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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6년 기묘(1879) 3월 25일(기사) 맑음
16-03-25[21] 희정당에서 돌아온 세 사신을 소견할 때 동부승지 장시표 등이 입시하여 중국의 사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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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酉時).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돌아온 세 사신이 입시할 때에, 동부승지 장시표, 가주서 정승현, 기주관 오치항(吳致恒), 기사관 김명래(金命來),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심순택(沈舜澤), 부사 조병세(趙秉世), 서장관 정원하(鄭元夏)가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세 사신은 앞으로 나오라.”
하니, 심순택 등이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먼 길을 무사히 다녀왔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하의 염려 덕분으로 일행 모두가 아무 탈 없이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견록(聞見錄)에 기록된 것 외에 달리 들을 만한 것은 없는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천자가 모두 친히 행한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도 또한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야(朝野)가 평온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양 사람들이 집을 많이 증축하고 왜인들도 관사(館舍)를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서양인과 왜인들이 지은 집이 모두 다 예전에 비하여 더 성대하게 지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증축한 것을 보니 예전에 비하여 약간 성대하게 지었음을 대강 짐작할 수 있으나 편액(扁額)에는 황제의 명에 따라 지은 것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불평 불만의 여론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한인(漢人)의 경우 더 심할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중국인들은 나라의 정치 문제에 있어 평소 신중하게 대하고 또 서양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까닭에 별달리 드러내 보이는 것은 없으나 그들이 불평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또한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홍장(李鴻章)과 좌종당(左宗棠)은 모두 나라를 다스릴 자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나라를 보위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 서양인으로서 중국에 체류하는 자들은 예전에 비하여 몇 배나 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새로 건립한 양관(洋館)의 현판에 ‘대법국대신공서(大法國大臣公署)’라고 씌어 있는데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는 듣지 못하였으나 아마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관은 궁궐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4, 5리 거리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관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궁궐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은 것이 매우 정교하고 단청(丹靑)이 매우 아름다우나 그 크기에 있어서는 궁궐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양인을 보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무시로 왕래하므로 문만 나서면 만나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인은 보지 못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왜인은 의복이 서양인과 서로 같고 용모는 중국인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토비(土匪)와 회비(回匪)는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두 비적들의 소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국이 쇠잔하여 물가가 높이 치솟았다 하던데 근래에는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이 한림 편수관(翰林編修官)에게 들으니, 경비가 부족하여 관리의 봉록을 줄인 것이 또한 이미 매우 많고 조정 회의에서 예전 상태로 회복해 보려고 하나 재정 형편이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림의 성명이 무어라고 하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서부(徐郙)입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서양 상품이 지나치게 정교하고 그 값이 너무나 비싸서 실제로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양의 정교한 물건들이 반드시 팔 곳이 없어지고 중국의 은화(銀貨)가 또한 저절로 풍족하게 되어 서양놈들과 뒤섞여서 지내는 폐단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개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사의 말이 옳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동치 황제(同治皇帝)의 능을 만드는데 재정 형편이 미치지 못하여 관(棺)을 임시로 5년간 안치하였다가 이번 3월 24일에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장례를 치른 후 즉시 태묘(太廟)에 합사(合祀)하여 이를 공포해야 하나 장례에 드는 비용이 몇백만이나 소요되어 5년이란 긴 세월을 끌었다고 하니 그 쇠잔한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인들이 아직도 병권(兵權)을 독차지하지 못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홍장이 병권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기밀(機密)과 내무(內務)는 반드시 의논하여 만주인 집정자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선이 서양인을 배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모두 알고 있으며 말할 때마다 흠탄(欽歎)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주인들과도 서로 어울렸을 텐데 우리나라의 서양인 배척에 대해 그들은 무어라고 하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간혹 만주인과 어울리기는 하였습니다만 한인들처럼 서로 마음이 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저들이 먼저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흠모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돌아간 칙사는 혹 만나보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2월 7일이 칙사 모친의 생일이어서 빨리 돌아가 복명하고 그날로 집으로 갔다 하므로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문은 날이 저물면 닫고 날이 밝으면 연다고 하던데 그렇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보낸 자문(咨文)의 내용에 대해 저들은 무어라고 하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들이 그 초본을 꺼내어 예부 시랑에게 보여 주었더니, 모두들 자문에서 아뢴 것이 사체(事體)에 합당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전(海甸)과 서산(西山) 등지를 유람하였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방물(方物)을 올리는 일을 마친 후에 가 보았는데 신유년 양요(洋擾) 때 대부분 불타 버리고 누대(樓臺)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초 시설의 장려(壯麗)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동현(安東縣)을 새로 설치하였다고 하던데 그것을 보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관부(官府)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압록강에서 책문(栅門)까지 120리 안의 지역은 옛날 폐사군(廢四郡) 지역으로 지금은 백성들이 들어가 편안히 살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므로 촌락이 우리나라 후창(厚昌)의 강 너머 땅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을을 설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또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홍장이 사는 곳은 몇 리나 떨어져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가 사는 곳은 천진위(天津衛)에 있으며 백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보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정말로 보았는데 여섯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코끼리가 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어떻게 다시 왔으며 정말로 황옥거(黃屋車)를 지고 다니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수년 전에 버어마 사람들이 와서 조공으로 바쳤다고 하였으며 황옥거의 크기가 4, 5칸짜리 집만한데도 코끼리 한 마리가 능히 그것을 지고 다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자를 몇 번 알현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네 차례 알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세히 보았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미목(眉目)이 매우 청명(淸明)하였습니다. 체구는 아홉 살짜리 아이와 비교하면 조금 작은 듯하나 의복은 매우 관대(寬大)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친왕(恭親王)이 서양인과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하던데 근래에는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과연 친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인들은 우리나라의 대보단(大報壇)을 알고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물어보는 자가 없어서 그렇지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런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예악과 문물을 중국인 가운데 혹 흠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라 천하 각 나라가 또한 모두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성전(大成殿)을 정말로 보았는가? 전내(殿內)의 편액에 만주 문자를 써 놓았다고 하니 매우 통분한 일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국에서 사신으로 와서 모인 사람은 없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와서 모인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에는 절이 없고 궁궐뿐인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과연 그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돌아오는 길에 우리나라 안의 보리와 밀 농사를 보니 어떠하던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봄비가 때맞춰 내려 풍년이 예상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자년 이후로 다행히 조금 안정을 찾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백성들에게는 양식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니 농사의 풍년이 어찌 가장 좋은 상서(祥瑞)가 아니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풍년이 나라의 가장 좋은 상서가 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돌아올 때 서장관은 어찌하여 체류(滯留)하지 않았는가?”
하니, 정원하가 아뢰기를,
“짐수레가 곧바로 도착하였으므로 체류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사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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