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차하(三叉河)는 곧 요수(遼水)이다

2022. 9. 6. 10:41백두산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 사대전고(事大典故)

북경 가는 도로[赴京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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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으로 가는 도로는 서울로부터 의주(義州)까지가 1천 1백 86리(里)이고 수문쇄록(謏聞瑣錄)에는 1천 1백 40리로 되어 있다. 의주로부터 중국의 수도[皇都]까지가 2천 12리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중간을 동팔로(東八路) 백안동(伯顔洞)이라 하는데 세상에서는 원(元) 나라의 백안(伯顔)이 말을 머물렸던 땅이라고 전한다. 봉황성(鳳凰城)ㆍ금석산(金石山)ㆍ팔도하(八度河)가 모두 경유하는 곳이다. 요동은 큰 도회지가 되어 화표주(華表柱)ㆍ광우사(廣祐寺)ㆍ백탑(白塔)ㆍ망경루(望京樓)가 이곳에 있다. 백탑은 당 나라 장수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해주위(海州衛)는 관녕(管寧)의 구거(舊居)요, 안시성(安市城)은 요동에 있다고 말하나 지금 그곳이 어디인지 상세하지 않다. 안산(鞍山)은 곧 당태종(唐太宗)의 주필대(駐蹕臺)였고, 삼차하(三叉河)는 곧 요수(遼水)이니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고구려(高句麗)의 경계였고, 그 서쪽은 옛 요서군(遼西郡)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이요, 광녕(廣寧)은 또한 유주의 영역(領域)이다. 산 위에 성수분(聖水盆)이 있고 참의(參議) 하흠(賀欽)의 옛 터가 있다.산해관(山海關)은 요계(遼薊)의 목구멍[要害處]에 해당되고, 망해정(望海亭)은 그 모퉁이를 베고 있으니, 형세가 매우 웅장하다. 영평부(永平府)는 한(漢) 나라 때 우북평(右北平)으로 불리던 땅인데, 곧 이 장군(李將軍 이광(李廣))이 범을 쏜 곳이요, 난ㆍ하(灤河) 두 하수(河水)는 연미(燕尾)의 형상을 이루고, 하상(河上)에는 고죽성(孤竹城)이 있으며, 성 안에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묘(廟)가 있다. 옥전(玉田)은 옛날에는 무종(無終)으로 불린 땅으로서, 양옹(陽雍)ㆍ백종옥(伯種玉)이 살던 곳이다.계주(薊州)는 옛날에는 어장(漁場)으로 불렸는데, 성 밖에는 녹산교(祿山橋)가 있고, 성 안에는 독락사(獨樂寺)가 있으며, 절에는 여덟 개의 금부처가 있다. 공동산(崆峒山)은 황제(皇帝) 헌원씨(軒轅氏)가 도(道)를 묻[問]던 곳이요, 계문(薊門)의 연수(煙樹)는 연대 팔경(燕臺八景)의 하나이다. 황성(皇城) 안에는 시시(柴市)가 있는데, 이곳은 곧 문 승상(文丞相 문천상(文天祥))이 죽은 곳이다. 지금은 국자감(國子監)이 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무[薪]를 사던 곳이다. 황성의 동로(東路) 왼편에는 삼충사(三忠祠)가 있는데, 삼충(三忠)은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諸葛亮))와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과 문승상(文丞相)을 이른다. 황금대(黃金臺)는 황성의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한다. 《지봉유설》

○ 태종 9년 기축에 광록경(光祿卿) 권영균(權永均)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청 나라 임금의 칙유(勅諭)를 공경히 받들어 왔는데, 칙유에 이르기를, “이와 같이 다시 올 때에는 바다로 오지 말고 다만 육지로만 오라. 그리고 그곳 너희 나라로부터 오는 사신들에게 육로로 오라고 하라.” 하였다. 영균(永均)은 곧 북경으로 들어간 권씨(權氏)의 형이다. 《고사촬요》

○ 우리나라에서 조공(朝貢)가는 길은 만일 해주(海州)로 해서 광녕(廣寧)을 경유하지 않으면, 곧장 영원위(寧遠衛)로 가게 되는데, 오랑캐 땅에서 가깝다. 성종 경자년에 주청사(奏淸使) 한명회(韓明澮)는 북경에서 벼슬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의 원조를 얻어 여진(女眞)이 요격(邀擊)하고 위협하는 것을 이유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변경하는 일을 헌종(憲宗)에게 아뢰었는데, 병부(兵部) 항충(項忠)은 그 청을 허락하려고 하는데 직방낭중(職方郞中) 유대하(劉大夏)가 말하기를, “조선에서 조공오는 길은 아골관(鴉鶻館)으로부터 요양(遼陽)을 지나 광녕(廣寧)을 경유하고, 전둔(前屯)을 지나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3, 4회 큰 진(鎭)을 멀리 돌아오도록 되어 있습니다.이것은 조종(祖宗)의 은미(隱微)한 뜻이니, 만일 압록강에서 전둔(前屯)과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르게 되면 길이 너무 가까워서 아마 후일의 우환을 남길 것이니 경솔히 고칠 수 없습니다.” 하여 끝내 우리나라의 주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 《지소록(識小錄)》

○ 황명(皇明) 때의 진공 도로(進貢道路)는 의주로부터 출발하였다.

진강성(鎭江城) 20리(里) 본명은 구련성(九連城)인데, 만력(萬曆) 병신년에 유격부(游擊府)로 고쳤다., 탕참(湯站) 70리(里), 책문(柵門) 20리, 봉황성(鳳凰城) 20리, 진동보(鎭東堡) 40리 일명(一名) 설유참(薛劉站). 우리나라 사람들은 송참(松站)이라 부른다., 진이보(鎭夷堡) 60리 일명 통원보(通遠堡)다., 연산관(連山關) 70리 일명 아골관(鴉鶻關)이다., 첨수참(甛水站) 30리, 요동(遼東) 90리, 안산(鞍山) 60리, 해주위(海州衛) 50리, 우가장(牛家莊) 40리, 사령(沙嶺) 60리, 고평역(高平驛) 60리, 반산역(盤山驛) 40리, 광녕(廣寧) 50리, 여양역(閭陽驛) 30리, 석산참(石山站) 40리 속칭 십삼산(十三山), 소릉하(小凌河) 60리, 행산역(杏山驛) 38리, 영원위(寧遠衛) 50리, 조장역(曹莊驛) 15리, 동관역(東關驛) 50리, 사하역(沙河驛) 36리, 전둔역(前屯驛) 50리, 고령역(高嶺驛) 50리 이상은 관외(關外)다., 산해관 50리, 심하역(深河驛) 60리, 무녕현(撫寧縣)40리, 영평부(永平府) 70리, 사하역 70리, 신서(新書)에는 칠가령(七家嶺) 60리로 되어 있다., 풍윤현(豐潤縣) 1백리, 옥전현(玉田縣) 80리, 계주(薊州) 80리, 삼하현(三河縣) 70리, 통주(通州) 70리, 북경(北京) 40리다, 합계 1천 9백 79리이다. 《고사촬요》 《통문관지》

○ 강희(康熙) 기미년부터 지금의 길로 고쳐 정하였다. 바다의 방비를 염려하여, 우장(牛庄)에 보(堡)를 설치하고 드디어 공로(貢路)를 고쳤다.

요동(遼東)여기서부터 십리보(十里堡)에 이른다.십리보(十里堡) 간이 60리, 성경(盛京) 60리 본명은 심양(瀋陽)인데 강희(康熙) 신축년에 성경봉천부(盛京奉天府)라 개칭하였다., 변성(邊城) 60리, 거류하(巨流河) 40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류하(周流河)’라 불렀다, 백기보(白旗堡) 70리, 이도정(二道井) 50리, 소흑산(小黑山) 50리, 광녕(廣寧) 60리이다. 지금 길은 전의 길에 비하여 90리가 멀다. 《고사신서(攷事新書)》 《통문관지》

○ 광해(光海) 신유년 이후의 항해노정(航海路程)은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에서 발선(發船)하였다. 혹은 함종(咸從)을 경유해서 가고 혹은 안주(安州) 노강진(老江鎭)을 경유하여 간다.

철산가도(鐵山椵島) 60리, 거우도(車牛島) 1백 40리, 녹도(鹿島) 5백 리 이로부터 요동땅이다., 석성도(石城島) 6백 리, 장산도(長山島) 3백 리, 광록도(廣鹿島) 2백 리, 삼산도(三山島) 2백 80리, 평도(平島) 2백 리, 황성도(皇城島) 1천 리, 타기도(鼉磯島) 2백 리, 묘도(廟島) 2백 리, 등주(登州) 80리 이상은 해로(海路)인데 3천 6백 80리이다., 황현(黃縣) 60리, 황산역(黃山驛) 60리, 주교역(朱橋驛) 60리, 내주부(萊州府) 60리, 회부역(灰埠驛) 70리, 창읍현(昌邑縣) 80리, 유현(濰縣) 80리, 창락현(昌樂縣) 50리, 청주부(靑州府) 70리, 금령역(金嶺驛) 70리, 장산현(長山縣) 70리, 추평현(鄒平縣) 30리, 장구현(章丘縣) 60리, 용산역(龍山驛) 40리, 제남부(濟南府) 70리, 제하현(齊河縣) 50리, 우성현(禹城縣) 70리, 평원현(平原縣) 70리, 덕주(德州) 90리, 경주(景州) 60리, 부성현(阜城縣) 50리, 부장역(富莊驛) 40리, 헌현(獻縣) 40리, 하간부(河間府) 70리, 임구현(任丘縣) 70리, 웅현(雄縣) 70리, 신성현(新城縣) 70리, 탁주(涿州) 60리, 양향현(良鄕縣) 70리, 대정점(大井店) 50리, 경도(京都) 40리이다. 이상은 육로(陸路)인데 1천 9백 리이며, 합계 5천 6백 50리이다. 《고사촬요》 《통문관지》

인조 정묘년 이후로는 증산(甑山) 석다산(石多山)에서 발선(發船)하여 가도(椵島)에 이르렀는데 3백 리다. 《고사촬요》

○ 기사년에 가도(椵島)의 장수 모문룡(毛文龍)과 영원(寧遠)의 군문(軍門) 원숭환(袁崇煥)이 항로(航路)를 바꿀 것을 건의하여 영원위(寧遠衛)를 거쳐 육지에 올랐다. 촬요(撮要) ○이흘(李忔)이 사신으로 갔다온 뒤이다.

평도(平島)부터 항로가 갈려 여순구(旅順口) 40리, 철산자(鐵山觜) 40리, 양도(羊島) 80리, 쌍도(雙島) 40리, 남범구(南汎口) 5백 리, 북범구(北汎口) 1백 10리, 각화도(覺華島) 1천리, 영원위(寧遠衛) 10리이다. 이곳으로부터 육지에 오르고, 조장역(曹莊驛)에 이른 이후의 길은 앞의 것과 같다. ○《고사촬요》

항로를 변경한 뒤의 각화도의 수로는 거리가 등주(登州)의 배가 되고 경유하는 철취(鐵嘴) 일대는 큰 바다가 하늘에 잇닿고, 섬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다가, 암초(暗礁)가 많아 험악하기 비할 데 없다. 수년 사이에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이 5명이나 되고, 중국의 부험(符驗)과 표자(表咨)ㆍ방물(方物)도 아울러 모두 표실(漂失)하였다. 도수(島帥)가 죽은 뒤에 구금(舊禁)을 풀어 다시 등주(登州) 길을 따르게 하도록 임신년에 주청하였다. 《고사촬요》 《괴원등록(槐院謄錄)》

○ 월별로 폭풍이 일어나는 날 1월 9일ㆍ29일, 2월 7일ㆍ21일ㆍ29일, 3월 3일ㆍ7일ㆍ15일ㆍ23일ㆍ28일, 4월 1일ㆍ8일ㆍ23일ㆍ25일, 5월 5일ㆍ13일ㆍ21일, 6월 12일ㆍ24일, 7월 18일, 8월 18일ㆍ21일, 9월 9일ㆍ27일, 10월 5일ㆍ20일, 11월 14일ㆍ29일, 12월 24일에는 반드시 폭풍이 일어나고, 만일 그날 폭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전후 2일 사이에 폭풍이 있었다. 또한 대개 한 달 안에 기성(箕星)ㆍ벽성(璧星)ㆍ익성(翼星)ㆍ진성(軫星)의 날에는 주로 바람이 일어났다. 이것은 수로(水路)로 해서 중국에 입조하였을 때, 중국 사람들에게서 안 것인데, 우리 동방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맞는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