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태행산의 동쪽 맥..반곡?

2022. 9. 5. 20:26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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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환일기(往還日記) / 무자년(1828, 순조 28) 5

24(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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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비가 먼지 적실 정도로 오다가 늦게 갬.

역로(逆路)로 20리를 북쪽으로 가 광녕군성(廣寧郡城)을 지나고 서쪽으로 북진묘(北鎭廟)에 들어가 아침밥을 먹었다. 바로 청조(淸朝)에서 세운 의무려산신(醫巫閭山神)의 사당인데, 굉장히 드높으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안에는 또 소나무가 있어, 대개 압록강을 건넌 뒤에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쪽에는 만수산(萬壽寺)가 있고 또 그 행궁이 있는데,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했다. 문밖에는 4, 50보를 모두 석회로 땅을 돋우었다.

청제(淸帝)의 조상 능이 심양성(瀋陽城) 북쪽 몇 리의 수목 속에 있는데 집이 우뚝 솟았으며, 다닥다닥한 누런 기와와 푸른 기와는 모두 제각(帝閣)인데 도중에서 바라보니 울창하여 볼만하였다. 천자가 10년에 한 번씩 능에 참배하므로, 연경에서 심양까지 행궁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또 15리를 가 도화동(桃花洞)에 들어갔는데, 들판을 며칠 가서야 비로소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대개 이 산은 동쪽으로부터 왔으니 필시 백두산의 서북쪽 기슭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의무려산이 되고 또한 남쪽으로 산해관이 되고 반산(盤山)이 되며 종당에는 서산(西山)이 되니, 본시 한 산의 용맥(龍脈)이 수천 리까지 간 것이다. 반산 밑에 이원(李愿)의 반곡(盤谷)이 있다 하니, 이로 미루어본다면 반산의 북쪽은 태항산(太行山)이니 이른바 백두산은 태항산의 동쪽 맥이 되는 것이다.

도화동(桃花洞)은 산에 의지하고 있어 촌락이 다소 있는데, 복숭아나무ㆍ살구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땅이 또한 들 밖이어서 그윽하게 깊숙하며, 개와 닭 소리가 서로 들려 한가한 맛이 자못 사랑스러웠다.

산중의 툭 튀어난 곳에 이르러 올라가 보니 불우(佛宇)가 언덕 위에 있어 멀리 아득하게 창창한 들판에 다다랐고, 바위 사이와 숲 가에는 자잘한 정각(亭閣)이 많이 있다.

또 그 위에 바위 벽이 움푹 들어가 암자 같은데 그 아래에 10여 개의 불상을 놓았고, 불상 자리의 뒤는 비스듬한 석벽(石壁)으로 되어 먼지가 쌓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먼지를 헤치고 이름을 새겼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많았다.

김지수(金芝叟)가 망녕된 생각으로 옷을 벗고 기어올라가 부채 끝에 붓을 묶고 먹을 찍어 쓰려는데, 백천 명이나 이름을 써서 자못 빈틈이 없었다. 간신히 한 조각 빈 석면(石面)을 찾아 드디어 그의 성과 이름을 기록하니 글자 크기가 손바닥만한데, 석면이 협착하고 기울어져 밖에 잘 보이지 않는다. 쓰기를 끝내자 또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것을 잡고 내려오는데 석벽의 높이가 4, 5길이나 되어 잠깐이라도 손을 놓으면 생명이 왔다갔다 하므로 먼지가 젖도록 땀이 흘러내렸다.

맨 위 봉우리에 벽돌로 항아리같이 쌓아서, 보기에 봉화대(烽火臺) 같은데 작은 석불(石佛) 몇 개를 안치하였고, 또 바위에다 대고 집을 지어 제비집 같이 달렸는데 모두 부처가 있는 곳이었다. 그 석벽 위에다 내 성명 석 자를 손바닥만하게 크게 썼다.

산을 내려와 떠났다. 30리를 가 청성점(靑城店)에서 말먹이를 먹이고 또 25리를 가 여양역(閭陽驛)에서 잤다. 광녕성(廣寧城) 안은 매우 즐비하고 또 패루(牌樓)가 있어 볼만하다고 하였으나, 성 밖으로 가기 때문에 한번도 들여다보지를 못했다. 성 동쪽에 백탑 둘이 우뚝하게 멀리 바라다 보였다.

 

[-D001] 반곡(盤谷) :

반곡은 지명으로 하남성(河南省) 제원현(濟源縣)의 북쪽에 있는데 당(唐) 나라 이원이 여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한유(韓愈)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가 《창려집(昌黎集)》과 《고문진보》 후집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