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2. 19:39ㆍ백두산
솥귀 모양 또는 주전자귀 모양의 천지 와 성길사한 점장대
알타이산 즉 백두 의 발음기호 와 사할린이 현위치와 다른 곳에 나타남
알타이산 밑에 만주어로 하얀을 나타내는 sayanshan 즉 흰산 즉 백두산을 나타냄
원의 첫 수도인 오르곤 강가의 카라코룸(객라화림=화림)은 몽골 항애산맥 동쪽이 아닌 알타이산 남쪽에 그려져있다.
러시아 고지도 원의 대도 캄발리크 즉 북경이 표시
솥귀모양의 백두산 천지와 성길사한 점장대
/www.youtube.com/watch?v=vk-WyuPVhKY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
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 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15년 계축 > 2월 6일 > 최종정보 세종 15년 계축(1433) 2월 6일(경인)15-02-06[04] 원묘 악장을 새로 찬정하다 ....... 고려의 운수가 끝나려 할 제 백성들이 앙화(殃禍)에 걸렸는데, 동쪽으로 치고 서쪽으로 쳐서 사방을 편케 하시고, 사적(沙賊)ㆍ납호(納胡)ㆍ왜구(倭寇) 모두 달아났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백성을 편히 하고, 꿈이 상서에 합하여 공(功)이 한때에 덮었네. 크디큰 하늘의 명을 마침내 사양하기 어려웠도다. 동문선 제126권 / 묘지(墓誌) 한문경공 묘지명 병서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DCI]ITKC_BT_1365A_1260_010_0030_2002_009_XML DCI복사 URL복사 이색(李穡) ....... 신축년에 왕이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니 따라가서 전의령과 전교령에 두 번 전직되었는데, 다 중정의 품계였으며, 다음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에 승진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京畿)풍덕군(豐德郡 .......... 신축년(1361)에 낙성 중회(落成中會)를 차렸는데, 겨울에 사적(沙賊)에게 유린당하여 불당ㆍ기명ㆍ불경ㆍ불상이 보존된 것이 거의 드물었다. 나라에서 경성(京城)을 수복한 뒤에 대강 보수하고, 조계선사(曹溪禪師)를 맞아 행재주석(行齋主席)을 시켰으니 갑진년(1364) 일이다. 흥왕사(興王寺) 옛터는 덕적산(德積山) 남쪽에 있다. 고전번역서 > 목은집 > 목은문고 제15권 > 비명 > 최종정보 목은문고 제15권 / 비명(碑銘)유원(有元) 봉의대부(奉議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 고려국(高麗國)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 시(諡) 문충공(文忠公) 초은(樵隱) 선생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 신축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홍건적)이 침입하자, 조정이 남쪽으로 옮겨 우선 그 예봉(銳鋒)을 피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지금의 시중공(侍中公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충주(忠州)에 가서 상의 행차를 영접하고 배알(拜謁)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수행(隨行)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2월에 우리 군사가 크게 집결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다 고전번역서 > 목은집 > 목은문고 제6권 > 기 > 최종정보 목은문고 제6권 / 기(記)보법사기(報法寺記) ............. 그러나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사유(沙劉) 등이 이끈 홍건적(紅巾賊))의 유린을 당한 나머지 전각과 기명(器皿)을 비롯해서 불서(佛書)와 불상(佛像)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경성(京城)을 수복한 뒤에 약간이나마 다시 수선하고 나서 조계(曹溪)의 선사(禪師)인 행재(行齋)를 초빙하여 사찰의 주지를 맡게 하였으니, 이때가 갑진년(1364, 공민왕13)이었다.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부인 유씨(柳氏)가 죽자 윤공이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느끼는 바가 있어 공사를 더욱 급히 독촉한 결과 그 이듬해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파평군 윤공 묘지명 병서 (坡平君尹公墓誌銘 幷序) [DCI]ITKC_BT_1365A_1300_010_0080_2002_009_XML DCI복사 URL복사 이색(李穡)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서울을 핍박해 와서 현릉(玄陵)이 남방으로 행행할 계책을 결정하니, 조관들이 많이 벼슬을 버리고 달아났다. 파평군(坡平君) 윤해(尹侅)가 전직 복주 목사(福州牧使)로서 필마로 왕의 거가를 따라 광주(廣州)에 이르러, 객사의 문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웃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는데, 내 비로소 그 얼굴을 알게 되었으니, 대개 기이한 큰 인물이었다..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 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 문희 유공 묘지명 병서 (有元高麗國忠勤節義贊化功臣重大匡瑞寧君諡文僖柳公墓誌銘 幷序) ......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황주(黃州)를 침범하니, 그 상황이 몹시 급박하게 되어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공이 조용히 아뢰어 남행(南幸)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해동역사 제15권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동환봉사 > 동환봉사 > 올리려던 16조의 상소[擬上十六條疏] > 최종정보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設如前朝之季。倭船雲集於下三道。畿,黃之境。蒙古紅巾。蜂午於兩界之地。 봉기[蜂起] 뜻이 맞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떼 지어 세차게 들고일어남 兩界: 고려와 조선 시대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평안도 지방인 서계(西界)와 함경도 지방인 동계(東界)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잡지명 삼천리 제13권 제4호 발행일 1941년 04월 01일 意志는 조금 틀리나 蒙古族은 支那에 들어 오잖었다고 그래서 그 영향은 맞지를 않으나 다른 民族이 다 영향을 받었다. 동광 제36호 1932년 08월 01일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高麗族의 유적 그런데 이 寶山의 전설로써 于今에 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방은 북으로 산을 끼고 남으로 열리어 小河가 흐르고 잇어 實로 沃野千里이나 이 땅이 金遼시대에 벌서 高麗族의 손으로 개척되어 당시에는 극히 융성한 바 잇엇다 한다. 지금에도 高麗 城跡이 3개소 鼎足의 형으로 존재하엿든 터전이 남어잇다. 듣는 말에는 元朝가 일어나매 高麗族은 맛츰내 戰敗되어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이 되어 그곳에 잇든 3城主는 자기들의 소유물인 金銀財寶가 그대로 敵手에 들어갈 것을 참을 수 없어 세 城主는 서로 의논하고 비밀히 각각 자기들의 보화를 한데 뭉치어 이 小山에다가 깊이 매장하여 버렷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6월 25일 > 최종정보 나라의 관문인 평안도를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번(藩)이로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甲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월 15일 辛酉 8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 예로부터 중원에 사변이 있으면 우리 나라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 듣건대 ‘산동의 온 지역이 도적이 되었으므로 대병(大兵)이 사방에서 친다.’고 하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극도로 궁박(窮迫)해질수록 도적은 반드시 구름이 몰리고 물길이 터지듯이 우리의 지경으로 뛰어들기를 거란과 홍군의 난폭한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로운 성(城)의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죽기로 날뛰는 도적의 돌격(突擊)하는 칼날을 당해내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 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 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9월 25일 甲辰 2번째기사 1769년 청 건륭(乾隆) 34년 ....... "일찍이 국초(國初)에 서변(西邊)을 모두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은 거란[契丹]이 아침에 쳐들어왔다가 저녁에 물러가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 쌓기가 쉽고 또한 허물기 어려웠기 때문에 흙으로 쌓고 돌로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중종 25년 경인(1530) 1월 19일(경술) 25-01-19[01] 석강에서 유보ㆍ신공제 등과 금년 봄의 구황 대책에 대해서 논의하다 고려(高麗) 때 거란[契丹]이 침구하자 공민왕(恭愍王)이 끝내 남쪽으로 피란(避亂)한 일이 있었고, 【거란의 침구는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뢴 것은 틀림없이 잘못 기억한 탓일 것이다.】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내가 들으니 옛날 거란(契丹)의 홍군(紅軍)이 있었을 때 본래 우리 나라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그 화를 입었다. 註 248] 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중종실록 40권, 중종 15년 9월 20일 甲戌 3번째기사 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 (蕭遜寧)의 홍건적(紅巾賊)도 의주를 거치지 않았다 하니, 되는 과연 어느 길로 침범할는지 모르는데 여기만을 믿고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 별건곤 제20호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 그러케 천하를 威壓하던 元나라의 세력이 일시에 頓挫하야 威令이 서지 못하게 되매, 全國이 混亂하고 群雄이 蜂起하는 중에 紅頭賊關先生 破頭潘等이 北方에서 이러나게 되니 兵勢가 大振하는지라 翌年 春二月에 천하에 檄文을 돌니되 倡義擧兵에 中原을 恢復한다 自稱하고 그해 8월에 賊兵 3천 여명이 鴨綠江을 건너와서 剽掠하다가 갓스나<14> 都指揮使 金元鳳이 숨기고 上報를 올니지 안이하야 朝廷에서는 아지도 못하고 지낫스니 엇잿던 녜나 이제나 太平乾坤의 시대 일이엇다. 성종실록 216권, 성종 19년 5월 27일 庚寅 2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 방어의 중요성에 대해 상서하다 대저 의주(義州)는 본래 요(遼)나라의 포주(抱州)인데, 고려 예종조(睿宗朝)에 금(金)나라 군사가 침공(侵攻)하여 요(遼)나라의 개주(開州)를 취(取)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자,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내원(來遠)·포주(抱州) 두 성(城)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귀부(歸付)하였다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도망하였으므로, 예종이 포주를 고쳐서 의주(義州)로 만들고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현종조(顯宗朝)에는 거란(契丹)이 교량[橋]을 만들고 그 교량을 끼고 동서(東西)로 성(城)을 만들었으며, 문종(文宗)조(朝)에는 거란이 포주성(抱州城) 동쪽 들에 궁구문(弓口門)을 설립하고 문밖에다 우정(郵亭)을 설치하였으며, 또 확장(搉場)560) 을 설치하였는데, 문종이 그것을 근심하여 혁파(革罷)하도록 청하였으나 거란의 임금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군대와 소손녕(蕭遜寧)의 군대, 삼별초(三別抄)·유관(劉關)의 군대가 모두 의주(義州)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옥오재집 조선 후기 문신 송상기(宋相琦: 1657~1723)의 시문집. | 18권 9책. 운각활자본. 아들 필환이 편집, 손자인 재희가 1760년(영조 36)에 간행했다 옥오재집 제2권 / 시(詩) 심양〔瀋陽〕 [DCI]ITKC_BT_0447A_0020_010_1040_2014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온 요동에서 이곳이 제일 웅장하니 / 全遼第一此雄藩 화려한 성가퀴와 망루가 구름에 싸였네 / 粉堞華譙入塞雲 다른 시절 중국의 방어선이 되었고 / 中國異時堪保障 원나라 때 수도로 부질없이 고초 불렀지 / 上都元代漫辛勤 깊숙한 방 비밀스러운 궁궐은 천 겹이요 / 陰房秘殿千重合 화려한 가게 향기로운 거리 이곳저곳에 / 寶肆香街百隊分 성 옆에 흐느끼는 샘물만이 / 獨有城邊嗚咽水 지금까지 하장군을 원망하는 듯 / 至今如怨賀將軍 심양을 방비하지 못하였을 때, 대장 하세현은 도망가다 죽었다. [주-D001] 원나라 …… 불렀지 : 원의 수도 체제는 양경제(兩京制)였다. 겨울 수도인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이고 여름 수도인 상도는 심양이다. 그 두 수도 사이로 많은 위락시설, 상업지구, 창고, 군사주둔지 등이 있었다. 원나라 황제는 대도와 상도 사이로 계절에 따라 거대한 이동식 천막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다. 이것은 유목민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이런 관습은 황제 신변 경호에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이동하는 도중에 황제를 암살하는 사건도 일어났고, 대도와 상도 사이에서 형제끼리 각각 정권을 세워서 내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남파의 변과 천력의 내란이 있다.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DCI]ITKC_BT_1370A_0060_010_0010_200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군주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곧 연경의 동북 4백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 《열하지(熱河志)》를 상고해 보면, “한(漢) 시대에 요양(要陽)ㆍ백단(白檀)의 두 현(縣)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밀운(密雲)ㆍ안락(安樂) 두 군(郡)의 변계로 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해족(奚族)의 땅이 되었으며, 요(遼)는 흥화군(興化軍)이라고 하여 중경에 소속시켰고, 금(金)은 영삭군(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에 소속시켰으며, 원(元)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都路)에 속하였다가 명(明)에 이르러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이 되었다.” >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 > 최종정보 철목진(鐵木眞)은 사막 동북 알난하(斡難河)에서 처음 일어나고 와활태(窩闊台)는 사막 서쪽 화림(和林)에서 즉위하니, 본디 당(唐) 나라 때 회골(回鶻)의 비가사한(毗伽司汗)의 옛 성을 회동의 장소로 삼아서, 처음에는 원창로(元昌路)를 세웠고, 나중에 화림사(和林司)로 고쳐 운영하다가,홀필렬이 연경(燕京)으로 천도하여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부터는 화림 선위사(和林宣慰司)로 개설하여 늘 훈구 왕공으로 통할하게 하였다. 여기서 북으로 3천 리를 가면 아지리해자(阿只里海子)이고, 또 5백 리를 가면 겸주(謙州)ㆍ익란주(益蘭州)이며, 다시 1천 리를 가면 대택(大澤)에 이른다. 상도(上都)는 환주(桓州) 동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흘필렬이 개평부(開平府)로 일컫다가 이윽고 상도(上都)로 올려 일찍이 그곳에서 피서하였고, 궁궐과 시사(市肆)의 웅장함은 대도와 대등하다. 그 기언 제34권 외편 / 동사(東事) 3 말갈(靺鞨) 고구려의 옛 지역이 서경(西京)이니, 또한 압록부(鴨綠府)라고 하고,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4주를 통할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환도고(丸都考) ..... 《요사》지리지에, “녹주(淥州)는 본래 고구려의 고국(故國)인데, 발해가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라 불렀으며,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환주가 곧 환도이기 때문에 고국이라 한 것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영변부(寧邊府)의 검산(劒山)이 곧 옛날의 환도이다.” 하였는데, 대개 방언에 칼을 환도(環刀)라 칭하므로 또한 억측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23권 > 편서잡고 3 > 최종정보 4년(1256, 헌종 6), 유병충(劉秉忠)을 시켜, 환주(桓州) 동쪽 난수(灤水) 북쪽 용강(龍岡)에 성시(城市)와 궁실(宮室)을 영건하고 ‘개평(開平)’이라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치평요람 > 치평요람 제139권 > 송 > 최종정보 이때에 이르러 헌종(憲宗)이 성시(城市)를 건설하고 궁실(宮室)을 수축하여 도회지(都會地)를 조성하려고 하자, 황제 홀필렬이 말하기를, “유병충은 천문(天文)ㆍ지리(地理)의 법에 정밀합니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터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유병충이 “환주(桓州)의 동쪽이자 난수(灤水)의 북쪽에 위치한 용강(龍岡)이 길지(吉地)이다.”라고 하니, 헌종이 유병충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하고, 개평부(開平府)로 이름을 지었는데, 3년이 되어 공역을 다 마쳤다.【21】 동사강목 부록 하권 황룡국고(黃龍國考) [DCI]ITKC_BT_1366A_0430_000_0330_2002_009_XML DCI복사 URL복사 황룡국(黃龍國)은 요지(遼地) 동북쪽 지경에 있었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졸본은 지금 흥경 등지이고 황룡국과 졸본은 이웃 나라라고 칭하였으니, 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고려사》 지리지에, “용강(龍崗)은 옛날의 황룡국이다.” ... 지금 봉천부(奉天府)의 개원현(開原縣)을 또한 황룡부(黃龍府)라 칭하니, 요(遼)가 발해를 칠 때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권2 〈옥저읍루〉에 “《일통지(一統志)》에 ‘개원성은 삼만위(三萬衛) 서문(西門) 밖에 있다.’라고 하였고, 《원지(元志)》에는 ‘개원 서남쪽을 영원현(寧遠縣)이라 하고, 또 서남쪽을 남경(南京)이라 하며, 또 남쪽을 합란부(哈蘭府)라 하고, 또 남쪽을 쌍성(雙城)이라 한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원사》 〈지리지(地理志)〉에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고 치소(治所)를 황룡부(黃龍府)에 두었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길림성 농안(農安)이라고 한다. 기언 별집 제9권 / 기(記) 형산비기(衡山碑記) 무오년(1678, 숙종4) 성조(聖祖)의 …… 곳 : 성조는 태조 이성계의 선대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이고, 왕적을 일으킨 곳은 두만강과 덕원(德源) 일대를 가리킨다. 태조의 선조들이 원나라의 남경인 간도를 거쳐 두만강과 덕원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인조 15년 정축(1637) 7월 4일(경오) 맑음 15-07-04[24] 사은사 세 사람을 인견할 때 상사 이성구 등이 입시하여 사행의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성구가 아뢰기를, “심양은 날씨가 일찍 추워져서 신들이 나올 때가 마침 6월이었는데도 이미 서늘한 기운이 있었습니다. 세자궁의 겨울 옷감을 미리 들여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4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한국사료총서 번역서4) > 1902년(광무 6년, 임인년) > 4월 > 6일(음력 2월 28일)《일요일》 흐림. 6일(음력 2월 28일)《일요일》 흐림 ...십일이면 구일은 바람이 불고, 4계절 중 3계절에 눈이 내린다(十日分排九日風 四時統計三時雪) 원래 조선의 최북단 지역 기후를 묘사하는 이 말은 바람에 관한 한 원산에도 들어맞는다. |
개벽 제70호 > 李太祖의 建國百話
잡지명 | 개벽 제70호 |
발행일 | 1926년 06월 01일 |
기사제목 | 李太祖의 建國百話 |
필자 | 車賤者 |
기사형태 | 논설 |
李太祖의 建國百話
車賤者
世世豪傑인 그의 家閥
太祖의 始祖는 新羅의 司空李翰이다. 그의 6世孫 兢休가 비로소 高麗에 仕하야 司空이 되고
其後 第18대에 至하야 李安社(穆祖)라 하는 이가 잇섯스니 그는 本來 全州의 人으로 또한 高麗에 仕하야 宣州(今咸南德源)知事가 되엿다가 微罪를 得하고 (全州에서 監司의 愛妓를 斬殺함) 逃하야 江原道 三陟郡 活*洞으로 移住하얏섯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또한 知縣에서 罪를 得하고 元의 南京(今間島局子街)으로 遠避한 後元에 仕하야 5천戶의 達魯花亦(元의 地方官名이니 本音 따로카치)이 되엿섯다. 그리고 그의 子 李行里(卽翼祖)는 또한 南京의 千호가 되매 女眞諸千戶의 部下가 다 歸附함으로 千戶等이 그를 忌惡하야 사살코자 하니 遂히 逃亡하야 豆滿江의 下流赤島(鏡興東)에 住居하다가 후에 다시 德源府로 移住하얏섯다.
翼朝의 子度祖椿은 蒙古의 名으로 李顔帖木兒이니 또한 元에 仕하야 父職을 襲하고 高麗忠烈王때에 비로소 王에게 謁見하얏스며 度祖는 또 三子가 잇섯스니 次子 子春은 蒙古名으로 吾魯思不花라 稱하는 바 雙城(今水興)에 居하야 亦是 千戶가 되엿스니 그가 곳 李太祖의 父 桓祖다. 그는 高麗恭愍王 4년에 王에게 來朝하야 少府尹이 되엿스니 當時 朝鮮半島의 北部는 대개 女眞族(所謂 野人)의 巢窟로 元國에서 雙城에 總管府를 置하야 此를 支配하엿섯다. 然而元의 舊勢力이 점차 衰微하고 明의 新勢力이 아즉 扶植되지 안이함을 기회로 하야 恭愍王은 北方의 舊領土를 다시 개척하랴고 密直副使 柳仁雨로 東北而兵馬使를 삼아 元의 總管府를 攻擊하매 桓祖는<36> 此에 內應이 되야 불시에 總管府를 攻陷하고 咸洲 以北의 諸地를 회복하얏다. 其時에 桓祖는 그 功으로 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야 東北境을 鎭撫하더니 恭愍王 9년 4월에 불행히 46세를 一期로 하고 逝去하얏스니 以上 穆祖로부터 桓祖까지를 稱하야 李朝의 四祖라 한다.
02-윤03-21[02] 영안북도 절도사 이조양이 야인 문제를 치계하다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이조양(李朝陽)이 치계(馳啓)하기를,
...................
또 아령개(阿令介)에게 말하기를, ‘네가 비록 이이후 등 용맹스러운 사람을 잃는 것을 한으로 여기나 그들이 오기 전에도 너는 역시 장수가 된 지 오래였으니, 어찌 그들에게 의뢰하겠는가. 또 포주(蒲州) 화라온(火剌溫)으로 들어가는 일에 대하여는 매우 불가하다. 네가 이마거(尼亇車)와 원수진 지 오래였으니, 그들이 이 땅에 와서 산다면 이마거 등이 너를 원망함이 더욱 심할 것이니, 친히 거느리고 가서 우지점(亐知岾)으로 보내 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또 마가무(馬加茂)ㆍ나양가(羅陽加) 등에게 말하기를, ‘당초에 이부롱고(李夫弄古) 등이 나왔을 때에 이미 진장(鎭將)을 시켜서 본토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는데도 너희들이 여태까지 오래 머물고 있었으니 이미 죄를 지었는데, 이제 그대로 두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너를 중한 죄로 다스리겠다.’ 하였더니, 아령개(阿令介)는 대답하기를, ‘올적합(兀狄哈)과 원수진 것을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요, 국가의 명이 두려우니, 곧 독촉하여 돌려보내겠으나, 그들은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다른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하고, 마가무(馬加茂) 등은 대답하기를, ‘아령개가 보수(保授)하는 이이후 등이 만약 돌아간다면 우리들이 보수(保授)하는 이부롱고(李夫弄古) 등도 역시 들여보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후에 또 온성진(穩城鎭)에 이첩(移牒)하여 독촉하여 본토로 돌려보내라고 하니, 온성진의 회첩(回牒)에, ‘세 번이나 통사(通事)를 보내서 돌아가라고 독촉하였으나 머뭇거리고 곧 내어보내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아령개ㆍ마가무ㆍ나양개 등을 불러서, 이이후 등이 곧 나오지 않는 까닭을 물었더니, 아령개는 대답하기를, ‘마을 안에 와서 사는 이이후 등 27명과 우지(亐知)에서 뒤떨어진 타당개(他堂介) 등 27명 및 뒤따라 나온 기소합(其巢哈) 등 47명에게 국령(國令)으로써 돌아갈 것을 독촉하였더니, 이이후 등의 말이 ‘본토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이마거(尼亇車)에게 살해를 당할 것이므로 화라온(火剌溫) 부락으로 투입하려고 한다. 다만 지금 농사철이라, 먼 길을 떠나 가느라면 그쪽에 가서도 역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생계가 어려우니 지금 가흘라(加訖羅)에서 서쪽으로 단숨에 갈 만한 거리인 남경(南京) 냇가에다 장막을 짓고 살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들어가려고 한다.…’ 하며, ‘이달 초7일에 아울러 처자까지 거느리고 돌아가겠다.…’ 하였습니다. 또 아당지(阿堂只)에게 묻기를, ‘이이후 등과 우지(亐知)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이 오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처음에 곧 진(鎭)에 알리고서, 그 뒤를 따라 나온 기소합(其巢哈) 등에 있어서는 나오게 된 원인을 애초부터 알리지 않았으며, 변장의 처분도 없이 우거(寓居)를 허하는 것이 불가하다.’하면서 힐문(詰問)하니, 대답하기를, ‘기소합(其巢哈)은 3월 보름경에 마을 안에 왔었는데, 전자에 이미 이이후에게 거주할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예라 생각하고서 곧 아뢰지 않았습니다.’ 하며, 마가무ㆍ나양개 등은 말하기를, ‘마을에 와서 우거하는 올적합의 소소고(所巢古)ㆍ살지(撒知) 등 10명과 이부롱고(李夫弄古) 등 4명이 아울러 하는 말이 장차 남경(南京)으로 가서 살겠다 하며, 처자를 거느리고 나갔다.’ 합니다. 남경도 역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주접을 허할 수 없으므로 다시 온성진(穩城鎭)에 말하여 본토로 돌아가도록 독촉하게 하였으나 만약 머뭇거리고 본토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조치를 하오리까?”
하니, 정부와 육조에 의논하게 하였다.
【원전】 13 집 96 면
【분류】 외교-야(野)
[주-D001] 보수(保授) :
보석(保釋)된 사람을 맡음.
[주-D002] 향도(嚮導) :
길잡이.
02-윤03-22[03] 어세겸ㆍ이세좌 등이 야인 문제를 의논하다
...
이극돈(李克墩)은 의논드리기를,
“저들의 말이 ‘장차 화라온(火剌溫)의 포주(蒲州)로 투입한 뒤에 사변이 있게 되면 후회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 것은 모두 우리를 희롱하는 말이오나, 이 때문에 우리 계책을 스스로 꺾을 수는 없으니, 전자의 사목(事目)에 의하여, 절도사로 하여금 반복하여 타이르고 혹은 훈계도 해서 기어이 본토로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다만 성종조(成宗朝)에 있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 동약사(童約沙)가 만포(滿浦) 강가에 와서 살므로 우리 나라에서 돌아가라고 독촉하니, 동약사가 추수(秋收)한 뒤에 돌아가겠다고 청하므로 국가에서도 역시 그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이 예에 의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농작물을 거둔 뒤에 옮겨가겠다고 말하니, 네 말이 불쌍하다. 과연 이때에 돌아간다면 여기서나 저기서나 농사철을 놓칠 우려가 있으니, 우선 여기에 머물러서 파종한 농작물을 거둔 뒤에 곧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하여, 이로써 타이르고, 저들의 답변을 들어서 다시 아뢰어 취품(取稟)하게 하소서.”
하고, 성준(成俊)ㆍ성세명(成世明)은 의논드리기를,
“이이후 등이 답한 사연을 보면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방어(防禦)로 말하오면 양계(兩界)가 다 중요하나, 평안도(平安道)가 더욱 긴절하온데, 지금 서쪽인 남경(南京)으로 옮긴다면 형세가 반드시 점차 포주(蒲州)로 들어가게 되어 평안도의 피해는 반드시 전보다 더할 것이니, 우선 절도사로 하여금 거취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여 만일 반드시 장차 서쪽으로 옮기고 영영 본토로 돌아갈 리 없을 것 같으면, 남경은 종성(鍾城)과 거리가 그다지 가깝지 않고 올량합(兀良哈)의 부락이 많이 살고 있으니, 굳이 쫓을 것은 없습니다.”
하고, 유지(柳輊)ㆍ박건(朴楗)ㆍ신준(申浚)ㆍ윤효손(尹孝孫)은 의논드리기를,
“이이후 등이 들어온 뒤에는 그 종족이 잇달아 따라올 것이니, 이렇게 되면 형세가 장차 번식(蕃息)되므로 반드시 본토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나, 지금 그들의 말이 ‘20여 일 걸리는 화라온(火剌溫) 등지로 이사할 의향이나 다만 지금 농사철이어서, 먼 길을 가자면 농사철을 놓치게 되니 생활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가흘라(加訖羅)의 서쪽으로 한숨에 갈 만한 거리인 남경(南京)에 장막을 치고 살다가 가을이 되면 들어가겠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므로, 강박하게 쫓아내서는 안되며, 말하기를, ‘지금 농사철에 있어 보금자리를 잃지 않을까 걱정하여 곧 돌아가라고 독촉하지 않는 것이니, 추수가 끝나면 곧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가을을 기다려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순(柳洵)이 의논드리기를,
“야인의 성질이란 미련하고 사나워서 변화되기 어렵고 오직 이익만 따르는데, 지금 그들이 이미 가까운 경내로 이주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으니, 비록 온갖 방법으로 효유하더라도 마침내 돌아가는 것을 볼 리는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병위(兵威)를 사용해서 강제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심어 놓은 보리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강박하게 쫓아낼 수는 없으니, 가을을 기다려서 본토로 돌아갈 것을 돈유(敦諭)하여 저들로 하여금 머물러 있지 못하게 될 것을 미리 알게 하고서 가을이 되면 위명(威名)이 있는 장수를 보내어 타일러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김경조(金敬祖)ㆍ김심(金諶)은 의논드리기를,
“국가에서 이미 이이후 등이 바치는 성의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빨리 거절해야 할 것이요 고식으로 나가서는 안 되오니, 다시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전일의 뜻을 거듭 타일러서 빨리 본토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겸(世謙) 등의 의논에 따랐다.
【원전】 13 집 98 면
【분류】 외교-야(野)
02-08-07[01] 병조 판서 성준 등이 야인 문제를 의논하다
병조 판서 성준(成俊)ㆍ참판 허침(許琛)ㆍ참의 이숙함(李叔瑊)이 아뢰기를,
“전일에 가흘라(加訖羅) 지방에 와서 거주하는 이마거(尼亇車)를 본토로 돌려보내라 하였는데도, 저들이 즐겨 돌아가지 않고 남경(南京) 지방에 옮겨 살고 있으니, 올 추수 때에는 강제로 본토에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위의 사람들이 이미 본토를 배반하였으니, 만약 강제로 돌려보낸다면 반드시 포주(蒲州) 등지로 들어갈 것입니다. 올적합(兀狄哈)은 성질이 본디 날래어 싸움을 잘하여 다른 종족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야흐로 건주위(建州衛) 야인이 자주 우리 경계를 범하여 좀도둑질하여 마지않는데, 또 이마거(尼亇車)를 저 땅으로 쫓는다면 다시 한 적이 생겨서 그 기세를 보태 주는 것이니, 옳은 계책이 못 됩니다. 남경은 종성(鍾城)과 거리가 2식(息) 반 길이니, 그 중간에 반드시 귀화한 야인이 살아서 조금만 성식(聲息)이 있으면 곧 와서 고하여 다 알지 못함이 없을 것이므로, 이마거(尼亇車)가 여기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남경은 우리 땅이 아님에리까. 저들이 또 조정의 명령을 좇지 않는다면 어찌 강제로 쫓겠습니까. 돌아가라고 독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이계동(李季仝)은 변방 일을 아는 사람이니, 같이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마거(尼亇車)를 강제로 송환(送還)하는 것의 가부(可否)에 대하여는 전임 정승과 정부와 육조의 판서와 이계동에게 의논한다.”
하였다.
【원전】 13 집 131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 1식(息) ; 30리
동광 제36호 |
1932년 08월 01일 |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
新京에서 流浪生 |
문예기타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新京에서 流浪生 세계적 불경기의 모진 바람이 온 천하를 휩쓸고 잇는 이때 그닥 멀지도 않은 蒙古 어떤 오지에는 金銀寶珠가 매장되어 잇어 一小山을 이루어잇다 하면 묻는 이들은 반드시 어리석은 자의 헛소리로 돌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소리도 풍설도 아니요, 사실임에야 어찌하랴. 金銀寶珠가 쌓이어 한 조그마한 山形을 이루엇으며 이곳을 가르켜 蒙古人들은 「이보아산」(寶山의 意)이라 한다. 즉 寶山이라는 뜻이다. 洮南에서 2백리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 그 소재지를 알고 싶을 것이니 여기에 이 寶山, 다시 말하면 천고의 秘藏이 든 이 寶山의 노정 안내를 무료로 日久月深에 그립고 그리운 2천만 동포에게 공개코저 한다. 그러면 그 蒙古 奧地라고 하면 이는 필시 인적이 들어가 보지 못한 그야말로 險路일 것이나 하는 생각이 잇을 것이나 사실은 이와 정반대로 그러케 먼 곳도 아니요, 險路가 되여 인적 不到處가 아니고 겨우 蒙古人의 촌락도 15리 조금 남짓하게 떠러저 잇는 곳이다. 북만주 洮南 즉 蒙古 입구인 洮南으로부터 西으로 2百 中里(朝鮮 里數와 별반 차이가 없음) 稍遠의 지점에 突泉縣이란 호수 3백 호쯤 되는 小도회지가 잇다.(지도에도 잇다)<72> 여기에서 서남으로 中里 40리 되는 곳에 圖汁葉圖王府라는 蒙古 王府가 잇고 예서부터는 완전히 純 蒙古 지대인데 이 王府로 부터는 북으로 勒河라는 河水를 끼고 逆하여 올라가기 약 40中里를 올라가면 「데레오도」라고 칭하는 蒙古 부락이 잇고 그 부락에서-5中里의 거리에 蒙古땅에서는 얻어 보기 드문 오아시쓰를 연상케 하는 수목 울창한 小山이 잇으니 이것이 즉 寶山인 것이다. 高麗族의 유적 그런데 이 寶山의 전설로써 于今에 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방은 북으로 산을 끼고 남으로 열리어 小河가 흐르고 잇어 實로 沃野千里이나 이 땅이 金遼시대에 벌서 高麗族의 손으로 개척되어 당시에는 극히 융성한 바 잇엇다 한다. 지금에도 高麗 城跡이 3개소 鼎足의 형으로 존재하엿든 터전이 남어잇다. 듣는 말에는 元朝가 일어나매 高麗族은 맛츰내 戰敗되어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이 되어 그곳에 잇든 3城主는 자기들의 소유물인 金銀財寶가 그대로 敵手에 들어갈 것을 참을 수 없어 세 城主는 서로 의논하고 비밀히 각각 자기들의 보화를 한데 뭉치어 이 小山에다가 깊이 매장하여 버렷다. 이것을 묻을 때 다시금 捲土重來의 勢로 이곳을 찾아 앞날에 전승을 기하야 다시금 이 財寶를 찾는데 소재를 판명케 하기 위하여 천연석에다 암호문자로 써 둔 것이 잇다. 이 文字가 불가사의의 자체(X, 滿, 蒙) 세 가지의 자체로 써 잇는데 기이하게는 刻書가 안이라 암석 우에 그대로 쓴 것인데 그 후 수 백년의 풍우에도 변화됨이 없이 오늘까지 나려 왓는데 지금도 원만큼만 주의하면 능히 읽어볼 수 잇다 한다. 조금씩 剝落된 處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알어 낼 수 잇으리라 한다. 蒙古人들에게 들어보면 이때 高麗 사람들의 모든 기술은 正히 神을 놀래게 하는 바 잇어 이 高麗人들의 쓴 것이라 그 자획이 石心에까지 침투되어 乃至 幾千年이 되어도 소멸됨이 없으리라고 한다. 그 後 元朝가 더욱더욱 왕성하게 됨에 따라 高麗族은 최후로 敗退를 하게 되어 마츰내 지금토록 옛 주인은 한번 가고 돌아오지 않어 그대로 남어 잇게 된 것이다. |
'백두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는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0) | 2022.10.12 |
---|---|
삼천 리 밖 종성 사막에 던져져 회오리바람 흑룡강가에서 불어오네 (0) | 2022.10.12 |
압록강에서 책문(栅門)까지 120리 지역은 옛날 폐사군(廢四郡) 지역 (0) | 2022.10.02 |
기연곡(起輦谷)은 사막 가운데에 여러 대를 모두 이곳에 장례하였고, (0) | 2022.10.02 |
강 가운데의 섬 호로투(胡盧套)는 너희 나라 땅이다. (0) | 2022.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