자기 성대(盛代)를 하직하여, 신의 스승이 부탁한 바를 길이 저버리고 땅에 묵힐까 두려우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또 신이 아는 식견(識見)이 얕고 짧아 오래 낭묘(廊廟)에 있어도 털끝만치도 보탬이 없습니다. 만약 신의 직임을 갈아서 세상 일을 물리쳐 없애고 뜻을 전일(專一)할 수 있도록 하여 마침내 이 책을 이루게 하면, 비록 그것이 광패(狂悖)하고 참람(僭濫)하여 벗어날 수 없는 죄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후학(後學)에게 반드시 도움이 없다고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 전하는 신(臣)이 쇠약하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고, 신의 지극한 소원을 양찰(諒察)하여서, 직임을 면하도록 하여 한가한 데 거하고 산질(散秩)에 처하게 하여, 약이(藥餌)의 여가에 다시 정력을 더하여서 그 사공(事功)을 끝마치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지찰(紙札)을 주어 베껴 쓰는 것을 도와서 정돈하여 전서(全書)를 완성하게 하고,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전(傳)하면, 신(臣)의 저술이 비록 족히 볼 만한 것이 못되더라도, 후진(後進)의 선비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흥기(興起)하여 경적(經籍)에서 학문을 떨쳐 내어서 성대(盛代)에 우문(右文)의 정치를 빛낼 것입니다. 신(臣)은 변변하지 못한 뜻을 이기지 못하여, 황공(惶恐)하게도 돈수(頓首)하여 삼가 말씀드립니다.”
비답(批答)은 이러하였다.
“올린 전(箋)을 살펴 보고 직사(職事)를 사임(辭任)하겠다는 것을 갖추 알았다. 고전(古典)을 깊이 상고하면, 당우(唐虞) 삼대(三代)의 군신(君臣)은 도학(道學)을 밝혀 치도(治道)를 내지 아니함이 없었다. 후세(後世)의 사람으로서 도학(道學)을 밝히고자 하는 자는 육경(六經)을 두고서 무엇으로 하였겠는가? 내가 즉위하면서부터 명유(名儒)를 얻어 좌우에 두고 경학(經學)을 강론(講論)하여 치도(治道)의 근원을 끌어 내기를 생각하였다.
경(卿)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식도(識度)가 깊고 은미하고, 학식은 육경(六經)에 해박하여 자세하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전성(前聖)의 학문에 심오한 뜻을 밝혀내어 후진(後進)의 사표(師表)가 되고, 저술한 《천견록(淺見錄)》과 《입학도설(入學圖說)》은 더욱 배우는 자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명하여 재보(宰輔)가 되게 하여 강연(講筵)을 겸임하게 하고, 또 사관(史館)과 성균관(成均館)의 장(長)이 되게 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듣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학문을 논하는 의풍(懿風)은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에 합(合)함이 있고, 필삭(筆削)의 정미(精微)함은 《춘추(春秋)》에서 법(法)을 취하니, 아침 저녁을 당하여 훈계하는 말을 바쳐서 내 마음을 계옥(啓沃)하여 대도(大道)의 요강(要綱)을 듣도록 하는 것이 경의 직책인데, 어찌 갑자기 병으로 사임하려 하는가?
선유(先儒) 주희(朱熹)는 《서집전(書集傳)》을 짓고 이를 채침(蔡沈)에게 부탁하여 드디어 전서(全書)를 만들었다. 이제 한산(韓山) 이색(李穡)도 또한 《예경(禮經)》을 고정(考定)하여 이를 경에게 부탁하였는데, 그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주고 받는 법이 하나의 구절(句節)에라도 합치한다면 어찌 우연이겠는가? 또 《예서(禮書)》가 타다가 남은 것을 주워 모았으므로 문란하고 차서(次序)를 잃었으니, 진실로 고증하여 후세에 남겨주는 것이 마땅하다. 더군다나, 경의 문학(文學)으로 나를 도와 정치를 성취하는 여가에도 오히려 차례대로 편찬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사마광(司馬光)에게 명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하게 하여, 일대의 역사를 이루어 지금까지 흠모(欽慕)한다. 나도 경에게 또한 이같이 하니, 경은 그 모든 온축(蘊畜)한 바를 서술하고, 여기저기에서 고증하여 그 책을 완성하도록 하라. 이미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니, 또 내 뜻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이 어찌 오로지 당대(當代)에만 보탬이 되겠는가! 거의 장차 사문(斯文)을 불후(不朽)하도록 장수(長壽)하게 하리니, 도리어 위대하지 않겠는가! 아직 그 직위에 있으면서 나의 정치를 도우라. 청하는 바는 의당 윤허하지 않겠다.”
【원전】 1 집 31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출판-서책(書冊) / 사상-유학(儒學)
[주-D001] 좌주(座主) :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한 자가 그 시관(試官)을 일컫던 말. 평생 문화(門下)의 예(禮)를 갖추었음.
[주-D002] 《진씨집설(陳氏輯說)》 :
원(元)나라 진호(陳澔)가 찬한 《운장예기집설(雲莊禮記集說)》을 말하는데, 30권임. 이 책은 간편하고 체계적이어서, 명대(明代)에 과거(科擧)의 전용서로 사용되었으며, 청대(淸代)에 납라성덕(納喇性德)은 《진씨예기집설보정(陳氏禮記集說補正)》 38권을 저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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