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5. 20:33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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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25권 / 서(書)
안백순의 문목에 답하는 편지〔答安百順問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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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요동(遼東) 지방은 매우 광대해서 《성경통지(盛京通志)》를 상고해 보니 남북이 700여 리이고 동서가 1000여 리인데,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에 반드시 다투어 차지하고자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 하였던 오랑캐들은 언제나 동북 지역에서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라와 금나라의 멸망이 모두 중국의 땅에서 벌어졌으니, 그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서달(西㺚)이라고 불리는 족속은, 송나라 때에 영하(寧夏) 등의 지역이었던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의 변경에 자리하여, 항상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치성(熾盛)하여 남하(南下)한다면, 중국 사람들도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인심(人心)이 변할 것이니, 형세로 볼 때 반드시 동쪽으로 나와서 그들의 근거지로 귀속할 것입니다. 요(遼) 지역은 북쪽 지경이 몽고(蒙古)와 가깝고, 동쪽은 높은 산들이 하늘과 맞닿아 있습니다. 남쪽 아래로 봉성(鳳城)의 길만이 평탄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약 혹시 이쪽으로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양계(兩界)가 필시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이 일을 마음속으로 항상 궁금해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긴요한 일은 아닌 듯하지만 감히 이렇게 여쭙니다.
〔답〕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는 요수(遼水)로 경계를 삼습니다. 요수는 백두산의 내맥(來脈)에서 발원(發源)하는데, 그 이름이 장령(長嶺)입니다. 통가강(佟家江)도 장령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드니, 이른바 파저강(婆豬江)입니다. 이곳이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입니다. 금(金)나라의 경박호(鏡泊湖)와는 아주 먼데, 경박호는 장령의 동쪽에 있습니다. 요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습니다. 신라 말에 관할(管轄)할 수 없게 되자 발해(渤海)가 점거하였습니다. 발해는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너비가 3000여 리였습니다. 발해가 망하자 고려 태조가 그 지역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요 지역은 가곡(嘉穀)이 생산되지 않아서 오직 수수〔薥黍〕만 파종합니다. 장령의 안팎은 산천이 험준하여 수렵을 생계로 삼으니, 본래 살기 좋은 땅이 아닙니다. 근세에 천하의 전쟁이 동북 지방에서 많이 발생하여 한 번 흥하고 한 번 망하는 사이에 우리나라가 그 피해를 받았습니다. 발해가 망하여 귀속할 곳이 없자 모두 우리나라에 투항하였고, 요나라가 망하였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유린하여 참혹한 해를 입혔는데, 3년 만에 겨우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금나라 말기에는 포선만노(蒲鮮萬奴)가 그들의 소굴을 근거로 삼아 수시로 침략하였는데, 당시에 고려가 성심으로 원나라를 섬겼으므로 원나라의 강성한 힘에 의지하여 피폐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진(東眞)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상고할 바가 없습니다. 원 세조(元世祖) 때에는내안대왕(乃顔大王)의 잔당(殘黨)인 합단(哈丹)이 대거 침입하였는데, 원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소탕할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 말기에는 납합출(納哈出)이 침입하여 피해가 또한 심하였습니다. 명나라 초기에는 홍두적(紅頭賊)이 바다와 육지로 한꺼번에 침입하였습니다. 나라가 작고 힘이 미약하여 도적들이 피란하는 소굴이 되었던 사실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어찌 긴요하지 않다고 하십니까. ‘서달(西㺚)’이라는 것은 하투(河套)에 근거하였던 엄답(俺答)의 후예입니다. 봄에 듣자니, 중국이 8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러 간다고 합니다.
〔문〕 고려 말에 명나라를 섬길 것인지 원나라를 섬길 것인지에 대한 의논에 있어서, 그때 당시 누가 현명하였고 어리석었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고 잘못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각자 다르므로 다시 논할 것도 없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아직도 의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홍무(洪武) 초기에 명나라가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우리나라로 보내왔는데, 당시에 천하가 새로 평정되어 참람하게 임금의 자리를 도적질하는 무리가 여전히 있었으니, 외국에 과시하면서 농락하려는 술책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진우량(陳友諒)과 장사성(張士誠)과 같은 무리가 이러한 조서를 보냈다면, 또한 섬겨야 했겠습니까. 원나라가 비록 피폐해졌지만, 고려가 이전에 신하로서 복종했던 나라이고, 그들의 병력 또한 충분히 고려를 침략할 정도였으니, 고려 말에 당면했던 상황은 난처한 점이 있었습니다.
〔답〕 중화를 귀하게 여기고 이적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랬다저랬다 하였는데, 어찌 저들을 천하게 여기겠습니까.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 충렬왕(忠烈王) 이후로 베푼 은혜가 지극하였으니, 원나라가 쇠하였다고 배신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옛날 금나라의 속담에 “온갖 것을 다 길들일 수 있지만, 고려 사람만은 길들일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게 만듭니다. 진우량과 장사성이 명나라에 대하여 애초에 차이가 없습니다만, 의리로 본다면 장사성이 도리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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