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공동산(空同山)과 경충산이 되고,

2022. 9. 5. 20:17백두산

조경일록(朝京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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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맑고 따뜻함.

해 뜰 무렵에 출발하여 범가장(范家莊)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유관(楡關)에서 유숙하였으니, 모두 70리쯤 갔다.

유관은 그저 하나의 큰 촌장(村莊)으로, 별다른 관문이나 방비는 없다. 대개 옛적에 느릅나무를 심어서 요새를 만든 지역이다. 진(秦) 나라의 장성(長城)이 여기에서 그쳤는데, 황조(皇朝)의 중산왕(中山王) 서달(徐達)이 증축하여 산해관 망해루(望海樓)까지 이르렀다.

유관의 북쪽에 황감산(黃坎山)이 있는데, 지극히 높고 크다. 두 줄기로 나뉘어 한 줄기는 동쪽으로 가서 각산(角山)이 되었으니, 이 산이 바로 산해관의 진산(鎭山)이다. 또 서쪽 줄기가 북으로 뻗어 회룡(回龍)이 되어 영평부(永平府)의 진산이 되었다. 대개 북경(北京)을 첫번째로 둘러싸서 보호하고 있는 산은 각산(角山)이고, 두 번째는 토이산(兎耳山)이고, 세 번째는 계주(薊州)의 경충산(景忠山)인데, 경충산은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이다.

백두산은 사류하(沙流河)의 정북쪽에 있는 산으로, 돌산이 눈처럼 희기 때문에 백두산이라고 한다.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공동산(空同山)과 경충산이 되고,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반산(盤山)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옥천산(玉泉山)이 되어 북경의 서쪽을 빙 둘러싸고 있다.

24 맑음.

무녕현(撫寧縣)을 지나 쌍망보(雙望堡)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영평부의 남문 밖에 이르렀으니, 대략 75리를 갔다. 먼저 온 수레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

영평에서 동쪽으로 18리 되는 곳에 있는 역참(驛站)의 길가에 파로비(破虜碑)가 서 있는데, 거기에 써 있기를, ‘제독(提督) 조공(祖公)이 이곳에서 노추(奴酋)를 크게 격파했다.’ 하였다.

영평부에서 동쪽으로 5, 6리쯤 되는 곳에 한(漢) 나라 때 이광(李廣)이 호랑이인 줄 착각하고 쏘았다고 하는 사호석(射虎石)이 있었으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겠다. 영평부는 바로 옛적의 우북평(右北平)으로, 이광이 일찍이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을 적에 이 돌을 쏘았다는 것이다.

동문 밖에 만류장(萬柳莊)이 있다. 고(故) 광록경(光祿卿)이원(李瑗)이 은퇴하여 이곳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경오년에 도적들이 그곳에 있던 버드나무를 몽땅 찍어 버려 한 그루도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만 옛 저택과 높은 누각만 남아 있었다. 드디어 올라가서 관람하노라니 광록경의 손자인 이경(李燝)이 와서 보고는 차를 내놓았다. 정원 안에는 다만 밤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서 낙엽이 뜰에 가득하였으며, 황폐한 채로 놔 두고 수축하지 않았다.

25 잠깐 흐렸다 잠깐 갰다 하다가 오후에는 비가 내림.

아직 어두컴컴할 때에 먼저 짐바리를 보내고, 서장관과 더불어 고죽성(孤竹城)으로 달려가 이제묘(夷齊廟)에 배알하였다.

사당은 부(府)에서 서북쪽으로 10리쯤 되는 난하(灤河) 가에 있는데, 경치가 아주 뛰어났다. 백이 숙제 두 분은 모두 소상(塑像)을 모셨고, 사당 뒤쪽에 높은 누각이 있는데 청풍루(淸風樓)라고 불렀다. 맑은 못을 내려다보니 낭떠러지가 100척(尺)이나 되었고, 북쪽에 작은 섬이 있는데 섬 가운데 고죽군(孤竹君)의묵태묘(墨胎廟)가 있다. 성에서 남쪽으로 몇 리쯤 되는 곳에 수양산(首陽山)이 있으니 바로 외로운 한 봉우리의 산이다.

출발하여 야계돈(野鷄墩)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사하역(沙河驛)신점(新店)을 지나 저녁에는 침자점(針子店)에서 유숙하였으니, 대략 90리쯤 갔다. 칠가령(七家嶺)을 지나는 길에 추관(推官) 경시연(耿始然)이 포를 감춰 두었던 곳을 보니, 목비(木碑)를 세워 기록하였다.

26 맑음.

판교점(板橋店)에서 점심을 먹고 일찍 풍윤현(豐潤縣)에 이르렀다. 대략 40리쯤 갔다. 어떤 선비가 역관들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북경으로부터 오다가 9월의 통보(通報)를 보니, 심 도독(沈都督)이 올린 제본(題本)에 ‘노적(奴賊)이 조선을 협박하여 공물(貢物)을 바치라고 하였으나 조선에서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다.”하였다.

27 맑음.

출발하여 고려촌(高麗村)을 지나 사류하보(沙流河堡)에서 점심을 먹고, 양가점(梁家店)을 지나 저녁에는 옥전현(玉田縣)에서 유숙하였다. 대략 70리를 갔다.

도중에 짐을 지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 보았더니, 노적들이 사로잡아 간 아이를 찾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행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혹은 찾고 혹은 찾지 못하여 눈물을 머금고 돌아오는 자가 서로 줄을 이었다. 또 길 곁 성문과 점포의 벽에는 곳곳마다 방문(榜文)을 걸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성명을 죽 써서 붙였으며, 돈을 걸고 찾는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길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관군(官軍)이 거의 20만 명이나 되면서도 도적의 뒤에 100리쯤 떨어져 오면서 끝내 싸워 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촌가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를 욕보이는 것은 달적(㺚賊)보다도 심하니,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다.

29 맑음.

나산점(羅山店)을 지나 별산보(別山堡)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계주(薊州)에 이르렀으니, 대개 60리를 갔다.

성 안에 독락사(獨樂寺)가 있다. 3층의 누각을 짓고 관음불(觀音佛)을 그 안에 세웠는데, 높이가 15, 6장쯤 되었으며, 금빛 단청이 찬란하였다. 또 와불(臥佛)이 중간층에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요(遼) 나라 때 세운 것이다.

계주 앞에는 하수(河水)가 있고 하수에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어양교(漁陽橋)라고 하였다. 계주는 바로 옛적의 어양군(漁陽郡)으로, 성지(城池)가 매우 웅장하며 지극히 부유하였다. 고두허(高斗墟)라는 자가 있어 금수(禽數)를 미루어 풀이하였으므로 불러서 운수를 물어 보았다.

11 2 맑음.

하점(夏店)의 옥황묘(玉皇廟)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때 통주강(通州江)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하수(河水)를 건넜는데, 삼하(三河)에 비하여 약간 컸다. 서문(西門)의 점사(店舍)에서 유숙하였다.

4 맑음.

저녁에 서장관과 함께 걸어서 성 북쪽으로 가 조하(漕河)를 구경하였다.

통주의 하수는 성 동쪽에 있는데, 성 북쪽으로부터 땅을 파서 물을 이끌어 들여 북경으로 통하는바, 수로(水路)의 길이가 거의 50리나 된다. 여러 성(省)에서 세금으로 받는 양곡이 모두 통주로 들어와 통주의 조선(漕船)은 무려 1000여 척이나 되는데, 주야로 북경에 오고 가고 하여 일찍이 쉬는 일이 없었다. 지세(地勢)가 조금 높은 곳에는 돌을 쌓아서 언(堰)을 만들어 물을 가두어 깊게 하였는데, 이것을 갑(閘)이라고 한다. 배가 갑 아래에 이르면 갑 위에 있던 다른 배가 교체하여 받아 싣고 간다고 한다.

5 흐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대통교(大通橋)를 건넜다. 다리는 통주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매우 높고 넓으며 아래에는 세 개의 홍문(虹門)이 있어서 조선(漕船)이 다리 아래로 통과한다.

동악묘(東嶽廟)에 이르러 조금 쉬었다. 동악은 바로 태산(泰山)의 신(神)이다. 도사(道士) 수십 인이 지키고 있으며, 구석구석에 방이 있는데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말할 수 없으며, 서화(書畫), 의자, 상, 향로, 경탁(經卓) 등이 정돈되고 정결하였다. 또 매화분, 난초분이 있는데, 그림 속의 것과 같았다.

조양문(朝陽門)에 이르니 환자(宦者)가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뇌물로 준 은이 적다는 이유로 들어갔다가 도로 쫓겨났으며, 은 10냥을 써 보인 뒤에야 들어가도록 허락받았다.

옥하관(玉河館)에 이르렀으나 제독 주사(提督主事) 하삼성(何三省)이 해가 넘어간 뒤에 비로소 와 문을 열었으므로, 황혼녘에야 들어가 관(館)의 동방(東房)에서 유숙하였다.

6 맑음.

보단(報單)을 홍려시(鴻臚寺)에 올렸다. 이날 밤에 처음으로 눈이 내리다가 새벽에 바로 갰다.

영원(寧遠)으로부터 조가장(曹家莊)까지가 15리이고, 사하소(沙河所)까지가 또 15리이고, 곡류하보(曲流河堡)까지가 15리이고, 동관역(東關驛)까지가 15리이고, 중후소(中後所)까지가 18리이고, 사하역(沙河驛)까지가 18리이고, 구아보(狗兒堡)까지가 15리이고, 전둔위(前屯衛)까지가 15리이고, 고령역(高嶺驛)까지가 15리이고, 중전소(中前所)까지가 15리이고, 산해관(山海關)까지가 30리이고, 범가장(范家莊)까지가 30리이고, 심하역(深河驛)까지가 30리이고, 유관(楡關)까지가 20리이고, 무녕현(撫寧縣)까지가 15리이고, 쌍망보(雙望堡)까지가 30리이고, 영평부(永平府)까지가 30리이고, 사하역(沙河驛)까지가 40리이고, 신점(新店)까지가 30리이고, 침자점(針子店)까지가 20리이고, 풍윤현(豐潤縣)까지가 40리이고, 사류하보(沙流河堡)까지가 35리이고, 옥전(玉田)까지가 35리이고, 별산보(別山堡)까지가 40리이고, 계주(薊州)까지가 30리이고, 방균점(邦均店)까지가 30리이고, 삼하현(三河縣)까지가 30리이고, 하점(夏店)까지가 30리이고, 통주(通州)까지가 40리이고, 북경(北京)까지가 40리로, 대개 700여 리가 된다.

산해관 서쪽의 지나온 주현(州縣)은 적병이 모두 침입하지 않았으며, 다만 촌락이나 야점(野店)이 혹 불타고 약탈된 곳이 보였다. 그러나 또한 많지는 않았으며, 주민들이 즉시 다시 수리하여 완연히 옛 모습과 같았다.

영평부의 동쪽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온통 들판이라 마을의 여염(閭閻)이 잇달아 있고 밥 짓는 연기와 등불이 서로 접하고 있었다. 산에는 한 치의 나무도 없었지만 들판에는 수목이 울창하여 숲을 이루었는데, 이 나무들은 모두 양류(楊柳), 백양(白楊), 대추, 밤나무의 종류로, 대추와 밤나무는 밭 가운데 줄지어 심어져 있어 먹줄로 친 듯 곧았다. 한 자 한 치도 묵은 땅이 없었는데, 논은 전연 없었고 단지 고려촌(高麗村) 앞에만 논 같은 것이 한 군데 있었다.

도로에는 상인과 나그네가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십여 명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 탄 것이나 짐 실은 것은 나귀가 아니면 노새인데, 큰 수레는 10여 두나 혹은 5, 6두가 끌고, 작은 수레는 2, 3두의 소나 나귀가 끌었다. 사람이 끄는 수레[輓輅]는 바퀴가 하나이며, 한 사람이 미는데, 짐을 실은 분량은 말 한 마리에 싣는 분량이었으며, 혹 실은 짐이 무거울 경우에는 앞에서 한 사람이 끌었고, 더 무거울 경우에는 나귀나 노새를 메워 끌되 앞에서 끄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몰았다.

가옥(家屋)은 모두 지붕을 흙으로 두껍게 덮었으며, 평평하게 해 놓았는데, 비가 와도 새지 않는다고 하며, 도적이 불을 질러도 쉽사리 타지 않고 또 연소(連燒)되는 걱정이 없다.

적병들은 내지(內地)에서 얻은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소굴로 돌아가기에 급하여 다른 성들을 돌아보지 않고 갔다. 그러나 통주(通州)와의 거리가 단지 3, 4리이고 황성(皇城)과의 거리가 겨우 7, 8리이므로, 침입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대단히 위태로운 일이다.

중국은 이교(異敎)와 음사(淫祀)를 몹시 숭상하여 촌락마다 반드시 절이 하나나 혹은 서너 개가 있는데, 이것을 묘당(廟堂)이라고 부르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향을 사르고 예배한다. 성 안에도 또한 묘당이 두어 군데 있으니, 영원(寧遠)에 있는 이른바 천평사(天平寺)라는 절은 바로 조 총병(祖總兵)의 원당(願堂)으로서 가장 크고 화려한데, 군문(軍門)과 태감(太監) 이하가 모두 가서 향을 사르고 예배하였다. 지나는 길 가의 성보(城堡)와 촌락에는 모두 묘당이 있었으며, 승도(僧徒)와 도사(道士)가 촌인(村人)들과 반반씩 뒤섞여서 나다녔다.

관왕묘(關王廟)는 ‘칙봉삼계복마대제묘(勅封三界伏魔大帝廟)’라고 하였는데, 어디에나 다 있었다. 또 옥황묘(玉皇廟), 현제묘(玄帝廟), 벽하군묘(碧霞君廟), 천비성모묘(天妃聖母廟), 서왕모묘(西王母廟), 화신묘(火神廟), 마신묘(馬神廟), 마명왕묘(馬明王廟), 태산행궁(泰山行宮), 삼관묘(三官廟) 등 명칭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조차도 없이 많은데,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다. 지나가는 행인도 들어가면 반드시 절하였는데,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러하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한 현관(顯官)들은 반드시 한길 가운데에 패루(牌樓)를 세우는데, 옛적에는 나무로 세웠으나 근래에는 돌로 만들어 세운다. 중앙에 정문을 세우고 좌우로 협문(夾門)을 달며, 위로는 삼층루(三層樓)를 만들어 그 사람의 성명을 써서 달되, 금물로 칠하여 메우고, 다섯 가지 채색으로 단청(丹靑)을 하였으며, 돌 위에도 채색을 입히고 괴이한 짐승과 진기한 꽃을 그렸다.

향환(鄕宦)의 집에는 각각 그의 직명을 써서 문 머리에 현판을 달았는데, 상서(尙書)니 태사(太史)니 천관(天官)이니 청쇄(靑鎖)니 좨주(祭酒)니 동장(銅章)이니 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모두 금빛과 푸른빛으로 글자를 칠하였다.

각 역(驛)이나 보(堡)에도 모두 성이 있고 큰 마을에도 또한 성이 있으며, 태감(太監)의 농장(農莊)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방형(方形)의 성을 쌓은 것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쌓았고 벽돌로 홍문(虹門)을 만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산에 장사지내지 않고 들판의 밭 가운데나 혹은 길가의 평지에 장사지낸다. 봉분(封墳)의 모양은 윗부분이 매우 뾰족하여 쑥뜸의 심지와 같이 생겼으며, 해마다 흙을 한 삽씩 떠다가 그 위에 덧붙이는데, 이것을 가토(加土)라고 한다. 이 때문에 더욱 높아지고 뾰족해지며, 잔디도 덮지 않는다.

사대부(士大夫)의 묘소는 사면에 담을 쌓고 앞에 문 하나를 내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도묘문(神道墓門)이다. 담장 안에 있는 봉분은 파[葱]가 서 있는 것과 같아, 많은 것은 수십 개이고 적은 것은 6, 7개인데, 백양나무와 노간주나무를 심었으며, ‘모관모인선영(某官某人先塋)’이라고 현판을 써서 달았다. 통주에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길의 좌우가 모두 묘문이어서 마을의 여염(閭閻)과 서로 섞여 있었으니, 길가에 있지 않은 것이야 또 어찌 능히 다 셀 수 있겠는가.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지전(紙錢)을 불태우므로 무덤의 표면이 많이 그을려 있었다. 또 붉은 종이로 조그마한 기를 만들어 무덤에 꽂아 둔다. 지전은 혹 금이나 은을 종이 위에 발라 잔이나 밥그릇 모양과 같이 만들고 그 윗면을 막아서 속을 비게 한 것으로, 우리 나라의 이른바 금전지(金錢紙)니 은전지(銀錢紙)니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