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6. 10:39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속동문선 제12권 / 서(書)
여 밀양향교 제자 서(與密陽鄕校諸子書)
[DCI]ITKC_BT_1365A_1420_010_0060_2002_011_XML DCI복사 URL복사
김종직(金宗直)
여름철이 돌아와서 모든 물(物)이 제 모양을 챙기는 때에, 너의 공부하는 것이 어떠하며 최 선생께서도 어떠하신지. 모(某)는 복(服)을 벗은 뒤로 흉년이 들어서 권속을 이끌고 김해로 돌아오게 되어, 하루도 편안히, 고향에서 여러 분들과 함께 옛 경서를 토론하고 현 제도를 강구해서, 학교(學校)로서 떨어뜨려서는 안 될 기강(紀綱)을 세워 영원히 지키게 하지 못하였으니, 자나깨나 진실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요즈음 헛되이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시강(侍講)의 자리에 있다가, 불행히 병이 들어 조정에 사직원을 냈으니, 병이 정히 낫고 몸이 정히 한가하게 되면, 장차 배를 빌려 타고 남으로 돌아가서 전일에 계획한 바를 완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윽히 생각해 보니, 시골 풍속이 효박하게 되고 조정의 정화(政化)가 통하지 않는 폐단의 원인은, 전혀 학교의 강학이 밝지 못한 데에 있는 것 같다. 강학이 진실로 밝으면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의 교화를 사람마다 익히어 학교로 말미암아 마을 구석에까지 미치며, 그 훈김에 젖어서 스스로 말려 해도 말 수 없게 되면 오륜(五倫)이 각각 그 질서를 얻고 사민(四民 선비ㆍ농사꾼ㆍ공업인ㆍ상인)이 각각 그 직업에 편안히 종사하리니, 집집마다 봉할 수 있다는 풍속도 또한 이로 인해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완악하여 기강을 무시하는 자가 그 사이에서 체동(螮蝀)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보면 한 고을의 다스려지고 안 다스려지는 것은 실로 향교에 관계되고, 한 고을뿐 아니라 비록 천하라도 그러하니, 대소는 비록 다를 망정 그 규모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밀양은 역사가 오래된 고을인지라 산천의 형세가 맑고 웅장하며, 오묘하고 깊숙하며,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답고 인구가 번성하며, 산에는 저(楮)ㆍ칠(漆)ㆍ웅(熊)ㆍ호(虎)ㆍ금(金)ㆍ석(石)ㆍ죽전(竹箭)의 이익이 있고, 강에는 포라(蒲鸁)ㆍ능감(菱芡)ㆍ어별(魚鱉)ㆍ적위(荻葦)의 생산이 있어 공용(工用) 물산을 교역(交易)하는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드니, 비록 동남의 한 도회지라 해도 마땅하며, 그 백성도 역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부지런하고, 조세(租稅)와 부역에 즐겨 응하니, 윗사람이 진실로 인의(仁義)로써 인도하면, 교화시키기도 쉽고 부리기도 쉬울 것이다.
전조(前朝) 중엽에 해이하여 주(州)의 불평한 놈들로, 방보(方甫)나 계년(桂年) 같은 무리가 백성들을 선동해서, 진도(珍島)의 도적과 내통하고 떼를 지어 다니다 얼마 안 가서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는데, 세상이 드디어 이로써 고을 풍속을 나무랐다. 그래서 후일에 편찬된 관풍록(觀風錄)이나 지리지(地理誌)에는 모두, “그 백성은 투쟁하기를 좋아한다.” 하여, 지금까지 산천ㆍ인물의 치욕거리가 되고 있으니, 아,제(齊)ㆍ노(魯)는 문헌의 나라를 공자ㆍ맹자의 유교(遺敎)가 보존되었으되, 세대(世代)를 지나는 동안에 간사한 놈과 큰 도적놈이 그 땅에 웅거하여 난리를 꾸민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이것으로써 그 땅까지 아울러 헐뜯지 아니하며, 만약 예의의 습속을 칭한다면 반드시 두 나라를 으뜸으로 삼고 있는데, 어찌하여 우리 고을은 한낱 방보ㆍ계년의 반란 때문에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오히려 그 오점을 무릅써야 된단 말인가. 여기서 《관풍록》이나 《지리지》를 편찬한 인물이 그 아량이 너그럽지 못해서, 사람에게 허물을 고치고 착한 데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대개, 땅에는 고금이 없으나 사람은 고금이 있으니, 박한 것을 돌이켜서 후(厚)하게 만드는 데 어찌 그 기회가 없으리오. 그렇다면, 그 책임이 향교에 있지 않겠는가. 방금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어 문치가 바야흐로 융성하매, 여러 분이 모두 수사(秀士)로 농촌에서 뽑혀 선비의 의복을 입고 선(善)을 먼저 창도하는 수선(首善)의 처지에 있으니, 마땅히 위로 인재를 육성하는 은혜를 체득하고, 아래로 민심을 전향하는 방법을 생각하며, 효제ㆍ충신의 도를 강명(講明)하여 향리(鄕里)에 제창해서, 어리석은 무리를 개발하고 낡은 오점을 씻어버리는 것이 바로 자기 임무인데, 요즈음 학문의 규례가 무너져서, 장유(長幼)의 질서가 무시되고, 신구(新舊)의 차례가 상실되며, 현송(絃誦)의 소리가 거의 끊어지고, 교만하고 음탕한 풍기만이 서로 중상하며 매양 관부(官府)를 비방하고, 친구끼리 무고하여 그 행위가 초동(樵童)ㆍ목수(牧豎)도 부끄러워할 일이니, 진실로 이와 같을진대, 향교란 그 자체가 습속을 무너뜨리고 있거늘, 어찌 온 고을이 관감(觀感)하고 흥기하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느냐. 또 들으니, 교방(敎坊)의 창녀(娼女)들을 각각 차지하여 불러들여 재사(齋舍)에서 자는데, 간혹 서로 몰래 빼 가는 일이 있다고 하며, 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음복할 때에나 사장(師長)에게 수주(壽酒)를 올릴 때에나, 무릇 잔치를 즐기는 날에는 명륜당 위에서 기생의 풍악이 앞에 놓이고, 청금(靑衿)의 선비들이 둘러앉아 음란한 노래와 춤과 해학하는 말과 웃음으로 밤낮을 계속하는데, 스승의 자리에 있는 자도 역시 두렵게 여기지 아니하여 입을 다물고 금하지 아니하며, 다만 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술주정을 하며, 의복을 벗는 자도 왕왕 있다고 하니, 슬프다. 이것이 바로 풍교를 해치는 하나의 큰 사랑이라, 무릇 재(齋)라는 것은 정신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요, 명륜(明倫)이라는 것은 인륜을 밝힌다는 것이니, 이로 이름한 것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닌데, 지금 음란을 부리고 가무의 장소로 만든다면 너무도 무엄하지 않은가. 선왕(先王)의 사람 가르치는 방법에, “13세가 되면 악(樂)을 배우고 시를 외며 작(勺)춤을 추고, 15세가 되면 상(象)춤을 추고, 20세가 되면 대하(大夏)춤을 추며, 봄ㆍ여름에는 예악을 배운다.” 하였으니, 이는 다 재계(齋戒)하고 명결(明潔)하게 하는 일이지, 어찌 일찍이 세속의 남녀가 서로 만나서 금수의 행위와 같이 하는 것을 낙으로 삼게 한 것이랴. 더구나, “정성(鄭聲 음탕한 음악)을 내치라.”는 것은 공자께서 안연(顔淵)의,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물음에 답해 준 것이 아닌가. 지금 석전제 날에 정(鄭)ㆍ위(衛)ㆍ상박(桑濮)의 요사하고 음란한 음악을 성묘(聖廟) 곁에서 잡혀서 되겠는가. 강학이 밝지 못한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모는 근일에 우리 당(黨)의 유식자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다 가슴에 분이 치미는 나머지에, “시골 풍속은 비록 졸지에 고치기 어렵지만, 학교의 습속이야 어찌 차마 그대로 둘 수 있느냐.” 하였다. 옛날 당 나라 태학생(太學生) 하번(何蕃)이 주자(朱泚)의 난을 당하자 의연희 육관(六館)의 선비를 꾸짖어 반역자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는데, 한퇴지(韓退之)가 그 용감성을 칭찬하였고, 또 옛말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활을 잘 쏘면 백 명이 활쏠 기구를 준비한다.” 하였으니, 본받는 자가 많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지금 여러 분 가운데 진실로 전일의 잘못을 인식하고, 유속(流俗)에 뛰어나서 그 조행을 바로잡고, 성리(性理)의 학을 강구하고 그 친구와 향당(鄕黨)을 권유한다면, 곧 오늘의 하번(何蕃)이요, 오늘의 활 잘 쏘는 자일 것이니, 학교의 선비가 쏠리는 듯이 따라와서 다투어 활 쏠 기구를 준비하게 될는지 어찌 알며, 또 한 고을 사람이 감화되어 모두 효제충신의 행실에 힘쓸는지 어찌 알리오. 인간의 원리원칙은 예로부터 없어지지 않으며, 변화하는 묘리는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나 소리에 응하는 메아리보다 빠른 것이니, 여러 분은 부족하다고 자처하지 말고 힘써야 할 것이다.
어느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임금의 명을 받아 정화(政化)를 선양하는 것은 원님의 직책이요,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밝히는 것은 교관(敎官)의 임무이다. 그대는 그 책임이 없는데 이와 같이 역설을 하니, 비록 부지런하긴 하지만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원님이나 교관은 그 정사나 교화가 아무리 좋아도, 육기(六期)나 삼기(三期 임기任期) 밖에 시행되지 않는 것이며, 또 전에 잘한 것을 뒤에 계속하는 일이 적지만, 나는 고을 안에서 하나의 원로요 사문(斯文)의 한 선배이니, 여러 분과 더불어 매년 봄ㆍ가을로 향사(鄕射)나 향음(鄕飮), 양로(養老)의 의전(儀典)에서주선하고 수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棺) 뚜껑을 덮기 전까지는 모두 내가 잘하도록 책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겠으나 털끝만큼이라도 인의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한 번 두 번 내지 세 번 동안에 어찌 송구한 생각이 나서 흡족히 따르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그대 말이 그럴듯하다.” 하므로, 드디어 아울러 기록하여 고하노니 여러 분은 양해하시기 바란다.
[주-D001] 체동(螮蝀) :
무지개의 이칭(異稱)이다. 무지개는 천지의 음기(淫氣)가 뭉쳐서 된 것이므로 사람의 변사(變邪)에 비하였다. 《詩經 鄘風》
[주-D002] 향사(鄕射)나 …… 의전(儀典)에서 :
향교(鄕校)에서 향사례(鄕射禮)ㆍ향음주례(鄕飮酒禮)ㆍ양로연(養老宴) 등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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