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은 평양과의 거리가 1000여 리로, 오히려 곧바로 운반하여 판매한다면

2022. 11. 20. 13:56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營口縣

 本文

舊名沒溝營。爲鎭海營駐紮地。故有東西營子之稱。地當遼河出海之口。故又曰營子口。簡稱曰營口。清同治五年。設營口海防同知。宣統初析海城蓋平兩縣地。改置直隸廳。民國初改縣。舊屬奉天遼瀋道。今屬遼寧省。地當遼河口左岸。爲全省之咽喉。南滿鐵路與北寧鐵路之支線。交會於此。清咸豐八年。中英續約允開牛莊爲商埠。十年移此。故亦沿稱爲牛莊。市街分二部。東爲東營子。係外國租界。西爲西營子。係我國商民薈萃之地。滿洲著名之大豆豆油豆餅等。皆由此輸出。夏日貿易甚盛。惟河口淤淺。冬季有三閲月以上之冰期。故商業已漸移於大連灣。

 
흠명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欽命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2품함 보용도(補用道) 원(袁)이 조회(照會)를 보내는 일
살피건대 올해 3월 4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으로부터 찰(札)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2월 24일, 조선국왕으로부터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귀 대신으로부터 자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이를 받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지시하여 검토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곧바로 통리아문 민종묵(閔種默) 등의 계()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는 의주(義州)ㆍ관동(關東)과, 북쪽으로는 원산 항구와, 남쪽으로는 한성 및 인천 등 통상하는 각 지역과 모두 50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곳에 항구를 추가로 설치한다면 이미 개항한 각 항구, 각 해관과 지세가 가까워 상무가 나누어질 것이니 장차 반드시 손해되고 절감되어 날마다 형세가 불황이 될 것입니다. 추가로 한 항구를 개설함으로써 각 항구가 모두 그 해를 입는다면, 이는 멀리 경영하는 방법이 아닐 것인데, 하물며 추가로 개설하는 항구 또한 충분히 흥성할 것이라 보장하기 어려울 바이겠습니까. 우장은 평양과의 거리가 1000여 리로, 오히려 곧바로 운반하여 판매한다면 세수가 줄어들까 걱정인데, 하물며 이곳으로부터 50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해관과 항구가 한두 곳이 아님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중국의 지명에 따른 위치및 거리는 계속해서 바뀝니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9년 임오 > 2월 17일 > 최종정보

고종 19 임오(1882) 2 17(계유) 맑음

19-02-17[22] 희정당에서 문의관을 소견할 좌부승지 윤상만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구(寧口)에서 천진(天津)까지는 며칠 일정인가?”
하니, 이조연이 아뢰기를,
“배를 타면 이틀 거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배로 출발하면 내일 저녁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조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홍장(李鴻章)이 우리나라의 일을 위하여 진심으로 주선을 해 주었는데, 지금 또 영선사 일행을 편안하게 잘 접대해 주었다. 일찍이 동지사 편에 감사의 뜻을 표하였으나, 너희가 만나게 되면 역시 감사의 뜻을 표하도록 하고, 또 예부(禮部)에도 감사의 뜻을 전하도록 하라.”
하니, 어윤중이 아뢰기를,
“삼가 마땅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진을 왕래하는 데 육로로는 40일 거리라고 하던데, 수로로는 절반이면 갈 수 있겠다. 하지만 어느 때에 돌아올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문의관(問議官)이 비록 당하관이라고는 하나 임무가 크고 책임도 막중하니 일에 따라 선처하고, 먼 길을 무사히 잘 다녀오라.”
하니, 이조연이 아뢰기를,
“왕령(王靈)이 도우시어 아마도 아무 탈 없이 다녀올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어 문의관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28년 신묘 > 4월 3일 > 최종정보

고종 28 신묘(1891) 4 3(병신) 비가 오다 흐렸다

28-04-03[20] 건청궁에서 천진 주재 종사관을 소견할 동부승지 조민희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일 즉시 출발하는가?”
하니, 변석운이 아뢰기를,
“마침 배편이 있어서 당일에 출발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천(仁川)에서 천진(天津)까지는 며칠이 걸리겠는가?”
하니, 변석운이 아뢰기를,
꼬박 3일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대(煙臺)와 영구(營口)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되는가?”
하니, 변석운이 아뢰기를,
600여 리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연대와 상해(上海)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멀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선의 상인들이 상해에 많이 있는 관계로 매양 객관(客館)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아직은 경영하고 관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천진 주재 대원(大員)과 천진 주재 종사관의 경우는 뒤따라 파견할 것이니, 모두 이러한 사유로 미리 통보해 주도록 하라.”
하니, 변석운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와 같이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노력하여 잘 다녀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천진 주재 종사관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물러나왔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9년 임오 > 4월 26일 > 최종정보

고종 19 임오(1882) 4 26(신사맑음

19-04-26[23] 희정당에서 문의관 이조연을 소견할  동부승지 조충희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진에서 상해(上海)까지 몇 리나 된다고 하던가?”
하니, 이조연이 아뢰기를,
“천진에서 연대까지 천여 리이고, 연대에서 상해까지 4천 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천에서 천진까지 1천 8백 리라고 하던가?”
하니, 이조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진은 황하수(黃河水) 근처인데, 그 근원은 태액지(太液池)에서 나오는가?”
하니, 이조연이 아뢰기를,
“천진하(天津河)가 북하(北河)인데 소고(小沽)ㆍ대고(大沽)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바다 어귀로 흘러 들어가서 통주(通州)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28년 신묘 > 5월 15일 > 최종정보

고종 28 신묘(1891) 5 15(무인) 맑음

28-05-15[26] 효모전 재실에서 평안 감사와 천진 주재 종사관을 소견할 동부승지 조만승 등이 입시하여 평안도의 실정과 압록강 주변의 고을에 대한 정사를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양(南洋)과 북양(北洋)의 거리는 몇 리쯤 되며, 전보(電報)는 서로 통하던가?”
하니, 김상덕이 아뢰기를,
“남양과 북양의 거리가 4000리 가량 되는데도 전선만으로 신기하게 전보가 통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것은 직접 목격한 것만 못하니, 신이 감히 분명하게 답해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고전번역서 > 운양집 > 운양속집 제1권 >  > 최종정보

운양속집 1 / (보유(補遺)를 붙이다.

보정성서에서 이소전 중당 홍장  알현하다〔保定省署謁李少荃中堂 鴻章 보유(補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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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넓은 보정성서에 밤 깊어 가는데 / 省署潭潭夜色遲
청사(廳舍)의 줄지은 촛불 얼굴에 비추네 / 高堂列燭照鬚眉
평회 사업 이십년 공적 / 平淮事業卄年績
도성에 남겨진 명성을 사해가 다 아네 / 留洛聲名四海知
먼 곳 사람 예우하여 격식은 너그럽고 / 禮遇遠人畦畛坦
번복의 위태로움을 깊이 걱정하네 / 憂深藩服綴旒危
하구에 얼음 풀리면 주둔지를 옮겨가 / 氷開河口應移節
새봄에 장수 축원하는 의례 거행하려 한다네 / 更擬新春捧壽巵

소전(少荃)은 현임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직례총독(直隷總督)을 겸직하고 있다. 겨울에 얼음이 꽁꽁 얼어 보정부(保定府)에 주둔하고 있는데, 얼음이 풀리면 해선(海船)이 나루를 통과하여 천진에 주둔할 것이다. 내년은 소전의 나이가 육십이라, 속관(屬官)이 헌수(獻壽) 하례를 할 거라고 한다.

 

27th. Sunday. Shanghai
The voyage from Hong Kong to Shanghai proved to be one of the smoothest we have had. The first day, our S.S. actually made  345 miles.    All is well that ends well!
Reached Woosong at 4 p.m. Two hours later, the steam tug landed us on the Bund of Shanghai. When I got through with looking after my baggages etc, it was nearly 8 when I found myself in the To Wa Yo Ko (the Japanese hotel.)
<4권 341>
 
 

3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한국사료총서 번역서3) > 1896년(조선 개국 505년, 고종 33년, 병신년) > 12월 > 27일 《일요일》

27일 《일요일》

상하이. 홍콩부터 상하이까지의 항해는 가장 순조로웠다. 첫 날 우리의 배는 실제로 345마일(약 555킬로미터)을 항해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오후 4시에 우송(吳淞)에 도착했다. 2시간 뒤 증기 예인선이 우리를 상하이 항구에 내려놓았다. 내 짐가방들을 주의하며 나가다 보니 거의 8시가 되어 일본 호텔 토와 요코(To Wa Yo Ko)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