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천축국(天竺國)의 승려를 맞이하고국사(國師)에 봉하는 것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2022. 12. 26. 21:19백두산

 

 

홍재전서 19 / 제문(祭文) 1

남교(南郊)에서 대신 드리게 하는 기우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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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 일어나고 울리고 적심은 / 噓發鼓潤
공은 같고 베풂이 다른 것이니 / 同功異施
가뭄으로 세상이 메마른 지 / 暵之乾矣
여러 달이 지났도다 / 閱月經時
구름이 잠시 뭉게뭉게 모이더니 / 油然乍屯
서늘한 바람이 문득 불었고 / 凄其旋隨
이미 은은한 천둥소리 들렸으나 / 已聞殷殷
비가 성대하게 내림은 보이지 않네 / 未見祁祁
내가 나의 허물을 살펴보니 / 予詧予諐
정사에 실로 허물이 많았도다 / 政實多疵
신이여, 살펴 용서하시고 / 神其監恕
한줄기 세찬 비 내리길 더디 마소서 / 降霈不遲

이상은 바람, 구름, 천둥, 비에 고한 것임.

 

신의 영기가 쌓여서 / 維融維結
그 영험이 기도에 드러나니 / 靈著祈祓
무릇 하소연할 곳이 있으면 / 凡有控款
모두들 바라보고 제사를 드리네 / 羣望咸秩
내가 가뭄의 재앙을 만남으로부터 / 自予遘旱
신의 도움 받기를 바라노니 / 願藉冥騭
모맥이 없고 벼가 없어서 / 無麥無禾
백성의 목숨이 장차 다할 지경일세 / 民命將汔
생각건대 신은 매우 인자하신데 / 惟神孔仁
어찌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나이까 / 寧莫我恤
이 향기로운 제사를 흠향하시고 / 歆此馨香
빨리 구름이 일게 하소서 / 亟騰薈蔚

이상은 국내 산천에 고한 것임.

 

성황(城隍)의 신이 영험을 길러 / 神維毓靈
우리 돈황을 지키니 / 鎭我墩隍
상서를 발하고 재앙을 막아 / 發禎捍沴
길이 종묘의 제사를 보호하였네 / 永護宗祊
어찌 오늘에 인색하여 / 胡嗇于今
이 긴 가뭄을 이루었던가 / 致玆恒暘
아, 저 백성들이야 무슨 허물인가 / 咨彼何辜
오직 내가 선하지 못한 탓이었네 / 職予不臧
미리 재계하고 밝은 제사를 / 夙齋明祀
원보를 보내 대신 드리게 하니 / 元輔替將
바라건대 묵묵히 보우함을 드리워 / 幸垂幽祐
풍년의 은혜를 내려 주소서 / 錫以穰穰

이상은 성황(城隍)에 고한 것임.

 

동국이상국전집 18 / 고율시(古律詩)

왕명(王命) 응하여 《대장경(大藏經) 소재도량(消災道場) 음찬(音讚)하는 (정언(正言)에서 삼품관(三品官)에 이르기까지의 지은 것을 모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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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도량 음찬시(大藏經道場音讚詩)

줄줄이 이은 코끼리는 다 천축(天竺)의 사신인데 / 象步繩繩盡竺卿
임금이 봉지에 내려 친히 맞이하네 / 赭袍親降鳳墀迎
공왕의 현묘한 법문 금룡이 아뢰고 / 空王藏密金龍啓
노승의 높은 노랫소리 석녀가 화답하네 / 老衲歌高石女賡
물에 비친 달은 일천 부처의 지혜요 / 照水月爲千佛鑒
하늘에 가득찬 안개는 임금의 정성일세 / 滿天霞是一人誠
알괘라 태산 같은 국운은 움직일 수 없나니 / 須知國祚山難轉
공덕을 의지하여 태평성대 이룩하리라 / 已倚熏功辦太平 

 

고전번역서 > 임하필기 >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 > 최종정보

임하필기 13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금강산(金剛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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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李穀)이 말하기를, “이 산은 그 이름이 천하에 유명하다. 심지어 저 먼 곳인 천축(天竺 인도(印度)) 사람들까지도 가끔 찾아와서 이를 구경하는데 대개 하는 말이 본 것이 들은 것만 못하다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 중에 서촉(西蜀)의 아미산(蛾眉山)이나 남월(南越 중국의 광동 및 광서 지방)의 보타산(普陀山)을 찾아가 본 사람들 또한 다들 듣던 것만 못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가 본 이 산으로 말하면 실로 듣던 것을 훨씬 능가하니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화사(畫師)라 하더라도 능히 이를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금강산은 우리나라의 동해 바다 기슭에 있는데 뛰어난 경관(景觀)이 천하에 으뜸이다.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는데,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들 이 산을 한 번 찾아와서 구경하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심지어는 이 산을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놓고 거기에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까지 있다고 한다.”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말하기를, “세상에서 삼신산(三神山)이 우리나라에 있다고들 말하는데,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瀛洲)라고 하는바, 두보(杜甫)의 ‘방장이 삼한 밖이로구나[方丈三韓外]’ 하는 시구절을 미루어 보아도 이를 증거할 수 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본래 삼신산의 전설은 서복(徐福)에게서 나온 것이니, 그가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삼신산은 응당 동해 바다의 동쪽에 있어야 할 것인데, 노두(老杜 두보(杜甫))가 그의 시에서 ‘방장이 삼한 땅에 있다[方丈在三韓]’ 하지 않고 ‘방장이 삼한 밖이로구나’ 하였으니 그 말이 응당 믿을 만하다 하겠다.

[-D001] 서복(徐福) : 

서불(徐巿) 또는 서불(徐芾)로도 불리운다. 중국 진(秦)나라 때의 방사(方士)로 진시황(秦始皇)의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소원을 풀어 주기 위하여 영약(靈藥)을 찾아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백 인을 데리고 동해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삼신산으로 떠났다고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그는 일본 땅에 이르러서 죽었다고 하는데, 일본의 기이신궁산(紀伊新宮山)에 지금도 서복묘(徐福墓)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그래서 일본을 서복도(徐福島)라고도 한다.《史記 卷6 秦始皇本紀

 

고전번역서 > 무명자집 > 무명자집 시고 제6책 >  > 최종정보

무명자집 시고 6()

영동사 396〔其三百九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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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의 승려가 것이 무슨 도움 되기에 / 天竺僧來有甚裨
법가와 위의를 갖추어 몸소 맞이하였나 / 躬迎法駕備威儀
은나라의 거울 본래 하나라에 있음 알거니 / 殷鑑元知在夏世
고려의 계모 어이해 신라를 다시 답습했나 / 麗謨胡更襲羅爲

 

[-D001] 천축(天竺) …… 맞이하였나 : 

고려 태조는 12년(929) 6월에 천축국(天竺國) 삼장법사(三藏法師) 마후라(摩睺羅)가 오자 의례를 갖추어 맞이하였으며, 21년(938) 3월에는 서천축국(西天竺國)의 홍범대사(弘梵大師) 실리전일라(㗌哩囀日羅)가 오자 의장을 성대히 갖추고 맞이하였다. 《高麗史 卷1 太祖世家1 己丑12年, 卷2 太祖世家2 21年》

 

 고전번역서 > 무명자집 > 무명자집 문고 제13책 > 최종정보

고려가 통일하게 되자, 신라의 숭불(崇佛) 정책을 그대로 따라 왕이 직접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승려를 맞이하고국사(國師)에 봉하는 것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사찰은 우뚝이 솟아 즐비하게 이어졌고, 부처 공양에는 비용을 물 쓰듯 끝없이 하였으며, 전쟁으로 말하면 여진ㆍ거란과의 싸움에 온 나라가 피폐해졌고, 사신으로 말하면 요(遼)ㆍ송(宋)ㆍ금(金)ㆍ몽고(蒙古)와 두루 왕래하였다.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었으며,화주(和州)를 들어 달아난 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권신에 의해 폐위되더니, 나중에는 몽고의 제재를 받아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것도 모자라서 또 왕이 직접 몽고의 조정에 들어갔다.

몽고가 원(元)나라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자, 처음에는 세자에게 원나라 공주를 시집보냈는데, 나중에는 또 연이어 왕으로 하여금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을 봉하거나 불러들이고, 왕을 복위시키거나 유임시키고, 왕을 유배 보내거나 가두고, 왕을 폐위하거나 옹립하며, 군대를 징집하고 모으는 것을 모두 원나라의 명대로 하여 분주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인력과 물자가 끝도 없이 소비되었다.

여기에 또 홍건적(紅巾賊)이 대거 침입하고나하추(納哈出)가 거리낌 없이 노략질하였으며,제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호발도(胡拔都)가 침략하였다.

 

고려사절요 1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기축 12(929), 후당 천성 4년ㆍ거란 천현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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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3월에 대상(大相) 염상(廉相)을 보내어 안정진(安定鎭 평남 순안(順安))에 성을 쌓고 원윤(元尹) 언수고(彦守考)에게 이를 지키도록 하며, 또 영청현(永淸縣 평남 영유(永柔))에 성을 쌓았다.

○ 여름 4월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주(州)ㆍ진(鎭)을 순시하고 돌아왔다.

○ 6월에 원보(元甫) 장필(長弼)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

○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삼장법사(三藏法師) 마후라(摩睺羅)가 오니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그를 맞이하였다.

[주-D001] 삼장법사(三藏法師) : 불교 서적은 경장(經藏)ㆍ율장(律藏)ㆍ논장(論藏)의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것을 삼장(三藏)이라 한다. 삼장법사는 모든 불전(佛典)에 정통한 사람을 말한다

 

고려사절요 1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무술 21(938), 후진 천복 3년ㆍ거란 회동(會同)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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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3월에 서천축(西天竺)의 중이 오니, 왕이 양가(兩街)의 위의(威儀)와 법가(法駕)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동사강목 6 병신 고려 태조 19년부터, 을묘 고려 현종 6년까지 80년간

무술년 태조 21(후진 고조 천복 3, 거란 태종 회동(會同) 원년, 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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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이 천축(天竺)의 중을 친히 맞이하였다.

서천축(西天竺) 마갈타국(摩竭陁國)의 중 홍범대사(弘梵大師) 실리박일라(㗌哩嚩日羅)가 오자, 왕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안】 송백(宋白)의 《속통전(續通典)》에,
“서역(西域) 중 말라(襪囉)가 천복 4년(939)에 진(晉)에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 점의 일종)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禮遇)하였다. 그때 거란이 발해를 병탄한 지가 몇 년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것을 취하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도록 말해 달라.’ 하였다. 말라가 돌아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아니했다.”
하였으니, 여기에 말한 말라가 홍범이 아닌가 한다.

 

고전번역서 > 동국여지지 > 동국여지지 제2권 > 경기 > 최종정보사찰(寺刹)

회암사(檜巖寺) 천보산(天寶山)에 있다. 고려 때에 서역(西域)의 승 지공(指空)이 이곳에 이르러 말하기를 “산수의 형세가 완연히 천축(天竺)의 아란타(阿蘭陀)의 절과 같다.”라고 하였다. 후승(後僧)인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지만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문도 각전(覺田) 등이 공사를 마쳤다. 건물이 260여 칸으로 웅장함이 동방에서 으뜸이었다. 이색(李穡)의 기문이 있다.

 

고전번역서 > 동문선 > 동문선 제12권 > 칠언율시 > 최종정보

동문선 12 / 칠언율시(七言律詩)

건축국(乾竺國 인도의 雅稱)으로 돌아가는 엄상인을 보내며[送儼上人歸乾竺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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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범(朴仁範)

 

집이 창해 밖이라 꿈에조차 아득한데 / 家隔滄溟夢早迷
머나먼 앞길이 하물며 설산 서쪽 / 前程況復雪山西
경 소리는 멀어지고 황하의 근원을 따라가리 / 磬聲漸逐河源逈
지는 달 좇아 돛 그림자도 낮아지리 / 忛影長隨落月低
총령에는 귀신이 응당 잔도를 열어 줄 것 / 葱䫈鬼應開棧道
유사에는 신이 구름다리를 만들어 주리 / 流沙神與作雲梯
오천축 사람들이 묻거들랑 / 離鄕五印人相問
당나라 함통(당(唐)나라 의종(懿宗)) 연호를 손수 써서 보이소 / 年號咸通手自題

[-D001] 설산(雪山) : 

천산(天山)의 별칭(別稱).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으므로 설산(雪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한다.

[-D002] 총령(葱嶺) : 

돈황(敦煌) 서쪽 8천 리에 있는데, 산이 높고 크며 위에 파가 나므로, 총령이라 한다. 《水經》

[-D003] 유사(流沙) : 

사막(沙漠)을 말함. 우공(禹貢) 이후 역대 사지(史志)의 유사는 그 지점이 각기 다르나, 다 서역(西域)의 사막지대이다. 모래가 물처럼 유동(流動)하므로 유하(流河)라 했다.

[-D004] 오천축(天竺) : 

“천축국에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 다섯 나라가 있으니, 지금 5인도이다.”라는 말이 《괄지지(括地志)》에 보인다.

 

고전번역서 > 미수기언 > 기언 제41권 원집 > 허씨 선묘 비문 석지 > 최종정보

기언 41 원집 / 허씨 선묘 비문 석지(許氏先墓碑文石誌)

가락국(駕洛國) 보주 태후(普州許太后) 묘비 음기(墓碑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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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太后)의 성(姓)은 허씨(許氏)인데, 보첩(譜牒)에는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고사(金官古事)에 어떤 사람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임금의 딸이다.’ 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서역(西域) 허국(許國) 임금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허(許)를 어떤 이는 ‘허(許)ㆍ황(黃)의 나라는 방외(方外)의 동떨어진 나라로, 한 나라를 두고서 호칭(互稱)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아마 중국의 은(殷) 나라는 상(商)이요, 양(梁) 나라는 위(魏)인 것과 같은 것인가 보다. 먼 옛날의 일이라서 후세에 전해지는 말들이 똑같지가 않다. 지(誌)의 기록에, ‘선군(先君)이 명(命)하기를, 「동쪽 나라에 틀림없이 가락원군(駕洛元君)이 있어서 너를 얻어 짝을 삼을 것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왔다.」 하매, 수로왕이 왕후로 삼고 호를 보주태후(普州太后)라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혹은 ‘황옥부인(皇玉夫人)’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동한(東漢)의 광무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24년(48) 수로왕 7년에 해당된다.
그후로 후한 영제(後漢靈帝) 중평(中平) 6년(189) 3월에 태후가 훙(薨)하니, 수(壽)가 157세였다. 태후는 10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태후의 성을 받은 자가 두 사람으로 후세에 각각 그 봉(封) 받은 땅을 가지고 따로 씨족을 만들어, 공암(孔巖)과 하양(河陽)의 허씨(許氏)가 되었고, 또 그 나머지 사람들도 각각 그 고향으로 성을 나타낸 자들이 많으나 그 시초는 다 태후에 근본 하였다.
태후의 무덤은 왕릉(王陵)의 뒤 1리에 있다. 옛 풍속에 나라 사람들이 동짓날에 선왕(先王)께 대사(大祀)를 올리되 태후를 배식(配食)하여 지금까지도 제사를 올린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25년(1592) 왜적의 침략이 있을 때 왜적이 수로왕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아울러 태후의 무덤까지 팠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시 왕묘와 태후묘의 봉분을 쌓았다. 상(上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24년(1646)에 영남 관찰사(嶺南觀察使) 허적(許積)이 크게 묘(墓)를 수리하고 이어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만력(萬曆) 8년에, 관찰사(觀察使)였던 허공 엽(許公曄)이 일찍이 두 능을 수리한 일이 있었다.”

하는데, 지금까지 추계(追計)하면 67년 만에 수리한 셈이 된다.

[-D001] 금관고사(金官古事) : 

금관은,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金海)이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원년(514)에 가락국왕 구형(仇衡)이 항복하자, 그 나라를 금관군(金官郡)으로 만들었다. 고사는 금관군의 옛일을 전한 기사이다.

 

패수(浿水)

 

《한서》〈지리지(地理志)〉의 요동군(遼東郡) 번한현(番汗縣)에 “패수(沛水)가 새(塞) 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고, 또 낙랑군(樂浪郡) 패수현(浿水縣)에 “물이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수경(水經)》에 “패수(浿水)는 낙랑(樂浪)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는데, 역도원(酈道元)의 주(注)에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으니,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흘러간다면 패수를 건널 이치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호삼성(胡三省) 주에는 “내가 토번(吐蕃)의 사신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는데,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서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을 경유한다. 그러므로 《한서》〈지리지〉에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하였으니, 《수경》이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浿水

漢書地理志。遼東郡番汗縣有沛水。出塞外。西南入海。又樂浪郡浿水縣曰水西至增地縣入海。水經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海。酈道元注。衛滿自浿水至朝鮮。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通鑑胡三省注。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經樂浪郡朝鮮縣。故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水經誤

 호삼성(胡三省, 1230~1302) ,역도원(酈道/466?~527?)

 

다산시문집 6 / () 송파수작(松坡酬酢) 

여영천 우회 자기 아우 우렴을 생각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次韻呂榮川友晦懷其弟友濂之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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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계주 머나먼 길에 기러기도 드물어라 / 遼薊迢迢雁亦稀
어느 날에 산해관의 동문을 들어갈꼬 / 海關何日款銅扉
의무려산 다하여라 청전을 넘어가고 / 醫巫山盡踰靑甸
은하수 연하여라 자미궁이 가까워지네 / 牛女河連近紫微
북쪽 오랑캐는 언제나 패기가 수그러질꼬 / 北隷幾時消霸氣
서장국에는 군사 기밀을 엿볼 길이 없어라 / 西藏無路覘軍機
불월간 가을 바람이 사신 수레에 불어 오거든 / 金飆不月吹華蓋
살수 패수를 거쳐 올 제 말이 정작 살찌리라 / 蕯浿歸程馬正肥

[-D001] 여영천 우회 : 

여우회(呂友晦)의 이름은 동근(東根)인데 일찍이 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또 우렴(友濂)의 이름은 동식(東植)인데,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 참판에 이르렀고, 청(淸)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D002] 자미궁(紫微宮) : 

천제(天帝)가 거처한다는, 북두성(北斗星) 북쪽에 있는 성좌(星座)를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천자의대궐을 이른다.

 

다산시문집 제17권 / 제문(祭文)

중추(中樞) 이시승(李時升)의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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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고 매서운 기개는 간에 서리고 폐에 뭉쳤는데 울적하여 펴지 못한 채 이처럼 떨어져 운명하게 되었네. 몸은 문지(門地) 때문에 굽히고 이름은 재물로써 가렸으나 깊은 생각과 총명한 지혜는 무리 가운데서 뛰어났네. 북으로는 악라(卾羅)까지 가고 남으로는 이리(伊犂)에 다다라 해우(海宇)를 거두어 놓고 변방을 의논했으나, 그 관직을 생각하니 때를 만나지 못함 애석타 하겠네. 그가 남긴 10편의 글, 아는 이 그 누구인가. 불볕 날씨에 떨치고 나간 것이 나와의 이별이었네. 탁주와 닭고기로 이 슬픈 마음을 나타내노니 부디 흠향하소서.

[주-D001] 악라(鄂羅) : 

러시아의 음역(音譯)임. 아라사(鄂羅斯).

[주-D002] 이이(伊犁) : 

강 이름으로 혹 이열(伊列)ㆍ이려(伊麗)ㆍ익리(益離)라고도 한다. 부명(府名)으로는 한(漢) 나라 때에는 오손국(烏孫國)이었다가 청(淸) 나라 초에 준갈이(準噶爾)가 살았는데, 건륭 때에 준부(準部)를 멸하고 이이부(伊犁部)를 두었다

 

 > 고전번역서 > 한포재집 > 한포재집 제2권 >  > 최종정보

한포재집 2 / () 

평안도의 길에서〔關西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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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무는데 / 節序行將暮
노정은 끝이 없네 / 關河路不窮
산천은 내복과 다르고 / 山川殊內服
풍기는 서융과 맞닿았네 / 風氣接西戎 
흉년 들어 번화함 줄었고 / 歲儉繁華減
추위에 초목은 횅하구려 / 天寒草樹空
평생 간직한   을 / 平生三尺劍
언제 공동산에서 비껴 들려나 / 何日倚崆峒

[-D001] 내복(內服) :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주위를 순차적으로 나눈 구역. 옛날 주대(周代)에는 각각 5백 리씩으로 된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등 오복(五服)을 두었었다. 여기서는 왕성(王城)과 가까운 지역을 이른다.

[-D002]   (三尺劍) : 

옛날에는 검의 길이가 거의 대부분 석 자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나는 포의의 신분으로 일어나서 석 자의 검을 손에 쥐고 천하를 취했으니,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 此非天命乎?]”라고 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D003] 언제 …… 들려나 : 

외적(外敵)을 막아 천하를 평안케 하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다. 두보(杜甫)가 토번(吐蕃)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공동산(崆峒山)에 주둔하고 있던 가서한(哥舒翰)에게 보낸 〈투증가서개부이십운(投贈哥舒開府二十韻)〉 시에 “몸을 막는 장검 한 자루를, 공동산에서 비껴 들고 싶다오.[防身一長劍, 將欲倚崆峒.]” 하였다. 《補注杜詩 卷17 投贈哥舒開府二十韻》

 

 

아랫 지도는 1938년 중일전쟁 당시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