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舜)임금도 역시 동이(東夷) 사람인데

2022. 9. 5. 21:24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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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집 8권 / 연기(燕記)

희 원외(希員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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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세관이 묵고 있는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세관이 문밖에서 있다가 나를 한참 동안 자세히 보더니, 손을 들어 불렀다. 내가 그 앞에 나아가 서로 읍(揖)하고 그의 거주(居住)와 직명(職名)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만주 사람인데 집은 서울이고, 현재 임무는 심양,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인 희(希).”

라고 하며,

“국왕은 무슨 성(姓)이냐?”

고 물었다. 내가 사실대로 말했더니, 희가 말하기를,

“먼저는 김씨와 왕씨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이씨이오?”

하였다. 내가,

“신라 때는 김씨이고, 고려 때는 왕씨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이씨이요.”

하였더니, 희가,

“그렇다면 고려가 바뀌어 조선이 되었소?”

하였다. 내가,

“그렇다.”

했더니, 희가,

“어떻게 해서 세상이 바뀌었소?”

하였다. 내가,

“당신은 유독 탕ㆍ무(湯武)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소?”

하였더니, 희가 크게 웃으며,

전대(專對)의 재능을 가지셨소이다.”

하고는,

“본조(本朝)가 전 왕조인 명 나라를 위해 큰 도적을 멸망시키매 하늘이 허여하고 사람이 종속하였으니, 이것은 요ㆍ순(堯舜)의 선양(禪讓)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인데, 귀국에서도 역시 이것을 알고 있소?”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순(舜)임금도 역시 동이(東夷) 사람인데, 단 요(堯)임금의 천하가 순임금의 천하로 바뀔 때에 오늘날처럼 옷 제도를 바꿨는지는 아직 들어 보지 못하였소.”

하였더니, 희가 웃으며,

“세상은 예와 지금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의의가 같지 않은 것이니, 의관(衣冠)이 어찌 일정한 제도가 있겠소.”

하기로, 나는 그저 아무 반박도 않고 돌아왔었다.

그 뒤 며칠 지나, 내가 또 그 〈희 원외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희가 자기 집 온돌로 맞아들였다. 좌정하자, 화로에 향을 피우고 차와 담배를 권하며 우리 나라의 과거(科擧) 제도와 풍속ㆍ인심을 묻기에, 내가 대략 대답해 주었는데, 부인들이 〈남편 죽은 뒤〉 다시 시집가지 않는다는 것과 누구나 삼년상(三年喪)을 거행한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희가 손을 들어 칭찬하며,

“예의가 있는 나라로군요.”

하였다. 또, 우리 나라 서화(書畫)의 경향을 묻고는,

“귀국에도 또한 동기창(董其昌)의 서화가 있습니까?”

하였다. 내가,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매우 진귀하게 여기오. 그런데 다만 북경의 시장에서 사온 것 중엔 진본이 하나도 없습디다.”

하였더니, 희가,

“중국에는 가짜가 몹시 많소이다. 진본은 은 백여 냥 아니고는 살 수 없소.”

하였다. 내가 원외(員外)의 1년 봉급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희가 말하기를,

“은 3백 80냥과 쌀 1백 50석이고, 공비(公費)가 백금(百金)은 된다.”

고 하였다.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데 박씨(博氏)인 장가(張哥)가 들어와 온돌 아래 의자에 앉았다. 희가 나에게 묻기를,

“듣건대, 전에는 책문(柵門)에서의 조선 물건 교역량(交易量)을, 은 2만 냥어치로 정했었다는데, 지금 반으로 줄어든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나는 혹시 변방 〈실정에 관한 비밀〉을 함부로 누설시키게 될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물건 값이 점점 오른 까닭에 값은 전대로 2만 냥이면서도 물건이 적어진 것이오.”

하고, 거짓말을 하였더니, 희가 장에게 묻자, 장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그가 거짓말 하는 것이오, 연전에 이미 공문으로 합의하여 정한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부끄러워 사과하기를,

“내가 그 일을 직접 맡은 것이 아니어서 이런 착오를 한 것이오.”

하였더니, 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가 나더러 만주말을 할 줄 아느냐고 하고는 바로 장관 말을 주고받는데 모두 만주말을 썼다. 아마도 문시(門市)에서의 세금 징수하는 일과 나의 행색에 관해서 말하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잠깐 뒤에 작별하고 나오는데, 희는 온돌 아래서 읍하며 송별하고, 장이 대신 문밖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D001] 탕ㆍ무(湯武) :

은(殷)의 탕왕(湯王)과 주(周)의 무왕(武王)을 말한 것인데, 《맹자》 양혜왕편(梁惠王篇) 하(下)에 보이듯이, 탕 임금은 하(夏)의 걸(桀)을 추방[湯放桀]하고, 무왕은 은(殷)의 주(紂)를 토벌[武王伐紂]하여, 추방과 정벌을 통한 성(姓)이 바뀐 혁명의 사례(事例)를 말하는 것임.

[-D002] 전대(專對) :

사신으로 외국에 가서, 일일이 본국 조정의 훈령(訓令)을 받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말함. 용어의 출처는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