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의 물살이 몹시 험한데 큰 배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2022. 11. 19. 14:14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출전   ㆍ『일성록』 고종 16 윤3월 23

사료 고종시대사9   >   1879년(고종 16년) 윤3월 23일   >   충청 병사 윤석구, 개항장 부지 선정을 위한 측량에 편의 제공을 요구하는 일본인에게 협조하고 탐문한 내용을 보고함

기사제목 충청 병사 윤석구, 개항장 부지 선정을 위한 측량에 편의 제공을 요구하는 일본인에게 협조하고 탐문한 내용을 보고함
연월일 고종 16년(1879년, 淸 德宗 光緖 5年, 日本 明治 12年) 윤3월 23일  

충청 병사(忠淸兵使) 윤석구(尹錫九)가 이양선(異樣船)을 문정(問情)한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비인현(庇仁縣) 월하포(月下浦)에 이양선이 정박하고 있는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치보(馳報)하였습니다. 그런데 비인 현감(庇仁縣監) 홍용주(洪用周)가 이번 달 16일에 보내온 첩정(牒呈)에 따르면,

‘어제 오시(午時)에 일본인들의 종선(從船)이 월하포에서 건너와서는 이내 뭍에 내렸는데, 동래부(東萊府) 장교(將校) 김채길(金采吉)과 사령(使令) 김희수(金希水)가 작년 8월에 왔던 일본인 천산현장(淺山顯藏, 아사야마 겐조)과 다른 일본인 1명을 이끌고 함께 하처(下處)에 와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답하여 말하기를,

「그간에 별 일 없으셨습니까?」

하였더니, 그도 말하기를,

「별 일 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어서 함께 온 사람의 성명을 물었더니, 답하기를,

「나카노 교타로(中野許多郞)입니다.」

하였습니다. 일본인 천산현장이 말하기를,

「작년 가을에 적잖이 폐를 끼쳤는데,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무슨 폐를 끼쳤다고 그러십니까. 새벽에 종선이 오면 요청하신 땔감과 물을 바로 맞추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배들이 마침 고기를 잡으러 각처에 흩어져 있어 지금은 남아있는 배가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하였습니다. 교타로(許多郞)가 말하기를,

「저희가 나온 상황에 대해 동래부에서 보내 온 공문이 있었습니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신칙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허다랑이 말하기를,

「작년 가을에 왔을 때는 수심을 측량함에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한산(韓山)·강경(江鏡)·군산(群山) 등지로 가고자 하오니, 귀읍(貴邑)에서는 각 고을에 먼저 통지하여 길을 알려주고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사항에 대해 각별히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마땅히 그렇게 시행하겠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강경의 물살이 몹시 험한데 큰 배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하였습니다. 겐조(顯藏)가 말하기를,

「화륜 종선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

라 하고, 이내 협대(夾帒) 안에서 한 폭의 지도를 꺼내었습니다. 강경의 물길과 육로를 지도를 따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과연 이러합니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제가 직접 다녀 본 곳이 아니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현장이 말하기를,

「길을 알려줄 사공 1명을 뽑아서 보내 주시면 우선 물길을 물어보고 품삯도 마땅히 마련해서 주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어찌 품삯을 따지십니까.」

라 하고 이내 사공 1명을 불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허다랑이 둘로 나뉘어진 백지 한 장을 가지고 뜰로 내려와 곧바로 사공과 마주 앉아서는 목필(木筆)로 종이 위에 선을 그어가며 수로가 굽은 모양을 그리고 획을 그은 옆에는 잇달아 지명과 리수(里數)를 써서 현장에게 주었습니다. 현장은 한 첩책(帖冊)을 꺼내어, 각 장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첩지(帖紙) 1장에 획을 옮겨 그렸습니다. 서천(舒川)·개야도(開也島)·장암(長巖)·한산(韓山)·두무치(豆無峙)·신아포(新鵝浦)·도리포(桃李浦)·지사포(芷沙浦)·임천(林川)·남당(南塘)·강경(江鏡) 등지를 상세히 물었는데, 쓰인 글자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뒷면에 장황하게 적어 놓은 말들은 여러 차례 접어서 따로 겉봉투를 만들었는데, 글자의 획이 어지러워 자세히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베껴 내기 위해 다시 보기를 청하였더니, 현장이 말하기를,

「이것은 함장에게 보내는 것이니, 베껴 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현장이 말하기를,

「고군산(古群山)까지는 뭍으로 가야 합니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군산(群山)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니, 뭍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또 말하기를,

「항구를 열 곳을 아직도 찾지 못하였습니까.」

하였습니다. 현장이 말하기를,

「수심을 측량하는 일이 아직 마친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허다랑이 말하기를,

「저희 두 사람은 뭍으로 서천까지 가려고 합니다. 교졸(校卒)과 견마잡이[牽馬]를 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뭍으로 가는 것에 대해 아직 묘당에서 신칙한 것이 없으니, 제가 마음대로 하락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말에 있어서는 잔약한 마을에 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더욱 허락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현장이 말하기를,

「저에게 제 다리가 있는데 어지 남이 길을 알려주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도보로 갈 것이니 종선은 지금 원선으로 돌려보내어 내일 장암에서 함께 수심을 측량하는 것으로 기약할 것이니, 이문(移文)으로 먼저 통지하는 것이 가장 급박한 일입니다. 각 고을에 보낼 이문을 속히 써 내서 오늘 안으로 서천·장암 두 곳에 먼저 통지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고 이어서 연해안의 고을들을 가리키며 임천·한산·은진 세 고을에도 이문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문을 빨리 써서 내어줄 것을 독촉하였는데, 제가 말하기를,

「뭍으로 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하자, 현장이 말하기를,

「이미 조약에 정해진 법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까. 말은 이미 없다고 하였으니, 짐꾼 1명을 따로 뽑아서 보내 주시고, 이것도 어렵다고 한다면 어지간한 짐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라며 동래부의 이문을 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았더니, 뭍에 올랐을 때의 지도(指導)를 거절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교졸과 짐꾼은 내어 주었으나 말은 기르고 있는 것이 없어 내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굳이 마음을 괴롭게 하며 뭍으로 가려는 것입니까. 만일 가는 길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은 저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현장이 말하기를,

「뭍으로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수심을 측량하는 것을 마치면 곧바로 경성으로 갈 것인데, 귀국 묘당에 일의 형세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두어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부득이 그가 요청하는 대로 장교를 따로 뽑아서 함께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현장이 허다랑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관원은 연로하여 걸어갈 수가 없으니, 배를 타고 먼저 서천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배 한척에 선격(船格)을 갖추어서 내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내어 드려야지요.」

하고, 또 말하기를,

「함장께서는 작년에 오셨던 분입니까?」

하자, 그가 써서 보여주기를,

「큰 배는 함명(艦名)이 다카오마루(高雄丸)이며, 함장은 아오키 주신(靑木住眞)입니다. 조금 작은 배는 함명이 호쇼 함(鳳翔艦)이며, 함장은 야마사키 하게노리(山崎景則)입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경성에는 언제쯤 가게 될 것 같습니까?」

하였더니, 허다랑이 말하기를,

「수심을 측량하는 일을 마치면 바로 갈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큰 배를 문정(問情)하는 것을 빠트릴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현장이 말하기를,

「수심을 측량하는 것에 대해 이미 조약 안에 있는데, 무슨 문정을 한단 말입니까.」

라고 하였는데, 현장이 질리고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원선(元船)이 저렇게 크다면 수백 명도 들어가겠군요.」

라고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큰 배는 200명이 타고, 작은 배는 100명 미만입니다.」

하였습니다. 허다랑이 말하기를,

「저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으로 유입된 귀국 사람입니다. 허(許)는 귀국에 있을 때의 본래 성이고, 일본에서의 성은 나카노(中野)입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본래 어느 지역에 살았습니까?」

하였습니다. 허다랑이 말하기를,

「어릴 적에 나라를 떠나, 부모가 살아계시는지도 알 수 없는데, 살던 곳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허다랑이 말하기를,

「친척도 이미 끊어졌는데 다시 무엇을 그리워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밥과 닭을 대접하자, 두 일본인이 다 먹었습니다. 허다랑은 우리 배를 타고 떠났으며, 종선은 선격들을 시켜 돌려보냈습니다. 현장이 점문(店門)을 나오다가 마침 지나가는 관단마(款段馬)를 보고는 말이 있는데도 말이 없다고 한 줄로 여기고 몹시 성을 내었는데, 이러다가는 소란을 일으킬 기세라 어쩔 수 없이 수레에 실어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파견된 동래 장교가 와서 전하기를, 저들의 배에 찬거리가 없으니 달걀을 조금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20개를 사서 허다랑에게 내어 주면서 현장이 뭍으로 가고 있는 종적을 캐어 보았더니, 3경에 현 경계를 지났습니다.’

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정황을 계속해서 치보하겠습니다.”

하였다.

출전   ㆍ『일성록』 고종 16 윤3월 23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36년 기해 > 4월 18일 > 최종정보

고종 36 기해(1899) 4 18(을미양력 5 27맑음

36-04-18[10] 함녕전에서 전주를 봉심한 궁내부 대신을 소견할  비서원  박돈양 등이 입시하여 봉심한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주(全州)에서 가까운 곳의 뱃길은 모두 몇 곳이고 어디에서 탔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군산(群山)과 강경(江鏡) 등의 포구에서 전주까지의 거리가 모두 200리인데, 군산에서 탔습니다.”

하였다. 상이 봉심한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번암집 3 / ()○단구록 (丹丘錄上)

홍주에서 이틀 밤을 자고 강경 쪽으로 길을 잡다〔信宿洪州 路由江鏡

여행길의 더위와 누런 먼지를 / 鞍馬炎塵色
바람이 시원하게 씻어 주누나 / 湖風一灑然
나락은 들 햇살에 익어 가는데 /
薰野日
선박은 마을 향해 다가가도다 / 船舶控人煙
가을 맞은 포구에는 장이 붐비고 / 浦市秋逾盛

무지개다리 위엔 석양이 곱네 / 橋虹晩更鮮
어부와 나무꾼의 분주한 기상 / 漁樵紛氣象
갠 날을 기뻐하며 노래하누나 / 歌笛喜晴天

[-C001] 단구록(丹丘錄) : 

1743(영조19) 번암이 대과에 급제한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내려간 때부터 1747 8 익릉 별검(翼陵別檢)으로 제수되기 전까지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기간 동안 번암은 가끔씩 한양을 오갔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단성에서 보냈고, 1746년에는 한양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9 무렵 일기청 낭청으로 차출되어 대궐에 입직하였다. 원래 단구(丹丘)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지명으로, 번암은 단성(丹城)자가 단구의자와 같은 것에 착안하여 단성을 단구라고 불렀다.

 

번암집 4 / ()○단구록 (丹丘錄下)

강경에서 머물다〔次江鏡

[DCI]ITKC_BT_0543A_0080_010_0770_2018_002_XML DCI복사 URL복사

길 위에서 달이 차고 이지러져도 / 圓缺途中月
아직까지 나는 집에 닿지 못했네 / 吾猶未及家
빈 하늘은 들판을 덮고 있는데 / 天空蓋田野
산은 멀리 전라도에 이르렀어라 / 山迥到全羅
기러기는 찬 강에서 방향을 잃고 / 客鴈迷寒渚
장삿배는 노을 아래 돛을 내렸네 / 商帆駐暮霞

다듬이질 소리가 숲을 흔드니 / 砧聲搖萬樹
서울 같아 억지로 웃어 보노라 / 剛喜似京華

 

 > 한국문집총간 > 연경재전집 > 硏經齋全集外集卷六十四 > 雜記類 > 최종정보

硏經齋全集外集卷六十四 / 雜記類

名塢志 a278_178a

[湖西]

恩津之江景浦。在縣西二十六里江景山下。爲錦江南一都會。山於野中。臨江斗起。二大川橫其背。江通海潮村無井埋瓮於地。汲江水貯之。久而愈洌。可已瘴疾。地旣膏沃宜稉稻。又商賈通四方之貨。人民櫛比。多富饒家。市肆繁華。有京都之風。每春夏漁採時。魚腥盈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