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30. 16:51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안면곶과 남면 드르니 지금은 바다가 된 곳
1)안면곶 착항의 기원
원래 안면도는 태안의 백화산을 발원으로 한 지맥이 남으로 치닫으면서 서편으로는 황해 대양과
동편으로는 천수만을 끼고 낮은 구릉으로 굽이굽이 130리 길 안면곶의 남단 영항까지 뻗어내린
안면반도였다.
지금으로부터 약350년전인 조선조 제 16대 인조임금 때 그 안면도의 2/5지점이자 가장 좁은
목이 되는 이른바 굴항포(堀項浦) 또는 별칭 ‘목탄개’라는 곶(串을) 잘라 섬이 되게 하였다고한다.
다만 이런 기록은(서산대관)이나(서산군지)에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되었을 뿐이다.
즉, 안면도의 착항은 영호남의 세곡선 운항에 편의를 도모하여 조선조 인조때에 영의정
김류가 착통케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연하고도 희미한 기록과 전언은 뜻있는 이곳 주민으로
하여금 항상 회의를 갖게 하였다. 굴항포(목딴개,목탄개)의 착항 내력, 즉 착항 연대, 착항 위치
착항공사과정 등의 문제가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굴항포 운하가 역사적 흔적 남아
원래 안면곶이었던 것을 삼남지방의 조곡을 운반하던 조곡선들이 풍랑에 유실되는 쌀과 곡물 등이 많이 유실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장 조곡선의 난파가 심했던 지역인 태안반도의 안면곶을 굴착 섬으로 만든다.
조선 인조 16년 (1638년)에 안면곶을 착항해서 지금의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의 창기리 서북단의 판목 불탄개, 옛지명 굴항포(掘項浦)를 착항했다는 조선왕조 신록에 기록이 나타나 있다.
안면도는 육지와 이어졌던 태안군 남면 신온리의 마을 남단과 안면도 창기리의 판목 마을을 인공으로 잘라서 만들어진 인공섬인 것이다. 지금도 천수만 내쪽으로 운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8년 임자 > 1월 13일 > 최종정보
영조 8년 임자(1732) 1월 13일(신미) 맑음
08-01-13[15] 진수당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송성명 등이 입시하여 《예기》를 진강하고, 영변의 철옹산성에 곡물을 비축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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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이선은 나아오라.”
하니, 이선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안흥(安興)의 일은 지금 이미 그만두었으니 굳이 다시 논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박문수(朴文秀)가 적간(摘奸)한 뒤에 진달한 것이 그대와 차이가 있으니, 그 이해(利害)의 형편을 그대는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이선이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어리석고 얕은 견해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지만 전에 이미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가 진달한 바가 있으니 다시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에는 만에 하나도 잘못이 없지만 무인의 소견이기 때문에 끝내 펴지 못하니 개탄스럽고 안타까운 것 외에는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안흥의 지도에 의거하여 논하면 일의 성취를 밝게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지도가 있는가?”
하니, 이선이 아뢰기를,
“현재 신의 소매 속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시라도 물을까 생각하고 미리 가지고 왔으니 그 근실하고 든든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대는 지도를 펴서 그 형세를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이선이 그 지도에 의거하여 가리키면서 형편을 아뢰기를,
“이 진(鎭)은 처음에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가 절수(折受)한 땅으로, 본래 해상 방어의 요충지이므로 곧 강도(江都)의 목구멍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효묘(孝廟) 때부터 해상 방어의 중요성을 진념(軫念)하여 나주(羅州)의 옛 목장과 바꾸어 주고 산성을 축조한 다음 보장(保障)으로 삼았으니, 그 설치한 본의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 기유년(1729, 영조5)에 호조에서 한결같이 다른 둔전의 예(例)에 따라 본조(本曹)에 섞어 귀속하게 하였습니다. 전임과 후임 감사(監司)가 누차 계문(啓聞)하였는데 호조에서 끝내 반대하는 내용으로 아뢰었으므로 토졸(土卒)이 보전하기 어려워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초부터 바꾸어 지급한 둔토(屯土)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준 것은 오로지 민병을 모집해 들여서 보호하며 성을 지키려는 본의(本意)에서 연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소신이 백성을 편안히 하는 진장의 도를 행하고 바꾸어 지급한 선조의 뜻을 본받아 누차 비국(備局)에 보고하였고, 마침내 입계되어 되찾고 나자 민졸(民卒)이 안도하여 진중(鎭中)의 모든 것을 마음을 다해서 정비하였습니다. 제언(堤堰)을 쌓아 수로를 통하게 하는 일은 실로 본진(本鎭)의 아주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소신이 그 당시 감사 이성룡(李聖龍)과 상의하고 검토하였으며, 적간하여 계문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신임 감사 신방(申昉)이 교귀(交龜)하는 일이 급해 미처 계문하지 못하자, 전임 감사 이성룡이 어사 및 신임 감사와 상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어사 오원(吳瑗)이 명령을 전달하여 소신을 초치하였으나, 소신은 관직 생활이 변변치 못해 마침 폄척(貶斥)을 당한 터라 비록 나랏일이 중요하지만 일의 체모 때문에 가서 살펴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탈이 있다고 자세히 보고하고 끝내 체직되어 왔습니다. 대개 사적(沙磧)이 이와 같기 때문에 공적이거나 사적인 뱃짐이 매번 치패(致敗)하여, 이른바 건진 쌀을 연해 각 고을의 백성에게 나누어 준 것이 홉(合)에 지나지 않건만 억지로 말(斗)의 쌀을 징수하여 민간에 끼치는 해가 특히 지극히 참혹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이 일을 성취하여 물길을 순조롭게 통하게 하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팔도에서 받을 혜택이 고금에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문수가 진달한 내용에, ‘뱃길이 원산(元山)에서 안흥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강화(江華)로 나아간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안흥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니, 이선이 아뢰기를,
“당초 간사한 자가 훼방을 놓은 탓에 굴항도(堀項島)의 물 밑은 온통 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의정이 나라를 위해 일을 신중히 하는 방도로 과연 적간하였지만, 적간한 것은 다만 그 반석의 유무만 살폈을 뿐입니다. 몇 길의 쇠기둥을 좌우에 두루 꽂아 보니 원래 편석이 없어 깊숙이 몇 길쯤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반석의 유무는 이것에 근거하여 단정하였지만 배가 운행하기 어렵고 쉬움은 단지 파냈거나 쌓여 있는 모래가 몇 길인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뱃길로 말하면 안흥을 피하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방을 쌓으면 비록 물길을 통하게 할 수 있지만 산성은 허술해진다고 하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이선이 아뢰기를,譔曰, 安興山城, 比他特異者, 連陸四十里, 跨海成島, 山城外, 泰山數疊, 周抱高低, 皆是泰山及內外帶河也。虛疎云者防水也。而其水一日兩潮退之水, 則無水時 便是大路大野, 有水時, 便成一江, 可通船路
“안흥산성(安興山城)이 다른 곳에 비하여 특이한 점은 연륙(連陸) 40리에 바다를 건너 섬을 이루고 산성 밖에 태산(泰山)처럼 높고 큰 산 여러 겹이 두루 싸며 높고 낮게 솟아 있으니 모두 태산과 그 내외를 둘러싼 강과 같습니다. 허술하다고 한 것은 수로에 대한 방어입니다. 그 물은 하루에 두 번 밀려왔다가 나가는 물이니, 물이 없을 때는 곧 큰 길과 큰 들이 되고 물이 있을 때는 곧 하나의 강을 이루어 배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적(賊)이 이때를 노리면 수륙 양쪽 모두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방죽을 쌓으면 수로가 즉시 끊기고 작답(作畓)하여 진창으로 변하면 육로 또한 어렵습니다. 또 본성(本城)에는 밭은 있지만 논은 없어 약간의 토졸이 생활해 나가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2월부터 8월까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각자 힘써 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돕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에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폐단이 빈빈하게 발생하여 성을 지킬 토졸이 없으니 실로 우려할 만합니다. 만약 이 방죽을 완성하면 방죽 안의 작답한 것이 혹자는 5, 6백 섬의 땅이라고 하지만 소신(小臣)은 100여 섬이라고 여기며, 백성을 모집할 수 있는 것이 혹자는 5, 6백 호(戶)라고 하지만 소신은 비록 100여 호라도 원래 거주하고 있는 토졸과 성을 떠나지 않고 사시사철 항상 머무르면 곧 사람이 사는 성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위급한 일이 있으면 한 번 호령하여 부르는 사이에 노소(老少) 군졸이 일제히 모일 것이니, 어찌 성을 지키는 일이 군색할까 근심하겠습니까. 형세가 이와 같기 때문에 소신이 감히 얕은 의견을 낸 것이니, 일거에 서너 가지 이득을 보는 이점(利點)이 있습니다. 현임 재신(宰臣) 박문수(朴文秀)는 적간할 당시 물길의 원근과 산성의 험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굴항도에 반석이 있는지 없는지만 살폈습니다만 물길은 육로와 달라 가까운 것 같지만 멉니다. 그러므로 한때의 소견이 각각 집착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당초 우의정이 물력(物力)과 역정(役丁)의 다소를 물어서 알아본 적이 있는데, 소신은 그 본진(本鎭)의 첨사(僉使)로 하여금 담당하여 일을 시작하게 해서 그 요포(料布)를 지급하는 일 없이 목책을 서서히 세워 그 물길이 순하게 통하는지 시험해 보아 연해 백성의 소원을 한결같이 따라 주고 목책을 세운 뒤에 쌓는 일을 완성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고 물력과 역부도 아주 많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신이 재임할 때 수량 외의 군향(軍餉) 100여 섬을 조사해 내어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비국의 회안(會案)에 이전하였으니, 비록 이러한 양곡을 제하더라도 충분히 일을 이룰 수 있는 물력이 됩니다. 마침 그때에 안흥진 굴항도에 바람에 꺾인 소나무 3000여 그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무는 목책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좋기 때문에 신이 이러한 뜻으로 우의정에게 말하니, 우의정도 그렇게 여겨 이미 낭청을 보내 적간하였다고 합니다. 국고가 고갈된 이런 때에 경비와 물력이 만금이 드는 공사를 어찌 함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바람에 꺾인 소나무의 목재로 그 사적의 좌측을 메우고 또 바자(笆子)로 막아 사적이 저절로 무너지면 수로가 순하게 통하여 아마 대소 공사(公私)의 배가 취재(臭載)하는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박문수의 말에 일리가 있었는데, 지금 이선의 말을 들으니 그의 뜻은 끝내 석연치 않지만 또한 일리가 있다.”
하였다
[주-D009] 물길 :
원문은 ‘氷路’인데, 문맥을 살펴 ‘氷’을 ‘水’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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