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尙州)가 낙수(落水)의 상류에

2022. 9. 16. 10:35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DCI]ITKC_BT_1365A_1440_010_0070_2002_011_XML DCI복사 URL복사

김종직(金宗直)

 

상주(尙州)가 낙수(落水)의 상류에 있어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은 동남에서의 한 커다란 도회(都會)였다. 중국의 정치적인 손님과 일본의 공을 바치는 사신들이 줄로 잇게 오가는 것이었다. 대체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자는 3분의 1이 못 되고 모두들 관현(管絃)을 지나쳤으므로, 이 고을이 그들이 복주하는 교차 지점에 있는 만큼, 의당 높고 굉걸한 누각이 있어서 그 의식에 말맞고 첨시에 장하게 할 것이요, 햇빛을 가리어 더위를 잊을 만큼 하여야 함이니, 이것이 곧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전하(殿下) 18년 정미년 봄에, 순창(淳昌) 설공(薛公) 순조(順祖)가 이 고을 원이 되어, 이 다락의 지붕과 마룻대가 흔들리고 기울어지며, 난관과 설주가 비뚤어져 기와는 처마 끝에 나부끼고 비는 벽에 들이쳐 단청과 도벽이 씻겨 희미해져서, 오르는 자 관현악을 베풀기도 전에 더러운 빛이 드러나므로 개연히 준수하고자 하였었다. 그해 가을에, 통판(通判)고양(高陽)신후(申侯)질(礩)이 뒤를 이어 이르러서 의논이 합하매, 그 다음해 봄에, 농무(農務)가 시작되기 전에 재목을 모아 성중에 실렸더니, 가을 9월에 이르러서 옛집을 뜯고 그 크기를 넓혔으나, 겨우 30여 일 만에 연장과 흙손을 쉬게 되었었다. 이 다락의 굉창(宏敞)과 화려함에 대적할 것이 없고, 성과 못, 거리와 동네가 모두 덕색(德色)이 있고, 무릇 경내(境內)의 산천으로서 진(鎭)이 되고 침(浸)이 될 만하여, 그 높고 깊음이 더 하여진 듯 싶었다. 설공이 이에 나의 벗 그 고을 교수(敎授) 주군(周君) 윤창(允昌)을 시켜, 글월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 쓰기를 청하였었다.

내 이 고을의 옛일을 상고하건대, 원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에 관사를 중수하여 위치가 알맞게 한 이는 목사(牧使) 김영후(金永煦)였고, 그 기문을 지은 이는 근재(謹齋)였다. 명 나라 홍무(洪武) 경술년(庚戌年)에 관사의 동편을 열어서 새 정자를 그 땅에 세운 이는 목사 김남득(金南得)이었고, 이름을 풍영(風詠)이라 하며, 또 기문을 쓴 이는 목은(牧隱)이요, 시를 쓴 이는 도은(陶隱)이었다. 그러다가 경신년(庚申年) 병화에 정자가 역시 타버리고 얼마 안 되어 그 옛터에다가 정자를 다락으로 바꾸어 세운 이는 목사 송인(宋因)이요, 기문을 쓴 이는 양촌(陽村)이었던 것이다. 이제 설공이 이 다락을 중신하매 그 제도나 공정이 족히 두 김씨와 송씨에 추배(追配)할 수 있겠으나, 다만 그 가문을 짓게 된 자가 네 선생의 제자에도 나란히 할 수 없으니, 그 일을 어찌 하면 좋을까. 옛날 한퇴지가 등왕각(藤王閣)의 기문을 쓸 제, 그의 글이 세 왕씨(王氏)의 다음에 진열된 것을 영광으로 삼았더니, 내 이제 억지로 네 선생의 뒤에 있는 것은 반드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될지니, 장차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거늘, 어찌 이른바 영광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설공의 부탁이 그만두지 않을 것이므로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그 경개를 서술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노래를 부르기를, “배와 수레가 모여듦이여, 네 거리의 용충이었다. 관개(冠蓋)가 바퀴를 잇달음이여, 이방 사람이 바람처럼 밀리누나. 이 다락이 없었다면 연호(宴犒)하고 의탁할 곳이 어디던고. 뉘라서 뜨거움을 잡고서 곧 물에 씻지 않으리요. 상산(商山)이 창창함이여, 낙수(落水)가 흐르누나. 앞의 일을 이음이여, 높은 집이 구름에 솟았구나. 청락(淸洛)이 얽히었고 상안(商顔)이 높았도다. 순창의 뒤를 이어서 유구토록 깎이지 않으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