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6. 10:40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속동문선 제21권 / 녹(錄)
유 송도록(遊松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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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인(兪好仁)
. 남으로 경덕궁(景德宮)에 나아가니, 곧 우리 태조의 구저(舊邸)가 용수산(龍首山)이 내리 밀어 궁이 되고, 서쪽의 작은 봉우리가 드높아서 고개를 쳐드는 듯이 웅장하게 서 있으니, 대개 신인(神人)의 기명(基命)을 일으킬 땅이 비장(秘藏)되었다 나타났으니 어찌 하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을축(乙丑)일 이른 아침에 방교수(房敎授)를 붙들고 연경궁(延慶宮)의 구지를 찾으니 곧 고려 태조 즉위한 2년에 창건한 것이다. 북으로 숭산(嵩山)을 의거하고 남으로 용수산을 끼고 낙하(洛河)가 그 동쪽으로 돌고 벽란(碧瀾)이 그 서쪽으로 쏟아지니 참으로 천부(天府)라 하겠다. 세상이 전하기를, “맨 처음에 술사의 설(說)에 혹하여 지맥(地脈)을 끊으려 하지 않은 까닭으로 산세를 따라 벌집[蜂房]처럼 되었다.”고 하는데, 난간과 서까래를 아로새기고 경요(瓊瑤)로 결구(結構)한 것은 모두 벌써 땅속에 묻혀 버리고 다만 두어 마장 주위에 무너진 계단과 부스러진 섬돌이 위아래로 종횡해 있는 것만이 보이며, 만여 그루의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싸늘한 구름이 나돌고 가시덩굴과 우거진 풀은 이미 여우 토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말에서 내려 운제(雲梯)를 더위잡고 올라가니 마치 봉새가 목을 움츠리고 날아가려고 하는 것 같은 곳은 건덕전(乾德殿) 유기(遺基)이다. 면세(面勢)가 통창하고 넓어서 정히 그 땅과 상치하니 세상이 만월대(滿月臺)라 칭한다. 동편은 동지(東池)였는데, 지금은 논이 되었다. 숙종(肅宗) 예종(睿宗) 시대에 왕왕 이 용주(龍舟)를 띄우고 그 안에서 친히 과거를 보였었다. 사(史)에 이르기를, “고종(高宗) 10년에 사흘 동안 물이 탁해지고 어룡(魚龍)이 다 나왔다.” 하였으니, 괴이한 일이다. 못의 동쪽은 의신창(義神倉)이다. 전(殿)에서 서쪽으로 수십 보를 떨어져서 간의대(簡儀臺)가 있는데, 굽어보면 시냇물이 광명동(廣明洞)으로부터 전 앞 석교(石橋)를 둘러서 내려오는데, 소리가 나서 마치 환패(環佩) 소리가 징글징글 울리는 것 같았다. 석교(石橋) 남쪽에 위봉루(威鳳樓)가 있고, 위봉루 동쪽은 사간원(司諫院)이요, 서쪽 등성이 가운데 잣나무가 새파랗게 빼어나 있는 곳이 사헌부(司憲府)요, 사헌부 북쪽에 담장을 빙 두른 곳은 □□인데, 모두 빈 터만이 남았다. 위봉루 남쪽은 구정(毬庭)인데, 주위는 수십 보가 된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팔관회(八關會) 때 중들을 모아놓고 밥먹이던 곳이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대관(大觀)ㆍ관락(觀樂)ㆍ인덕(仁德)의 모든 전(殿)은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 만월대를 경유하여 강안전(康安殿)을 거슬려서 북으로 가면 오솔길이 마치 가는 뱀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이 보인다. 종을 시켜 숲을 헤치고 앞장서 인도하게 하고 겨우 걸어서광명사(光明寺)에 도착하니, 이 절은 곧 세조(世祖)의 구저(舊邸)다. 북쪽 섬돌 아래 마른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용녀(龍女)가 목욕하던 곳이라.” 한다. 절에서 떨어져 북으로 조그마한 언덕이 있는데, 마치 뜸을 뜨는 심지와 같이 보인다. 속칭으로 ‘온혜릉(溫鞋陵)’이라 하는데, 말이 모두 황당하여 믿을 수가 없다. 절 앞의 수십 보 지점에 끊어진 비(碑)가 있는데, 글자가 희미하여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영평문(永平門)을 나와 보현원(普賢院)을 지나서 천마산(天磨山) 서쪽 기슭을 타고 십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고 또 넘는데 한결같이 잔산(殘山) 단롱(斷隴)이다. 이르는 곳마다 길이 막힌 듯하다가 차츰 다시 열리곤 한다. 청량동(淸涼洞)에 당도하니 해가 이미 한낮이라 무더운 안개가 내리쬐고, 비린내 나는 바람이 숨통을 막히게 하여 잠깐 무성한 수풀 아래 쉬는데, 실낱 같은 물줄기가 그 가운데로 통하여 양칫물을 할 만하였다. 이윽고 신 도사(辛都事)가 뒤를 따라와서 함께 말을 타고 회현(檜峴)을 넘어 북으로 접어드니 또한 고개가 앞에 있는데 깎아 세운 벽(壁) 같다.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올라가니 아득히 보이는 천마(天磨)ㆍ성거(聖居) 두 산이 새파랗게 빼어나서 반공에 솟았는데, 마치 용호(龍虎)와도 같고 검망(釼鋩)과도 같으며, 따라오는 것이 이반(離叛)하기도 하고 비껴가던 것이 다시 붙이기도 하여 기현상을 드러낸 것이 이루 헤일 수 없다. 대흥동(大興洞)에 들어가니 마침 저녁 무렵이라 가벼운 아지랑이가 자욱하였다. 시내를 따라 약 두세 마장쯤 들어가니 우산이 옷깃처럼 어울려 형상이 관문과 같고, 비탈이 끊어지자 형세가 막히어 만 길이 깎은 듯이 솟았다. 그 위에 용추(龍湫)가 있어 이름은 박연(朴淵)인데, 돌로 인하여 큰 구덩이가 패어 만 가마가 들어갈 만한 함지와 같다. 시냇물이 그 속으로 들어가 저장되매 넘실거려 밑이 보이지 아니하고, 돌고 돌아 기세를 올리며 잠깐 사이 변화가 무궁하여 날아다니는 물방울과 뿜는 물결이 번개같이 내닫고 우레와 같이 울리어, 반공의 벽을 내리 흘러 고담(姑潭)으로 떨어지자 흩어져 만 필의 베와 숲이 되어 골짝에 뿌리고, 땅덩이를 뒤흔들어 마치 은하수가 휘어져 땅에 꽂은 것 같으니 놀랍고도 무서워 가까이 하지 못하겠다. 못의 중심에 돌이 있어 반쯤 나왔는데, 형상은 거북이 엎딘 것 같으며, 정상(頂上)에는 3ㆍ4명이 앉을 만하다. 역사에 이르기를, “고려 문종(文宗)이 올라 앉았는데, 풍랑이 갑자기 일어나며 용이 나와서 돌을 흔들기로 이영간(李靈幹)이 글을 써서 던지어 용을 내리쳤다.” 하였다. 그 곁에 큰 바위가 있어 높이는 다섯 길쯤 되는데, 희어서 지방을 잘라 놓은 것 같으니, 고금의 구경꾼들이 자주 이 돌에 이름을 썼다. 나도 지난 을유년 겨울에 우연히 한 번 붓대로 휘둘렀는데, 지금 벌써 두 해가 지났으니 반드시 구름에 거의 마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취묵(醉墨)이 싱싱하여 아직도 여전하다. 곁으로 가서 두어 걸음을 가면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 비를 빌면 바로 영검이 있다고 한다. 다시 백여 보를 올라가니 좌우 양쪽 비탈에 각각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속담에 전하기를, “부득박박(夫得朴朴)이라.” 한다. 이로부터 갈수록 지경이 더욱 한적하고 나무는 늙어 여위고 단단하며, 경남(梗柟)의 종류가 빽빽이 들어차서 가이 없고, 계곡(溪谷)에는 한결같이 큰 돌이 깔려 마치 성낸 범이 엎디어 코와 입이 서로 으르렁대며 장차 물어뜯을 것같이 보인다. 가다가 못 하나를 만났는데, 돌 형상이 흡사 거북과 같다. 그러므로 귀담(龜潭)이라 이른다. 시내를 따라 몇 구비를 돌아서 다리[略彴]를 건너니 절이 있어 이름은 관음굴(觀音窟)인데, 바로 우리 태조 잠저(潛邸) 시절의 원찰(願刹)이라 목은(牧隱)의 지은 기(記)가 아직까지 벽에 걸렸다. 절 뒤에 내민 비탈이 지붕같이 되어 그 아래에 돌부처 십여 구를 모셨는데, 이금(泥金)이 부스러져 면목을 거의 분변 못하게 되었다. 실낱 같은 샘줄기가 바위틈으로 새어나와 맑고 서늘하여 중령(中嶺)에 비할 만하다. 석양의 아지랑이가 이미 서리어 산골이 어두워지기로 우리 일행은 드디어 법당에 둘러 앉아 창문을 열고 사방을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봉우리들이 겹겹이 쌓여 모두 궤석(几席) 아래 있는 듯하였다. 밤 10시가 되자 운무(雲霧)가 끓어올라 변태가 비상하여 가슴을 출렁이는 기세가 있는 것 같은데, 늙은 중이 곁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레가 울리는 듯하였다. 각기 백고탕(白胯湯) 두어 사발씩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아득히 조물주와 더불어 노닐었다. 동으로 토점(土覘)을 바라보니 골짜기가 웅장하여 수십 리에 뻗쳤는데, 맑고 조촐하여 더욱 기절(奇絶)하다. 그를 경유하면 오관산(五冠山) 성거산(聖居山)으로 통할 수 있다.
병인(丙寅)일에 신도사(辛都事)가 몸이 조금 불편하여 먼저 돌아갔다. 마침내 운거(雲居)ㆍ길상(吉祥) 두 절을 보자고 의논하는데, 마침 공중이 어두워지며 장차 비가 내릴 모양이므로 마침내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구로(舊路)를 찾아 거의 회현(檜峴)에 당도하자 염노인[廉老]이 말머리에 와서 멀리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서 두어 마장을 올라가면 정자사(淨慈寺)라는 절이 있는데 미천한 사람이 미리 변변하지 못한 주석을 마련하고 행색을 위로하고자 하여 감히 요청하는 것이다.” 하니, 모두 응락하고 염노인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따라갔다. 절에 남루(南樓)가 있어 심히 통활하고, 천마산(天磨山)을 면대하고 두어 가닥의 높은 벽이 동떨어져 솟았으니, 참으로 절승한 경치이니, 이때에 비가 삼대같이 쏟아졌다. 이윽고 조금 그치기로 말을 재촉하여 저물녘에 보통원(普通院)에 당도하였다. 거기서 서쪽으로 돌아서 파지동(巴只洞)으로 들어가 고려의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물으니 마을 할멈이 가까이 끊어진 잔등 밖을 가리킨다. 과연 보니 하나의 구릉(丘陵)이 덤풀 속에 있고, 곁에는 한 자쯤 되는 비가 섰는데 표하기를, “고려 시조 현릉(顯陵)이라.” 하였다. 풀이 얽힌 돌상에 깔았던 자리가 쌓여 궤를 올린 형상이 있다. 능을 지키는 몇 명이 와서 고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으로 이곳에서 오래 살았는데, 명절 때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묘소에 올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침한 황혼이나 비가 오는 밤에 반드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군왕이 행차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되면 사람이 병을 앓게 되어 열 명에 하나도 낫지 못합니다.” 한다. 아, 삼국이 맞서서 해내(海內)가 소란한데 왕씨(王氏)가 용봉(龍鳳)의 바탕으로써 동방에 자리를 잡고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를 만들었으니 공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으며, 백성이 지금까지 그 은혜를 받고 있다. 대개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 것은 생리의 정상이니 비록 호걸이라도 역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운이 가면 무궁의 계획이 짧은 날보다 촉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영특하고 웅장한 혼백이 어찌 도리어 산 귀신과 숲 속의 도깨비를 본떠서 구구하게 너희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여 화와 복을 주겠느냐. 북쪽 골짝에 두어 능(陵)이 있어 수백 보 사이에서 서로 바라보는데 거주하는 사람들이, “충정왕(忠定王)ㆍ충혜왕(忠惠王)의 능이라.” 이른다. 그러나 인식할 만한 비석이나 푯말이 없다. 이날이 음산하고 어둑하여 길 걷기에 지친 몸이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루(院樓)에 올라 각각 큰 술잔으로 여러 잔을 마시고 나니 신관이 차츰 안정되었다. 복령사(福靈寺)에 들어가니 그윽하고 고요하여 마음에 들며 전(殿)에 16나한(羅漢)의 소상이 있는데, 제작(制作)이 절묘하여 천태산(天台山)에서 단식(斷食)하고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 동으로 가서 한 언덕을 지나니 총묘(塚墓)가 무더기로 있고, 금잔디 지는 해에 가마귀와 솔개가 나직이 맴도는데, 야로(野老)가 지적하며, 궁인사(宮人斜)라 이른다. 차소(次韶)가 말하기를, “어찌 청춘의 넋이 제비로 화하여 미앙궁(未央宮)으로 날아 들어갈 때가 없겠는가.” 하였다. 광명사(廣明寺)에 당도하니 경력(經歷) 선생이 먼저 음식 만드는 사람을 보내어 연각국(軟脚局)을 배설하고 교생(校生) 수십 명이 또한 술과 안주를 싸가지고 위로하려고 왔다. 장로(長老 늙은 중)가 나와 영접하며 말하기를, “어제 왕림하였다는데 마침 밖에 나가서 미처 뵙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듣자니 제군의 이 놀음이 전혀 탐승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빈도(貧道)가 다만 그림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 살펴보라.” 하고, 곧 좌상에 펼쳐 놓는데 헌면(軒冕)과 채불(彩佛)이 대기 제왕의 모습이다. 해가 묵어 다 삭아서 비단 올이 만지기만 하면 바슬바슬하여 이윽고 보니, 축목(軸木)에 목종(穆宗)이란 두 글자가 가늘게 써져 있어 온 좌중이 깜짝 놀라지 않은 자 없었다. 되돌아서 생각하건대 의창(猗昌)의 자질로서 능히 어머니를 억제하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적신(賊臣)이 틈을 타서 일어나매 의복을 사서 밥을 짓고 말을 청해서 싣고 하다가 마침내 적성의 걸음이 있어 돌아오지 못했으니 전(傳)에 이르기를, “여인(厲人)이 왕을 불쌍히 여겼다.” 했는데,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5월 정묘(丁卯)일에 일찌감치 은비현(銀篦峴)을 거쳐 병부교(兵部橋)를 지내어 송악(松岳)의 양도(陽道)를 타고 광명(廣明)의 동학(洞壑)을 굽어보니 봉우리 겹겹이 싸이고, 연하(煙霞)가 아슬하게 얽히어 안탕산(鴈蕩山)에 들어가고 적성(赤城)으로 오르는 것 같았다. 백여 구비를 맴돌아서 절정에 오르니 수목이 옹위하여 스스로 한 구역이 되고, 평가(平家) 3ㆍ4호가 바위에 가래를 걸쳐 지어졌는데 개와 닭이 쓸쓸하게 보였다. 남북 봉우리에 각각 사당이 있어 북은 대왕당(大王堂)인데, 신상(神像) 여섯이 다 높은 관을 쓰고 큰 홀(笏)을 가졌고 남쪽은 성모당(聖母堂)인데, 신상이 역시 여섯이 여관(女冠)을 쓰고 연지분을 발랐다. 사당지기가 문 아래 서서 신의(神衣)를 볕에 쪼이다가 마땅찮게 보며 하는 말이, “명신(明神)은 속인이 함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기로 나는 나무라며 문을 열게 하니 실내가 정결하고 붉은 휘장이 상을 둘렀는데, 만수향이 아직 타고 있다. 옛말에 이른바 팔선궁(八仙宮)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니랴. 이 날 비가 새로 개어 하늘이 맑아 사방을 바라보니 끝이 없다. 한 바다는 동이와 항아리가 되고 삼산(三山)은 늘어놓은 접시가 되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하루살이가 어지럽게 나는 것과 같아서 자못 소강절(邵康節)이 낙양(洛陽)에서 옛일을 회상하던 느낌이 있었다. 서로 더불어 수십 잔의 술을 들어 마시고 소리를 높여 노래하니 완연히 진애(塵埃)를 사절하고 항해(沆瀣)를 마시며 대붕새 등을 벗어나서 구천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어둘 녘에 청계사(淸溪寺)로 내려가서 시냇가 반석에 걸터앉아 손으로 물결을 희롱하며 한참동안 깨끗이 씻고 드디어 두어 고개를 넘어 동으로 나가 옛 집터를 보았는데, 바로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이다. 그때를 당해서 나라 형세가 날로 기울어 가니 옛날의 홀어머니는 베를 짤 씨줄이 부족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나라 일을 근심했는데, 공민왕은 하나의 여자 때문에 우리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여 10여 년이란 오랜 세월에 이르렀으니, 족히 미치고 혹하는 자의 거울이 될만하다. 수락암(水落巖)을 지나가니 물이 굽은 턱을 돌아서 부딪치고 내려간다. 전성시대에 비난을 씻던 곳이라 한다. 왕륜사(王輪寺)를 경유하여 북으로 백 보쯤 가면 자하동(紫霞洞)인데 채시중(蔡侍中) 홍철(洪哲)의 구택(舊宅)이다. 저물녘에 건성사(乾聖寺)에 당도하니 신이화(辛夷花)는 이미 지고 작약(芍藥) 두어 포기가 가랑비 속에 피어 있기로 술을 들고 감상하며 두어 순배를 돌리고 파했다.
무술(戊戌)일에 경력공(經歷公)이 일찌감치 편지를 보내오기를, “오늘에 여러분을 요청하여 서호(西湖)로 유람가겠다.” 하였다. 때에 군기판관(軍器判官) 김성경(金成慶)이 공무로써 이곳에 있기 때문에 역시 참예하였다. 승제문(承濟門)을 나가서 옥련평(玉蓮坪)을 거쳐 남신원(南神院)을 넘어 영안성(永安城)에 오르니, 일면은 끊어진 뫼 뿌리를 의지하여 항구(港口)로 들어갔다. 역사에 전하기를, “백천정조(白川正朝) 유희(劉晞)가 세조(世祖)를 위해 쌓은 것이라.” 한다. 세조가 돌아가니 몽부인(夢夫人)과 더불어 이곳에 합장하였다. 그러므로 혹은 창릉(昌陵)이라 칭한다. 옛날에 송(宋) 나라 상인(商人)이 한 여자를 놓고 내기바둑을 두어 이겨서 그 여자로 더불고 가는데 배가 겨우 닻줄을 풀자 빙빙 돌며 가지 아니한다. 점을 쳐보니 이르기를, “절부(節婦)에게 감동되어 그렇다.” 하니 상인이 두려워하여 바로 돌려보냈다. 그 여자가 이에 예성강(禮成江)을 두고 노래 한 가락을 지어 지금까지 호해(湖海)간에 전하고 있다. 남으로 운해(雲海)에 다다르니 고래 떼와 거센 물결이 밤낮으로 소용돌이 치고 주루(珠樓) 신각(蜃閣)이 변태가 비상하여 화개(華蓋)ㆍ마니(摩尼)ㆍ수양(首陽) 같은 여러 산이 또렷이 나타나서 미인의 머리 구비와 같다. 잠깐 건널목에 쉬면서 생선을 회치고 술 두어 순배를 마시니 때에 꼴을 베는 아이, 나물을 캐는 할멈들이 몰려와 곁에서 구경한다. 잠깐 후에 사공이 배를 끌고 나와 가는데, 놎은 조수가 바야흐로 밀려들어 30리를 거슬러 올라갔으며, 장오(檣烏)가 높이 쳐들어 나는 새보다 빨랐다. 그래서 곧 비파를 타고 철적(鐵笛)을 불게 하였다. 술이 얼큰하자 각각 장단구(長短句)를 지었으니, 비록 서호(西湖) 적벽(赤壁)의 놀이도 어찌 이보다 나으랴. 벽란도(碧瀾渡)를 뚫고 지나가니 정자가 있어 맑고 상쾌한데, 석주(石柱)가 조수를 받아 석자 가량이 묻히었다. 거침없이 서쪽으로 돌아서 별포(別浦)를 따라 들어가 견불사(見佛寺)에 오르니, 지는 해가 아득하고 소금 굽는 연기가 멀리 일며, 해오리 갈매기가 떼지어 나는데, 배 부리는 사람은 누(樓) 아래서 삿대로 뱃전을 두들기고 있다. 나는 몹시 취해서 코를 쿨쿨 골고 가행(可行)은 경물(景物)에 정신이 팔려 왕왕 남의 말을 그릇 대답하고 차소(次韶)는 눈을 바로 뜨고 긴 바람을 불어 소리가 끓는 듯하니 경력공(經歷公)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여러분이 오늘에 당해서는 자못 각각 태도가 있다.” 하였다. 밤이 깊어 중의 노래도 이미 끝났는데, 문을 열고 나와 산보하다가 피곤해서 문득 노적(蘆荻) 사이에 누웠었는데, 어느새 새벽빛이 바다 모퉁이에 떠올랐다.
기사(己巳)일에 종을 시켜 배를 동포(東浦)로 옮기게 하니, 사공은 뱃전을 치며 어부의 노래를 부른다. 멀리 보니 감로사(甘露寺)가 연무(煙霧) 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데, 누각이 어울려서 마치 그림과 같다. 그 신묘한 것이 멀리 보는 데에 있고 가까우면 적의하지 않으므로, 서서히 노를 저어가게 하여 절 밑에 당도하니 요주(寮主)가 나와서 인사를 마치고 방장(方丈)으로 끌고 들어갔다. 현판한 수십 수의 시를 올려 보니 모두 근대 여러 명사들의 소작이었고, 뜰 한가운데 9층의 탑이 있어 돌색이 옥과 같으며, 조각도 절묘하여 바로 경천사(敬天寺)의 것과 서로 대등할 만하다. 절은 본시 이자연(李子淵)이 지은 것인데, 형세나 규모가 한결같이 윤주(潤州)를 모방하여 기관(奇觀)과 승경이 해동에서 으뜸간다. 두루 구경하고 작은 누에서 서성대다 벽에 이름을 쓰고 나왔다. 산등성을 넘어 개성이 고현(故縣)으로 나오니 동쪽의 큰 우물이 있어 두어 자 물이 맑게 고였는데, 왕왕 거센 거품이 끓어오르고 신어(神魚)가 뜨락 잠기락하여 역력히 헤일 수 있다고 한다. 속으로 구멍이 있어 위로 산복(山腹)에 통하여 물이 쏟아져 우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아래 수천 이랑을 물댈 수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은배굴정(銀杯掘井)’이란 말은 어디서 근거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우물곁에 두어 칸 집이 있으니, 이는 정사(井祠)라고 한다. 동으로 십 리쯤 나가 북으로 돌아서 봉명산(鳳鳴山)에 들어가 현릉(玄陵)ㆍ정릉(正陵)을 찾으니 두 능이 한 뫼 뿌리에 서로 대치하여 동에 있는 것은 한가운데가 오히려 벌어져 있다. 맨 처음 광중을 만들 적에 주루(珠襦)ㆍ옥갑(玉匣)과 금루(金鳧)ㆍ은안(銀鴈)의 물건으로 꾸미개를 하여 제작이 한 시대의 묘(妙)를 다하였으니, 비록 여산(驪山)의 역사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동비(東臂)와 여장(女墻)은 새로 만든 것 같고, 그 가운데 횡비(橫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삼왕(三王)을 봉하는 책(策)과 곽광전(霍光傳) 서사(叙事)를 의방하여 이색(李穡)이 짓고, 한수(韓脩)가 쓰며 권중화(權仲和)가 비액(碑額)에 전자를 썼다. 나는 석양(石羊)을 어루만지며 조업(曹鄴)의 시를 읊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이것저것 광중의 물건이 / 壘纍壙中物
살림살이 기구보다 많구려 / 多於養生具
만약에 산을 옮겨놓게 된다면 / 若使山可移
응당 이 진 나라로 갈 걸세 / 應將泰國去
순임금 죽음이 먼저지만 / 舜没雖在前
이제껏 봉수(봉분과 입비를 못했다는 말임)를 못했다오 / 今猶未封樹
하였다. 차소(次韶)는 말하기를, “현릉(玄陵 공민왕)으로 하여금 영혼이 있다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준예역(狻猊驛)을 지나서 황교(黃橋)에 도달하니, 신도사(辛都事)가 미리 장막을 치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극히 즐겁게 놀았다. 술에 무르익어 취한 채 정문(正門)으로 들어가니 밝은 달이 땅에 가득 비치고, 오교(五橋)의 주렴(珠簾) 속에 은등(銀燈)이 반짝이며 피리와 노래가 들끓었다. 태평관(太平館)을 지나 서소문(西小門)을 경유하여 돌아오니 밤이 벌써 여덟시가 지났다.
경오(庚午)일에 적전판관(籍田判官) 정서(鄭恕)가 와서 곧 동반하여 화원(花園)으로 향하였다. 이 화원은 공민왕 23년에 창설한 것으로 팔각전(八角殿)이 있는데 옥좌(玉座)에 먼지가 보얗다. 거미줄이 창살에 얽혔다. 계단 아래 앵두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 바야흐로 열매를 맺어 주렁주렁하고 전 뒤에는 괴석(怪石)으로 산을 만들어 진기한 꽃들이 돌 틈에 어지러이 피어 있다. 이는 신우(辛禑)가 나라를 도적질한 십여 연간의 물건인데, 지금은 이미 민간에 흩어진 것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의 잃고 얻는 것도 결국 진세(塵世)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 미덥지 아니하랴.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지나니 서쪽 벽 함(陷)한 곳에 석각(石刻)이 있는데, 바로 정삼봉(鄭三峯 도전(道傳))의 소작 기(記)다. 세 그루 홰나무가 허소한 곳을 메우고 팔좌(八座)는 황량(荒涼)한데, 어떤 사람은 충신이요 어떤 사람은 간신이라 씌어있으니 어찌 피리춘추(皮裏春秋)가 아니랴. 대묘동(大廟洞)에 들어가 포은(圃隱)의 옛 집을 찾으니 뜰에는 풀이 우거지고 빈 터만 남아 지금은 승방이 되었다. 공이 비록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정한 주인에게 돌아간 줄을 알았지만, 그래도 구구한 한 기둥으로 5백 년을 내려온 큰 집을 떠받들어다가 마침내 절개에 엎드려 죽었으니, 어찌 천지의 정기가 공에게 모여서, “그의 날 적에도 까닭이 있고 죽을 적에도 하고 간 것이 있다.” 는 것이 아니겠느냐. 삼가 목청전(穆淸殿)에 나아가서 우리 태조의 성상(聖像)을 배알하고 북으로 회창문(會昌門)을 나와 귀법사(歸法寺) 옛터를 찾았다. 옛날에 최충(崔沖)이 구재(九齋)를 창설하여 학도를 가르치고 매양 여름에는 이곳으로 피하여 예능(藝能)을 고사하였다. 드디어 총지동(愡持洞)을 거슬러 비문령((碑門嶺)을 넘으니 영통사(靈通寺)란 절이 있는데, 층층의 멧부리와 첩첩의 고개가 에워싸여서 완연한 하나는 호중(壺中) 세계이다. 서편에 작은 누가 있어 동떨어진 시내에 임하고 숲 그늘이 빈틈이 없으니, 비록 삼복의 무더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살결에 좁쌀이 일게 한다. 현판에 월창(月牎)ㆍ천봉(千峯) 및 여러 위인의 시가 있는데 다 청아하여 볼만하다. 사문(沙門) 안에 의천공덕비(義天功德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김부식(金富軾)의 소작이다. 누의 남쪽에 황양목(黃楊木) 10여 그루가 서로 얽히어 줄을 짓고, 늙은 줄기가 울룩불룩하여 완상할 만하다. 이를 보고서야 구양공(歐陽公)의 부(賦)의 유래를 터득하였다. 절 북쪽에서 가장 새파랗게 빼어나고 우뚝 솟은 것은 오관산(五冠山)인데, 본조(本朝)에서 해마다 향화(香火)를 내려 준다. 그 아랫터는 바로 효자(孝子) 문충(文忠)이 사는 곳이다. 주승(住僧)이 영정(影幀) 넷을 보이는데 하나는 선종(宣宗)이요, 하나는 홍자번(洪子藩)인데 사람됨이 괴걸하고 준수하며 재간이 뛰어났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유경(柳璥)의 천거로 벼슬이 재상의 지위에 있어 10여 년 동안 미봉하고 보좌하여 충선왕 부자로 하여금 사랑과 효도를 처음과 같이 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다. 하나는 홍영통(洪永通)인데 충정공의 손자이다. 천성이 아부하기를 좋아하여 노상 역적 신돈(辛旽)에 붙어서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냈고, 뒤에 임염(林廉)과 더불어 악한 짓을 같이했는데, 홀로 목숨을 보전하여 다시 삼사(三司)의 일을 맡았다. 그 하나는 윤석(尹碩)인데 해평인(海平人)이다. 충선왕 조정에서 공교한 말과 아첨하는 낯짝으로 어진 이를 시기하고 능한 이를 미워하며, 평생의 행사가 모두 이와 같은 유(類)이며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다. 이날 저녁에 정판관(鄭判官)은 적전(籍田)으로 돌아갔다. 방교수(房敎授) 형제 및 김판관(金判官)과 더불어 회창문(會昌門)에 들어가 성균관을 찾아서 공부자의 소상(塑像)을 뵈오니,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는데, 첨여(襜如)하고 엄연하여 위에 계시는 듯 묘당(廟堂)은 명륜당(明倫堂)이요, 당의 좌우는 스승ㆍ제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정원에 묵은 잣나무 두어 그루가 섰고, 선비들의 발걸음은 적막하여 항상 문이 닫혀 있을 따름이다.
신미일이 되자 돌아가기로 하니 유수상공(留守相公)이 요좌(僚佐)들을 인솔하고 나와 암방사(巖防寺)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도읍 가운데를 내려다보니 몇 번의 화재를 겪고 몇 번의 전쟁을 치러 지령(地靈)은 이미 죽었고, 옛사람을 추억하니 혹은 좋은 이름을 백대에 남기고 혹은 궂은 냄새를 만년에 끼쳤으나, 이제는 이것저것이 모두 없어져서 다시 종적을 찾을 길이 없다. 한탄스러운 일이다. 술이 반쯤 취하자 상하 5백 연간 흥하고 폐한 이유를 말하게 되어, 이인임(李仁任)이 명 나라 사신 연호정(煙戶政) 등을 죽인 사실에 미치니, 유수상공이 멀리 한 동네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저기가 이른바 왕저동(王邸洞)으로 노간(老姦)이 살던 곳이다. 집을 잘 짓고 거기서 웃고 노래하였는데, 지금은 다 논밭이 되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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