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위수(渭水)와 낙동강의 세 나루를 끼고서 높이 성을 쌓아 죽음으로써 굳게 지켰더라면

2022. 11. 19. 08:58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조선왕조실록 > 정조실록 > 정조 15년 신해 > 9월 19일 > 최종정보

정조 15 신해(1791) 9 19(신묘)

15-09-19[03] 사직 신기경이 여러 가지 시무책에 대해 상소하다

우리 나라의 군현에 관한 제도는 혹은 지형에 따르기도 하고 혹은 요충지에 따르기도 하여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리는 형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폐단이 매우 심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소망에 따라서 바로잡았으니, 영양(英陽)과 순흥(順興) 등의 고을이 그런 경우입니다. 옛 영풍현(永縣)은 안변(安邊)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안변과의 거리가 수백 리인데, 높은 산이 빙 둘러 있고 중앙에는 큰 들판이 열려 있어 수천 호의 주민들이 매우 부유하게 살지만 관부(官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원통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책을 묘당에 물어 선처하소서.

옛날의 밀성현(密城縣)은 상주(尙州)와 예천(醴泉) 사이에 있었는데, 어느 때 혁파해서 상주에 속하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또 단밀(丹密) 등 네 면(面)을 나누어 상주에 붙이고, 다인(多仁) 등 네 면은 예천에 소속시킴으로써 두 고을의 소재지까지는 거리는 다 백여 리나 되는데, 그 여덟 면에 사는 사람들은 7천 호로 토양이 비옥하고 마을이 흥성하며 고을 소재지였던 옛터와 관리의 자손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형으로 말하면 예천이 다인과는 용궁현(龍宮縣)을 넘어서 삼강(三江)이 그 사이를 갈라 놓고 있으며, 단밀이 상주와는 거리가 매우 떨어져 있고 두 강이 그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요충지로 말한다면 동래부(東萊府)로 통하는 직로(直路)가 전부 이 두 경계 사이에서 모이니, 진정 한 지역의 요충지입니다. 비안(比安)ㆍ함창(咸昌)ㆍ상주ㆍ예천과의 거리는 거의 2백 리에 가까운데, 공연히 텅 비어 있습니다. 과거 임진 왜란 당시 왜적들이 승승장구한 것도 이 길에 가로막고 지키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당시 미리 한 군을 설치하여 견고한 만경(萬景)과 비봉(飛鳳) 두 산으로 차단하고 험난한 위수(渭水)낙동강의 세 나루를 끼고서 높이 성을 쌓아 죽음으로써 굳게 지켰더라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처참하게 돌파하여 유린할 수 있었겠습니까. 밀성현의 읍을 복구하고픈 소망은 모든 백성들이 한 입처럼 말합니다. 백성들의 심정이 이와 같으니, 비록 약간의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어찌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D001] 황정(荒政) :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

[-D002] 몰기자(沒技者) : 

한 가지 기예에서 만점을 받은 자.

[-D003] 둔아병(屯牙兵) : 

둔전을 지키는 병사.

영조 4년 무신(1728) 7 23(임신) 비가 옴

상주(尙州)의 사대부들이 사승(寺僧)을 침범하여 포학한 짓을 하였습니다.

............  낙양(洛陽 상주)의 역마(驛馬)의 경우에는 규정을 어기고 함부로 타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또 그의 종으로 하여금 소를 도살하게 하고 우세(牛稅)를 거두어들였으니 이것은 마땅히 본도에서 처결해야 합니다

 

소모사실(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11권)  >   소모사실 제이   >   1895년 1월 25일 각 역의 도장리에게 전령을 보냄

1895 1 25  역의 도장리에게 전령을 보냄

25일. 각 역의 도장리에게 전령을 보냄[同日傳令各驛都掌吏處]

작년 12월에 상주 고을의 가겟집에 대령시켜 두었던 각 역의 역말 8필의 사료 값 합계 148냥을 각 역의 형편을 생각하여 본 소모영에서 액수에 준하여 지급하였으니, 앞으로 만약 이를 빙자하여 징수하는 폐단이 있으면 즉시 본 주(州)에 보고하여 엄중하게 다스려 폐단을 막도록 해야 할 것이다.(낙동(洛東), 낙서(洛西), 낙원(洛原), 낙평(洛平), 장림(長林), 낙양(洛陽))

점필재집 문집 제2권 / 기(記)

풍영루중영기(風詠樓重營記)

[DCI]ITKC_BT_0066A_0250_040_0100_2003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상주(尙州)는 낙수(洛水)의 상류에 위치하여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하나의 큰 도회(都會)이다. 그래서 사명을 받들고 정사를 반포하는 빈객과 일본(日本)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고 가는 사신이 계속 줄을 잇되,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경우는 3분의 1도 못 되고 대부분이 관현(冠縣 문경(聞慶)의 고호임)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사방에서 폭주(輻湊)하는 중심지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의당 높고 웅장한 누각(樓閣)을 두어서 의형(儀刑)을 맞추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고, 높고 탁 트이게 하여 무더위를 제거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天佑俠(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24~25권)  >   山林と河流

山林と河流

山林と河流

路は次第に棉圃に入り、來れり、棉圃漸く盡れば、竹林來る、竹林隱るれば松丘顯はれ、
乾坤益益翠色の加はるを見る、顧ふに慶尙道七十二州の中、靑山白雲、色彩相反映し
て風光を明媚にし、以て人目を慰むるの所は、東南に於て通度寺の棲鷲山林あり、西
北に於て鳥嶺秋風嶺、一帶の好松林あり、之を除くの外僅かに晉州附近の稍稍鬱蒼
たる綠林あるを見るのみ、其他は、皆是れ赭山禿峰、唯野草牧草の到處に繁茂するに
過ぎず。去ればこそ朝鮮の揚子江とも稱すバき此道の洛東江も、其流域百里に垂
んたるに拘らず、近年歲を逐ふて土砂溢流し、漸次河底を高め來り、今は河口より四
五十里の上流洛東津まで、滿水の節、辛ふじて舟運の便を得るに過ぎず、更に小滊船
の如きに至つては、河口を遡ぼる三四里以上に往來する能はざる現況なり、畢竟是 

れ山林培植、の大事を等閑に附せるに依る、朝鮮扶植を唱ふるもの、宜く先づ此經國
根底の策に留意せざるべからず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 > 잡기[雜記] > 순무사에게 보내는 답장[撫使前答錄]
....
본읍 곡화천면 덕지산에 사는 도사 구연준의 일.
삼가 말씀을 드려 원정(原情, 관아에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 호소하는 것)할 일은, 저는 서울의 삼청동(三淸洞)에 살며 과장(科場, 과거 시험)에 출입하는 것을 득실(得失)로 삼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을 허비하여 백발이 성성하고 형편이 다해서 문을 닫고 병으로 신음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삼청동은 궁궐과 너무 가까워서 6월의 여름에 유독 놀라운 《일을》 겪어 온 동네가 텅 비어 혼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8월에 가솔(家率)을 끌고 양자강(楊子江, 한강을 가리키는 듯)에서 배를 빌려 교남(喬南, 喬桐島의 남쪽)과 심북(沁北, 강화도의 북쪽)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여러 번 파도를 겪어 모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