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靖康)의 일에 이르러서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汴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2022. 12. 21. 08:40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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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 정축(1637) 1월 18일(무오)

15-01-18[01] 예조 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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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군부(君父)를 모시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토록 위급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에 누가 다른 의논을 내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바로 국가의 막중한 조치인데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 및 2품 이상을 불러 분명하게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마음은 성실성이 부족하여 속 마음과 말이 다르다.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니, 이 점이 염려스럽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설령 다른 의논이 있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무제(晋武帝)나 송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 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金)나라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지만, 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汴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김상헌의 말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며 말하면서 눈물이 줄을 이었으므로 입시한 제신들로서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상의 곁에 있으면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이 밑에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제신이 간쟁하여 지웠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건대 거듭 유시해 주셨으니, 간절히 책망하신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서 추상과 같이 엄한 말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이 위덕(威德)을 멀리 가해 주시니 여러 번국(藩國)이 사례해야 마땅하고, 천명과 인심이 돌아갔으니 크나큰 명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文書)와 예절(禮節)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이 저절로 있으니,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진정한 소원이 이미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는 변명도 궁하게 된 것이고 경계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원전】 34 집 666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역사-고사(故事)

[-D001] 이성(二聖) : 

인조와 소현세자를 가리킴.

[-D002] 정강(靖康)  :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 2년(1127)에 금(金)나라 태종(太宗)에게 변경(汴京)이 함락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를 비롯해서 많은 황족과 신하가 사로잡혀 간 변란을 말함. 《송사(宋史)》 권23(卷二十三) 본기(本紀) 제20(第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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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제2권

오국성〔五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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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통지(淸一統志)》 〈영고탑 고적(寧古塔古蹟)〉의 기록이다.

“오국두성(五國頭城)은 성의 동북쪽에 있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여진은 동북쪽으로 오국과 이웃해 있고 오국은 동쪽으로 큰 바다와 접해 있다. 이곳에서 좋은 매가 나는데 해동에서 나는 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부른다. 요나라 사람들이 이 매를 매우 좋아해서 해마다 여진에 요구하였는데, 여진은 오국성까지 가서 전쟁을 하고서야 얻어 오므로 그 괴로움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하였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천회 8년(1130) 송나라의  황제가 한주(韓州)에서 오국성으로 갔다. 성은 금나라 도읍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이곳부터 동쪽으로는 나누어져서 오국이 되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옛 기록에 송나라 휘종이 여기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하였다.

《호종록(扈從錄)》에는 ‘영고탑에서 동쪽으로 600리 가면 강돌리갈상(姜突哩噶尙)이라는 곳이 있는데 송화강과 흑룡강이 이곳에서 합류한다. 큰 토성이 있는데 혹 오국성이라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청일통지》가 인용한 책 가운데 《거란국지》의 설이 옳다. 후세 사람들은 금나라가 도읍한 곳이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인 줄만 알고 마침내 오국성을 그 동북쪽 1000리 혹은 600리 거리에 있는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 등으로 짐작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란이 매를 요구해 왔을 때 금나라 경조 오고내와 목종 영가는 바야흐로 갈라전(曷懶甸)에 있으면서 오국의 포섭(蒲聶), 몰연(沒撚) 등의 부족과 힘들게 싸워 매를 잡아오는 길을 열었다.

갈라전이란 《고려사》 〈지리지〉와 〈윤관열전(尹瓘列傳)〉 및 《금세통(金世統)》을 참고하여 보건대 우리나라 함흥, 단천, 길주 등의 지역이 틀림없으니, 오국성이 갈라전의 동북쪽에 있어야 옳지 상경의 동북쪽에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조선의 회령부는 바로 함흥, 단천, 길주 등지의 동북쪽에 있다. 그리고 회령부의 보을하진(甫乙下鎭) 서쪽에 큰 무덤이 있는데 예로부터 황제총(皇帝冢)이라고 칭하고, 겹겹이 둘러싼 작은 무덤들을 시신총(侍臣冢)이라고 칭하였다. 지금까지도 밭을 경작하는 이가 가끔 숭녕(崇寧) 시대 동전을 발견하기도 하니 이곳이 어쩌면 휘종을 장사 지낸 곳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나라 회령부가 바로 예전의 오국성이다.

금나라 천회 8(1130) 7월에 혼덕공과 중혼후를 골리개로(鶻里改路) 옮겼고 금나라 희종 즉위년(1135) 4월 병인에 혼덕공 조길(趙佶 휘종)이 죽었는데, 골리개는 바로 호리개(胡里改)이다. 금나라 지역이던 호리개로에 우리 조선이 국초에 만호를 두었으니, 아마도 본디 오국 지역인데 금나라가 초기에 노(路)를 설치하고 호리개라 불렀을 것이다. 송나라 휘종이 옮겨지고 졸하고 장사 지내진 곳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그렇다면 조선의 회령부가 또 바로 호리개로이다.

 

[-D001] 영고탑(寧古塔) :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성(寧安縣城)의 청나라 때 지명이다.

[-D002] 송나라의  황제 :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부자를 말한다. 1126년 정강(靖康)의 변으로 금나라에 붙잡혀서 오국성에 구금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D003] 경조 …… 영가 :

경조 오고내(景祖烏古迺)는 완안 오고내(完顏烏古迺, 1021~1074), 목종 영가(穆宗盈歌)는 완안 영가(完顏盈歌, 1053~1074)로 금나라 건국 전 여진을 통치했던 인물들이며 사후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각각 금 태조의 조부, 숙부이다.

[-D004] 금나라 …… 옮겼고 :

본서에는 천회 8년으로 되어 있으나 《동사강목》, 《고려사절요》 등에는 천회 6년(1128)으로 되어 있다. 혼덕공(昏德公)은 사로잡힌 송나라 휘종을 강봉한 작위이고, 중혼후(重昏侯)는 흠종을 강봉한 작위이다.

[-D005] 호리개로(胡里改路) :

《해동역사》 〈지리고10〉 고려 조에 따르면 호리개로는 영고탑 동쪽 지역으로 남쪽 경계가 회령에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