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6. 09:39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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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일기 곤(東槎日記坤) / 해외기문(海外記聞)
해외기문(海外記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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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倭國)의 역사는 개벽천황(開闢天皇)에서 시작되었다 하나 황당하여 고증할 만한 것이 없다. 신무천황(神武天皇)부터 한 역내(域內)를 합하여 법도가 좀 갖춰졌으나, 그 뒤의 천황들이 임금답지 못해서 점점 미약해지니, 원뢰조(源賴朝)가 자칭 대장군(大將軍)이라 하고 그 나라 권리를 절취하였다. 수세(數世) 뒤에 혹 일어났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여 성쇠(盛衰)가 무상하더니, 평신현(平信玄)과 평신장(平信長)에 이르러 그들이 각각 수십 주(州)씩을 할거했으나 역시 통일을 못한 채 신장이 그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수길(秀吉)이 그를 토벌하여 죽이고 곧 그 지위를 차지하여 위세가 당당하게 되었는데, 대장군의 양자(養子)가 되기를 청했으나, 그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수길이 그 부하에게 묻기를, ‘옛 벼슬에 대장군보다 높은 것이 있느냐?’ 하니, 누가 대답하기를, ‘한(漢)의 곽광(霍光)이 대장군으로 있을 때 모든 일을 다 관백(關白 관계하여 자기의 의견을 사뢴다는 뜻)한 뒤에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수길이 곧 자칭 ‘관백’이라 하니 반열이 대장군의 위에 있는지라, 차차 병력(兵力)을 이용하여 여러 주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원가강(源家康)이 관동(關東)의 6주를 점거하여 지대가 험하고 병력이 강하므로 수길이 그를 공격하니, 마침내 가강이 실패하여 그 늙은 어미를 볼모로 삼고서 화친을 청하니 처음으로 와서 항복하였다. 수길이 장차 죽으려 할 때, 그 아들을 휘원(輝元)ㆍ가강(家康)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는데, 누가 휘원에게 말하기를, ‘두 영웅이 양립(兩立)할 수 없으니 한번 싸워서 해결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였다. 그때 휘원이 가강보다 몇 배나 강대한지라, 이미 싸움을 시작했는데 가강이 휘원의 용장(勇將) 이금오(李金吾)를 유인, 그의 내응(內應)을 얻어 곧 휘원을 사로잡아 산서(山西)에 옮기고 두어 주(州)의 세금으로 살게 하였다. 그리고 수길의 아들을 추격하니 그는 달아나 남해(南海)에 빠져 죽었다.
이로부터 원씨(源氏)가 대대로 관백이 되어 군사를 정돈하고 백성을 휴식시키는 한편, 자못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66주(州)의 태수들 가족을 다 강호(江戶)의 제 3성내(城內)에 두고 태수는 한 해 걸러 한번씩 와서 내조(來朝)하되, 그 주의 사무는 대관(代官)에게 맡기고 몇 달을 머물다가 돌아가게 하니 안팎이 서로 견제하여 감히 불평을 갖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촌려(村閭)의 곁에 극문(戟門)을 두었는데, 대부분 돌을 깎아 만들고 그 위에 법령을 새겨 두고는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는데, 굳기가 금석(金石) 같아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한다. 우리 사행(使行)이 왕래할 때도 기와 창을 가진 전도(前導)들이 질서가 정연하여 대열을 잃지 않고, 길가에서 구경하는 남녀가 수만 명이 넘는데도 다 숙연하여 시끄럽지 않았다. 또 바다를 지나다가 혹 어두운 밤중에 심한 풍우(風雨)를 만나 온 바다가 뒤흔들릴 때에는 암초 위에 곧 비선(飛船)으로 쇠닻[鐵碇]을 많이 내리고 등불을 밝혀 기다리므로 부딪쳐 깨질 걱정을 면했으니, 역시 그 기율(紀律)의 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태수(太守)는 다 세습(世襲)이므로 혹 어린 사람도 있어서 나아가고 물러가거나 절하고 일어날 때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그 직책을 수행하기 어려운 자가 있으나, 그의 봉행(奉行)들이 낮이나 밤이나 게을리하지 않고 공사(公事) 계획하는 것을 자기 일처럼 하므로 그들은 이렇게 안전한 것이다.
대개 왜인(倭人)은 재력(材力)이 박약하여 우리나라의 최하인 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일찍이 우리나라에 와서 날뛰었던 것은 한갓 칼이나 포(砲)에 장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법령이 엄격하고 혹독하여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에 뛰어드는 것도 사양하지 않기 때문이었으니, 우리나라의 훈련되지 않은 군사로써 대적할 수 없는 것이 뻔한 일이라 하겠다.
그 마을 집들은, 집과 집이 한데 붙어 길 좌우에 연속된 것이 혹 수십 리씩 뻗쳐 있는데, 기와집은 거의 없고 대개는 삼(杉)나무 판자를 깎아 덮었다. 그런데 그 얇은 잎과 같은 것을 한 자[尺]쯤 포개 쌓았기 때문에 혹 화재가 나면 거의 다 연소(延燒)되어 버린다. 또 성중에는 땅이 좁아서 유사시에 사람들이 피할 곳이 없으므로, 적이 만약 화공(火攻)을 한다면 막을 길이 없으니 너무도 심원(深遠)한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 나라는 예부터 외부의 침략을 받는 일이 없었는데, 백제(百濟)가 한때 수군으로 습격하여 적간관(赤間關)에까지 들어갔더니, 왜인들이 흰말을 잡아 맹약하고 화친을 맺었다. 그래서 지금도 길가에 백마총(白馬塚)이 있지만, 그 나라 역사에는 휘(諱)하여 쓰지 않았다. 북륙도(北陸道)의 바다 건너편에 하이국(蝦夷國)이 있어 이따금 와서 침범한다 하는데, 우리 동래부(東萊府) 사람이 일찍이 하이국에 표류해 갔더니, 그 나라 사람들은 헝클어진 머리가 이마를 덮고 수염 길이가 두어 자[尺]나 되며, 오곡(五穀)을 먹지 않고 다만 개구리ㆍ물고기 따위를 잡아서 건조시켜 저장했다가 고래고기 기름을 발라 구워서 먹을 뿐이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는 놀라고 겁내어 피해 달아났다 한다.
왜인들도 항상 그들을 겁내어 조선에 대해 그 종족을 섬멸해 주기를 청하니,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을 매우 두려워한다고 한다. 그 땅에서는 금은이 많이 산출되는데, 금광(金壙)을 탐색하는 왜인들이 그 동래부 사람을 보고서 백기주(伯耆州)를 거쳐 나룻배로 장문주(長門州)에 보내 주었으므로 돌아왔다고 한다.
왜인으로서 부산관[釜館]에 상주하는 자가 대략 1천여 명인데, 우리나라 서적 중에 야사(野史)ㆍ지도[輿圖]ㆍ문집 등을 죄다 구입해 가면서도 정작 자기 나라 사적은 전연 모르고 있으니, 실로 개탄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일찍이 나는 사신을 받들고 그 나라에 갔을 때 비싼 값으로 그들의 역사 서적을 가만히 사 보고 그 흥망의 사적을 대개 알 수 있었다. 수백 년 전에는 국내가 분열되고 전쟁이 잇따라서 서로가 잡아먹으려 했고, 우리나라 또는 중국의 절강(浙江) 등지까지 그들의 침략으로 괴로워하였다. 급기야 수길(秀吉)이 득세하여서는 온 국력을 기울여 침입하니, 우리나라야 물론 피폐했거니와 그 나라도 텅 비어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을 정도이었다. 수길이 이미 망하자, 왜인들도 그것을 지극한 훈계로 삼아 그 뿌리박힌 독한 풍속을 차차 변화시켜 지금은 수길을 꾸짖어 풍적(豐賊)이라 부르며, 군사 행동을 늦추는 반면 점차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항(閭巷) 사이에 힘써 공부하는 선비들이 매우 많으니, 이것도 운수[氣數]가 그렇게 되게 한 것이라 할까?
바닷길로 상관(上關)을 지나다가 뒤에 우연히 왜선(倭船)의 기(旗)의 빛깔이 좀 다른 것을 보고 물어보니, 바로 아난타(阿難陀)의 상객(商客)들이었다. 그 배가 매우 커서 장기도(長崎島)를 통과하려면, 얕은 물에 좌초되어 들어올 수가 없으므로 왜선을 사서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훤하며, 머리털이 앞으로는 이마를 덮고 뒤로는 옷깃까지 내려온다. 전립(氊笠 군뢰복다기) 비슷한 것을 썼는데, 왼쪽ㆍ오른쪽ㆍ앞쪽 세 군데를 말아 올려 위로 붙였다. 옷은 앞깃이 없이 동정으로부터 밑으로 합쳐 묶는 데가 수십 군데이고, 바지가 너무 좁아서 다리를 펴기는 하되 굽힐 수가 없다 한다.
그 기교(技巧)가 남보다 뛰어나서, 배 양쪽에 맷돌[石磨]을 시설해 두고 혹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기관[機]으로 물을 격동하면 비록 만 곡(斛)을 실은 무거운 배라도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다. 그리고 도르래를 돛대의 각 폭(幅)에 달아서 당기면 비록 1백 폭이라도 빠짐없이 모두 한데로 몰리는데, 그 배가 장기(長崎)에 와서 닻을 내리고 포성(砲聲)을 울리면,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집 판자 선반 위에 얹어 둔 그릇이 흔들리어 혹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나라는 서역(西域)의 가장 먼 곳에 있어 몇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중간에 섬이 없어 항상 먹을 물이 모자랄 것을 염려하여 매양 여름 장마철에 나온다 한다. 무릇 왜인들의 값진 비단과 기이한 물자가 그 나라에서 많이 수입되기 때문에 해마다 몇 척의 배가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몸이 건장하고 잘 싸우는 편이어서 바닷길에서 왜선(倭船)을 만나기만 하면, 비록 사람 수가 상대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겁탈을 당하기 마련이라, 이 때문에 항상 배 한 척을 볼모로 삼은 뒤에 보내고 그들 선원도 매양 교체하여 돌아간다고 한다.
또 그들 풍속은 여자일 경우 반드시 10세 전에 시집을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울병(鬱病)이 생겨 죽게 되며, 남녀가 가장 오래 사는 자가 42세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남만(南蠻) 사람 미소종문(彌蘇宗門)이란 자가 맨 처음 장사치로서 장기(長崎)에 왔는데, 그가 요술을 잘하여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네가 죽은 친속(親屬)을 보고 싶으냐?’고 하였다. 사람들이 만약 그렇게 해주기를 애걸하면, 과연 잠깐 사이에 죽은 사람이 나타나 드디어 서로가 붙들고 울면서 사생(死生)의 정(情)을 펴기를 생전과 같이 한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가게 하면 다시 보이지 않는지라,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겨 원근을 막론하고 너나 없이 따르는데, 혹 믿지 않고 가서 욕을 보이려 하면, 종문이 문득 먼저 알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나의 도를 믿지 않는다면 빨리 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일어나려 하면 몸이 땅에 붙어 갈 수가 없어서, 비로소 놀라고 겁내어 잘못을 사과하는데, 등(藤) 채찍에다 침(鍼)을 붙여 매질하여 온 몸에 피가 마구 흘러도 꼼짝 못한 채 도리어 서로가 속이고 유인하여, 그를 높이 섬기는 자가 왜국 내에 많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무(東武)의 봉행(奉行)을 통하여 반란을 기도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글을 얻어 관백(關白)에게 고함으로써, 곧 군사를 풀어 체포하게 하니, 그들 무리 보기(步騎) 수천 명이 바다를 평지처럼 건너가는데 그 가는 방향을 알 수가 없어 온 나라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다. 그 후 그 얼굴을 모사하여 네거리에 던져두니 그를 항상 섬기던 자들이 혹 통곡하다가 칼에 찔려 죽기도 하였다. 지금도 도시와 촌락에 게시판[制札]을 달고 상을 주어 가면서 그 도당을 체포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에도 서한을 보내어 바다에서 선박을 이용해 건너가는 수상한 자가 있거든 부디 꼭 죽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왕년에 남만(南蠻)에서 표류한 수십 인을 체포하여 일본에 보냈더니 일본으로부터 후한 사례가 있었다. 그 뒤 장기(長崎)에서는 종문(宗門)의 동상(銅像)을 만들어 두고 여러 나라에서 표류해 온 자들로 하여금 그 동상을 발로 차게 하여 시험해 본 결과 난색(難色)이 있으면 꼭 죽여 버렸다 한다. 누가 말하기를, 종문이 맨 처음 왔을 때 조그만 금불(金佛)을 왜인들에게 나눠 주어 그들로 하여금 숭봉하게 하고 화복(禍福)으로 유인한 다음, 그 대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국군과 크게 싸우다가 실패하여 바다 위를 도보로 달아났는데, 40년 뒤에 다시 수만 명을 인솔해 와서 풍전주(豐前州)를 습격하다가 불리하자 도망갔다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서양사람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란 자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와서 천주교(天主敎)를 사람들에게 보급하니, 그 법은 대개 불교와 비슷하여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이 있어 일본에서는 법을 만들어 금지했다. 그 뒤 서양 사람이 다시 온 것을 문득 죽이기까지 했는데, 근년에 또 살마주(薩摩州)에 와서 머무는 자가, 그 배는 돌려보내고 홀로 섬 사이에 남아 있었다.
가서 물어보니 왜말로 대답하기를, ‘우리 천주교는 모든 나라가 다 숭배하는데 유독 중국과 당신네 나라에서만 시행되지 않으므로, 우리 국왕께서 한 사람은 중국에 보내고 나 하나를 이 땅에 보내어 선교하게 하셨다. 당신네 나라에서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도(道)는 행할 수 있으리니 여기에서 죽을지언정 피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말이 드디어 강호(江戶)에 들리니, 국왕이 원여(源璵)를 시켜 시험하게 했더니, 보고나서는 이상히 여겨 강호에다 가두어두고 현재까지 옷과 밥을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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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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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도 악부(樂府) 옛 노래가 몇 종류 있지만 그 중에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것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 성호 선생의 악부가 나오자 비로소 집대성이 되어, 그 동안 분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밝힘으로써 사가(史家)들이 빠뜨린 것을 많이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기(成己) 이하 몇 조항이 누락되었기에 감히 선생의 작품을 흉내내어 지으니, 가사는 비록 거칠고 졸렬하나 실려 있는 사실은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이 작품을 선생께 보여 드렸더니 그냥 물리쳐 버리지 않으셨기에 후일의 참고를 위하여 이렇게 기록해 둔다.
성기가(成己歌) 한서(漢書)에 의하면, 무제(武帝)가 조선을 쳐 조선은 이미 항복을 하였으나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지 않았었는데, 우거(右渠)의 신하 성기(成己)가 다시 반기를 들고 역공해 오므로 순체(荀彘)가 그 곳 백성들을 달래어 성기를 죽였기 때문에 조선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에다 그대로 써 놓았다.
전쟁 즐기는 한 무제가 먼 나라를 치려 하자 / 漢皇黷武思遠略
우리 나라엔 살기가 하늘 닿게 등등했다네 / 箕東殺氣彌天黑
누선은 돛을 달고 요좌로 내려오고 / 樓船掛帆下遼海
좌장군은 말을 몰아 갈석산을 지났는데 / 左將躍馬由碣石
고을들이 다 찢기고 서울이 무너져도 / 諸縣幅裂王都傾
여기저기 보이는 건 매국노뿐이었다네 / 但見紛紛賣國賊
나라 책임 짊어진 대신이 하나 있어 / 安危却有大臣在
피눈물을 흘리면서 외로운 성 지키다가 / 沫血飮泣守孤城
다급한 형세가 위기일발 되었으니 / 孤城勢急危如髮
홍모 같은 목숨 하나 아낄 것이 뭐라던가 / 到此一死鴻毛輕
대동강수 질펀히 흐르고 / 浿水流洋洋
왕검성 우뚝 서 있는 곳 / 王儉高嶔嶔
성기의 그 명성 지금까지 전해 오는데 / 成己大名留至今
모반했다 죽였다 그 무슨 당찮은 말 / 書反書誅是何義
붓을 잡은 사신이 서법을 그리 모르다니 / 史臣秉筆迷書法
옹산성장가(甕山城將歌) 신라 태종왕(太宗王) 8년에 백제(百濟)의 남은 적들이 옹산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 항복하지 않아 김유신(金庾信)이 가서 포위를 하고 백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장 항복만 하면 앞으로의 부귀를 약속하겠다.” 하였으나, 성장(城將)이 대답하기를, “성은 비록 작지만 병력도 먹을 것도 다 충분하고 군대들도 다 정의롭고 용감하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은 않겠다.” 하니, 유신이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 성장을 잡아 죽였다.
물장군만큼이나 작은 옹산성 / 甕山城小如甕
장군의 기상은 어찌 그리 드높았나 / 將軍之氣何崢嶸
성난 눈은 번쩍이고 수염은 빳빳했네 / 怒目煌煌如磔
나당의 연합군도 그 안중엔 이미 없어 / 眠底已無唐羅兵
남아의 의기 앞에 부귀가 다 뭐라더냐 / 男兒義重富貴輕
값진 길을 선택할 이 시기가 아니더냐 / 熊魚取舍此其時
종묘 사직 다 망하고 임금도 무릎 꿇고 / 宗社亡矣國君降
머리 들고 살아간들 장래 할 일 뭐라던가 / 擧頭天地將何爲
망할 나라 부흥시킬 기회 반드시 있나니 / 興衰撥亂會有期
제 나라 온전히 수복한 건 바로 즉묵이라네 / 恢復全齊惟卽墨
진지에서 맹호 같은 호령 한 번 떨어지자 / 臨陣一呼猛如虎
백천의 의용군들 목숨 걸고 싸웠다네 / 百千義勇爭死敵
아 저 태양도 장군의 진심을 몰랐던가 / 嗚呼白日不照將軍之衷誠
억울하게 죽은 피가 지금도 푸르다네 / 至今冤血流爲碧
하늘에 있는 영혼이야 외롭지 않겠지요 / 英魂在天應不孤
계백ㆍ주근 두 장군과 서로 짝이 될 테니까 / 階伯周勤相爲伍
옹산성은 작아 물장군 같아도 / 甕山城小如甕
장군의 그 이름은 천고에 빛나리 / 將軍大名垂千古
천성행(泉城行) 신라 문무왕(文武王) 15년에 당(唐) 나라 설인귀(薛仁貴)가 천성(泉城)을 공격해 왔는데, 이 때 장군 문훈(文訓)이 맞아 싸워 적군 1천 4백 명의 수급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탈취했으며 인귀가 패배해 도망가자 전마(戰馬)도 1천 필이나 얻었다. 그리고 또 이근행(李謹行)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쳐부수고 전마 3만 3백 80필을 얻었으며, 병장기(兵仗器)도 그만큼 얻었다.
설인귀는 당 나라 명장으로서 / 薛仁貴唐名將
한 번 싸워 요동을 탈취하고 / 一戰取遼東
두 번 싸워 평양을 공격하여 / 再戰擊平壤
전승공취 그 기세를 당할 자가 없었으니 / 戰勝攻取勢莫當
요하 동쪽 어디에도 온전한 진이 없었는데 / 遼河以東無堅壘
어찌하여 천성 싸움에서는 쥐새끼처럼 도망쳤던가 / 如何泉城一戰走如鼠
문훈의 재주는 비길 데 없었다네 / 文訓之才無與比
문훈의 재주가 비길 데 없었을 뿐만 아니라 / 不特文訓之才無與比
신라는 그 때 운이 일어나는 시기여서 / 此時新羅應運起
임금 신하 다 어질어 이길 수 없었다네 / 主賢臣良無可乘
당 고종은 무슨 일로 군대를 일으켰던가 / 唐皇忿兵胡乃興
예로부터 틈이 있어야 나라가 망하는 법 / 自古亡國必有釁
그래야만 적들이 제 재능을 발휘하지 / 然後敵人奮才能
호해가 실덕하자 항우가 용맹 떨쳤고 / 胡亥失德項籍勇
오왕 부차도 태황했기에 범려의 슬기에 넘어갔지 / 夫差怠荒范蠡智
내 한 말이 노망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한 것 / 我言非耄信如此
아 후세 임금들도 그 점을 명심해야지 / 嗚呼後辟淪當念記
노사행(弩士行)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5년에 수(隋) 나라 왕이 와 정벌하자 왕이 겁이 나서 사신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빌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 때 어느 한 사람이 비밀리에 작은 활을 가슴에 품고, 표문[表]을 가지고 가는 사신의 뒤를 따라 수 나라 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수 나라 왕이 표문을 읽고 있을 때 활을 당겨 그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수제는 군대를 회군하려고 하면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왕으로서 친히 이 작은 나라를 정벌하다가 이렇게 불리한 꼴을 당했으니 만세를 두고 비웃음을 받을 일이다. 지금 저 사람을 보니 그는 바로 형가(荊軻)ㆍ섭정(聶政) 같은 사람이다.” 하였다 한다.
죄악이 천지에 찬 수 양제 양광이 / 楊廣罪惡盈天地
두 번이나 병력 일으켜 요동 갈석 쳐들어왔는데 / 再興驕兵來遼碣
원래부터 크고 작은 형세 상대가 되질 않아 / 由來大小勢不敵
고구려 군신 모두가 놀라 혀를 내둘렀네 / 句麗君臣皆吐舌
압록강은 그다지 험준한 요새가 못 되어 / 鴨江不能恃其險
을지문덕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 / 乙支無所出其奇
표문 들고 신하노릇 자청할 생각으로 / 奉表稱臣事已急
사신들이 밤낮없이 서북으로 달렸는데 / 使盖日夜西北馳
그 속에 나타난 대단한 남자 하나 / 箇中閃出大男子
소매 속에 숨겨 온 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 袖裏神弩千石强
진시황이 독항도를 막 펴들고 있을 때 / 秦皇方啓督亢圖
단상에선 조말의 비수가 번뜩였다네 / 曺沫壇上匕首張
토끼처럼 쥐처럼 빠져나간 것만도 다행이지 / 兎脫鼠竄亦幸耳
독부 그놈 갑옷 싸들고 허겁지겁 도망갔다네 / 獨夫捲甲走蒼黃
우리 역사엔 기록이 없고 중국에선 숨겼기에 / 東史斷爛中史諱
천년 동안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네 / 此事千秋視渺茫
박랑사에서 진시황 철퇴로 친 일 그대 보지 않았나 / 君不見博浪椎秦客
예로부터 의인협객들 동방에서 나왔다네 / 自古義俠出東方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주-D001] 독항도 :
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기름진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 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러 가면서 우선 진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항의 지도를 그에게 바쳤음. 《史記 刺客列傳》
[주-D002] 조말 :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사람. 장공(莊公)이 제(齊)와 싸워 지고는 가(柯)에서 맹약을 할 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제 환공(齊桓公)을 위협하면서 의분에 북받치는 말을 하자 환공은 그 동안 노 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그 자리에서 다 되돌려 주었다고 함. 《史記 刺客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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