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곡(起輦谷)은 사막 가운데에 여러 대를 모두 이곳에 장례하였고,

2022. 10. 2. 11:07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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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3 경자(1600) 7 26(정묘)

33-07-26[01] 장지의 선정과 조성 문제로 대신들과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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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겸이 아뢰기를,

“방서(方書)에 ‘백호는 쉬이 노하기 때문에 한번 그 위치를 침범하면 반드시 화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전교하신 본의가 지극하십니다. 우리 나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 기전(畿甸)은 모두 짐승의 소굴이 되어 백성들이 필시 많은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제도는 알 수 없으나, 전조(前朝)의 만수산(萬壽山)은 고려 태조로부터 모두 이곳에 장례하였는데, 그 후 노국 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를 위해 특별히 대릉(大陵)을 세우느라고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호순신(胡舜申)》의 법이 전조에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파를 따지지 않고 썼는데, 그 법이 이미 우리 나라에 행해짐으로써 풍수에 구애되어 폐단이 만연되니, 식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술법이 비록 애매하나 화복을 말해 놓았으니, 신자(臣子)의 심정으로는 차마 쓸 수가 없습니다.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되 능히 이와 같이 못하는 것은 연운(年運)에 구애되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고, 성영은 아뢰기를,

“서경덕(徐敬德)이 선왕조(先王朝) 때 상소하기를 ‘연대가 오래되면 기내(畿內)는 모두 짐승의 소굴이 될 것이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상의 하교를 받드니 후세를 위하여 염려하심이 지극합니다. 신이 경인년에 아비가 죽은 후 직접 신평산을 답사해 보았는데, 국장지로 치부해 놓은 것 중에 이 산처럼 좋은 곳이 없었습니다. 만약 쌍분을 만든다면 달리 구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국장의 제도에 의물(儀物)이 몹시 많으므로 보토(補土)를 하지 않으면 모양을 이루기 어려운데, 이곳은 비록 보토를 한다 하더라도 현궁(玄宮)은 본토(本土)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또 백호에 쓰는 것을 술관이 가장 꺼리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들을 하지만 여염에서는 산은 제한되어 있고 자손은 다함이 없으니 어찌 백호를 버리고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지리는 알지 못하나 이는 필시 좌(左)가 동(東)이므로 청룡이라 하고 우(右)가 서(西)이므로 백호라 하였을 것이니, 어찌 그 속에 참으로 용호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설령 주산(主山)이 주작(朱雀)이 된다 해도 그 밑에 또한 새[鳥]가 있겠는가. 이치 밖에 물건이 없는 법이니, 영상(領相)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옛날의 산을 보는 방법은 산형(山形)과 수세(水勢)로 기(氣)가 모이고 흩어진 것을 따져 결정하였는데, 그 후에 와서 성신(星辰)의 방위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내에 한 산만이 아니고 곳곳의 무덤마다 각각 청룡과 백호가 있는데 그렇다면 한 기내에 용신 호두의 신이 어찌 그처럼 많을 수 있겠는가. 만약 백호의 방위를 침범할 수 없다면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반드시 백호의 산에 호(虎)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실로 허황한 것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하니, 헌국이 아뢰기를,

“술관은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고 다만 방서(方書)에 의하여 말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혈(正穴)ㆍ진룡(眞龍)의 말은 역시 비유하는 말이다. 어찌 진룡이 있겠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술가(術家)가 이와 같이 아니하면 어찌 후세를 현혹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준겸이 아뢰기를,

“신이 《오례의》를 상고해 보건대, 동ㆍ서로 두 개의 석실(石室)을 만들어 1실은 먼저 쓰고 1실은 석회를 그 속에 채워 두며, 문비(門扉) 등의 돌은 산기슭의 경지(庚地)에 묻어 두었다가 훗날의 용도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연운 또한 따지지 않았습니다. 다만《오례의》를 찬술하기 이전에도 미리 석실을 만들었는지의 여부를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혈(正穴)이 넓지 않더라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나의 본의이다.”

하자, 헌국이 아뢰기를,

“영릉(英陵)은 격장(隔葬)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혈이 좁은 것 같다 하니, 훗날 쓰고자 하면 반으로 나누어 쓸 수는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남위(男位)를 먼저 중앙에 정한 후에 여위(女位)를 그 곁에 쓰는 것이 장산(葬山)의 제도입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천존지비(天尊地卑)의 위치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 훗날에 쓰는 것이야 신자로서 어찌 차마 입에 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한(漢)나라 때에도 수릉(壽陵)이 있었으니 장릉(葬陵)ㆍ패릉(霸陵)ㆍ두릉(杜陵)이 그것인데, 한곳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오릉(五陵)이 모두 한 곳에 있습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오릉은 지명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하의 부실(富實)한 자를 오릉에 이주시켰으니 이것은 능임이 분명하다. 한(漢)나라 때 1년의 전세(田稅)로 능침(陵寢)을 경영한 경우도 있었다. 대명 태조(大明太祖)가 승하하였을 때 7일만에 장례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평소에 먼저 조치해 두었기 때문에 천자의 상을 또한 7일만에 장례한 것이다. 호원(胡元)의 일은 거론할 것이 못되지만, 기연곡(起輦谷)은 사막 가운데에 있는데 여러 대를 모두 이곳에 장례하였고, 장례의 기간도 모두 며칠 안에 있었다. 그 당시 술사(術士)가 매우 성하였으나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을 수 있었다.”

하자, 헌국이 아뢰기를,

“한나라 때도 미리 경영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물만 흐르게 하였을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元)나라의 장제(葬制)는 극히 이상하다. 산을 택하지 않고 평지에 장례하여 온갖 우마가 밟게 하였으니, 그 일이 매우 흉악하다.”

하니, 헌국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제도입니다. 신이 중국의 사대부들을 보니 역시 평지에 장례하고 신도비(神道碑)를 세워 표시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섭정국이 본 산은 어떠한가?”

하니, 헌국이 아뢰기를,

“술업(術業)이 서로 다른 터라 결코 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국이 술업에 정밀하다는 것을 내 일찍이 들었다. 황상의 수릉(壽陵)도 이 사람이 정하였다고 한다. 대개 중국 사람은 잡술을 많이 아는데, 우리 나라는 그 조박(糟粕)만을 알 뿐이다. 정국이 정한 것이 필시 정묘할 것이지만 다만 무엇을 근거로 믿을 것인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격국(格局)이 다릅니다. 그가 말한 곳을 보니 결코 쓸 수 없습니다.”

............

헌국은 아뢰기를,

“역대로 계승하여 반드시 정통의 산맥에 썼는데, 신자된 자로서 어찌 이와 같이 구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호민이 아뢰기를,

“어제 대신이 청대(請對)한 의도는, 대행 왕비가 승하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 능산을 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직접 성교(聖敎)를 받들어 속히 조처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만약 이 산을 결코 쓸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 결의하고 나아가 다시 다른 산을 택하겠습니다.

하고, 준겸은 아뢰기를,

“이의신(李懿信)이 소신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산은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술가에선 상하분(上下墳)으로 하는 것을 별로 꺼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한 조항을 강정(講定)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성영이 아뢰기를,

“술가의 말에 ‘한 산에 3곳 이상은 쓰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상하분을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전부터 상하분의 제도가 있지 아니하므로 감히 경솔히 상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문에 상하분을 하지 말라는 말이 없다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니, 준겸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면 향배(向背)와 수파가 동일하나 법규 밖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상하분은 전부터 그런 규례가 없으니,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염에도 상하분이 있는가?”

하니, 모두 상하분을 쓴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쌍분과 상하분의 일은 측량한 후에 술관과 다시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다. 영길이 아뢰기를,

“소신이 지리는 알지 못하나 신평은 하늘이 만든 길지로서 때를 기다린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산을 쓰면 모든 일이 매우 편할 것입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상하분과 쌍분을 물러가 결정하겠습니다.”

하고, 준겸은 아뢰기를,

“한 산에 같이 쓰라고 하신 하교는 실로 우리 나라가 평소 하고자 하면서도 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신평산뿐 아니라 광릉(光陵)ㆍ창릉(昌陵)ㆍ경릉(敬陵) 및 다른 능의 화소(火巢)안에도 필시 쓸 만한 곳이 많을 것인데, 지금은 수목이 무성하여 간심할 수 없습니다. 서서히 낙엽이 지기를 기다린 후에 여러 능을 두루 간심하여 쓸 만한 곳을 선택해서 국용(國用)으로 등록해 만세의 계책을 삼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상의(尙毅)는 아뢰기를,

“이는 여염에서 일찍이 강론하던 일입니다. 성상께서 천수산(天壽山)의 제도를 말씀하셨는데, 만약 한때의 논의로 그치고 말게 되면 후에 근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글로 기록하여 후세로 하여금 준행하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후 의궤와 등록이 모두 보존된 것이 없으므로 오직 견문에만 의거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명목의 가짓수가 너무 많으므로 이처럼 물력이 탕갈한 때를 당하여 공역을 쉽게 성취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모든 일에는 본말과 경중이 있는데 만약 말절(末節)에만 전력하면 대사에 미치지 못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장례의 일로써 예를 들어 말하면 의금(衣衾)의 정결함과 관곽의 견고함은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의당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해야 할 것이요, 불삽(髴翣)의 휘황함과 치봉(雉鳳)의 찬람함은 말절(末節)인 것입니다. 또 회탄(灰炭)의 정미함은 근본이며 의물(儀物)의 번다함은 말절입니다. 그리고 한번 정해진 후에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니, 물력이 비록 빈약하더라도 힘써 정성과 노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시로 개조할 수 있는 재수(齋守)와 낭무(廊廡)의 등속은 우선 조그마한 집으로 꾸며도 무방한데, 유사(有司) 등은 한결같이 옛 규모대로 하여 감히 그 사이에 감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위의에 관한 물건들을 반드시 헤아려 줄인 연후에야 모든 일을 조처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고, 헌국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총호(摠護)의 책임을 맡았는데 영악(靈幄)이 만약 샌다면 미안한 일이니, 옹가(甕家)의 유둔(油芚)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소용되는 물건의 품목을 미리 작성해 둔 후에야 해관(該官)이 스스로 준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명원은 아뢰기를,

“지금은 물력이 탕진된 때이므로 마땅히 이항복의 말과 같이 가능한 한 간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외부의 의논 역시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전일 해조가 복정해 놓은 것이 많아 내가 이미 말하였다. 이런 일은 도감(都監)이 살펴서 하라.”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반드시 공사(公事)가 있은 후에야 해조가 다시 이에 따라 살펴서 시행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사에 관련된 물건은 감축할 수 없다. 그 밖의 의물(儀物)이야 어찌 일일이 다 마련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석물(石物)도 어찌 반드시 높고 크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실로 무익한 일이다.”

하였다. 준겸이 아뢰기를,

“석물은 정해진 척수(尺數)가 있어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커져서 강릉(康陵)ㆍ태릉(泰陵)의 석물은 매우 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건원릉(健元陵)과 헌릉(獻陵) 등의 석물을 자로 재어 와 《오례의》에 정한 척수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헌국이 아뢰기를,

“장인(匠人)이 매우 적어서 두어 달 안에 미처 조치하지 못할 듯싶으니 이 때문에 염려됩니다. 김시헌(金時獻)이 풍수(風水)를 안다고 예조 판서가 말하니 이 사람을 참석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헌국이 아뢰기를,

“성영과 한준겸도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원전】 24 집 104 면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