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群山)과 강경(江鏡)포구에서 전주까지의 모두 200리인데

2022. 10. 25. 21:10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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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6 기해(1899) 4 18(을미, 양력 5 27) 맑음

36-04-18[10] 함녕전에서 전주를 봉심한 궁내부 대신을 소견할 비서원 박돈양 등이 입시하여 봉심한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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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亥時).
상이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전주(全州)를 봉심한 궁내부 대신이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원 승 박돈양(朴暾陽), 비서원 낭 김하용(金夏容)ㆍ민광식(閔廣植),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 봉심한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이재순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전주 조경묘(肇慶廟)로 달려가서 사당 안을 봉심하니 안녕하였고, 이어 경기전(慶基殿)에 나아가 전 안을 봉심하니 안녕하였고, 이어 조경단(肇慶壇)에 나아가 단소(壇所)를 봉심하니 안녕하였는데, 한창 단(壇)터를 수축(修築)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당 안, 전 안, 단소가 안녕하였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안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터 공사를 한창 하고 있다는데, 석재(石材)는 어느 곳에서 나오며 품질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석재는 그 부근에서 찾지 못하여 십여 리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 오는데, 품질은 좋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열성조께서 미처 하지 못하신 일인데, 공사가 빨리 진척된다면 매우 다행스러울 것이다.”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많은 백성들이 서로 기뻐하며 공사에 달려오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자식이 아비의 일에 달려오듯 백성들이 달려온다.’는 것과 같습니다. 품삯을 받지 않고 자원(自願)하여 온 자들이 많이 있으나 일한 날짜를 계산해서 공전(公錢)으로 품삯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역(封域)은 어떻게 하였는가?”

하니, 이재순 아뢰기를,

“신이 상지관(相地官)과 함께 주룡(主龍)에서 내려가 보니, 모래 언덕이 조금 높고 산세가 껴안는 듯한 형상이었으며, 아래에는 사초(莎草)가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곳이 있었는데, 전하는 말로는 이곳이 묏자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덤을 썼던 곳이라고 추측되는 곳에서 단터까지의 거리는 몇 보나 되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무덤을 썼던 곳이라고 의심되는 곳을 수리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므로 그 아래 십여 보쯤 떨어진 곳에 공사를 하고 있는데, 비석은 단 옆에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자각은 굳이 세울 필요가 없으나 곡장(曲墻)은 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곡장을 당연히 축조해야 할 것입니다만 만약 와전(瓦磚)을 쓰면 혹 견고하지 못하여 빈번하게 개수해야 할까 근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일체 성가퀴 모양을 따르되 되도록 견고하게 하도록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곡장을 축조하면 문로(門路)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정자각처럼 곡장의 앞뒤에 문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유적(遺蹟)은 상고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운봉(雲峯)으로 개선할 때의 기적비(記蹟碑)는 있을 듯하다.”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자만동(滋滿洞)은 발리산(發李山) 오목대(梧木臺) 곁에 있는데, 바로 목조(穆祖)가 잠저(潛邸)하셨던 곳입니다. 오목대에 일찍이 사적을 기록한 돌 한 조각이 있었는데, 동학란(東學亂)에 유실되어 지금은 상고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완산(完山)에도 기적비가 없다고 하니, 이번에는 기적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완산은 유명한 산입니다. 만약 백성들 중에 그곳에 묘를 쓰는 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가뭄이 들어 고을 안의 우물이 말라 버리곤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이러한 징후가 있으면 무덤을 찾아내어 파버렸으므로 아무도 감히 속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기적비를 세우는 일은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완산과 건지산(乾止山)은 고을의 어느 쪽에 있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완산은 고을의 남쪽에 있고 건지산은 고을의 서쪽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한(三韓) 시대의 호적(戶籍)이 전해 오는 것이 있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신도 뜻한 바가 있어 문헌을 널리 찾아보았는데, 세대가 오래되어 끝내 증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소(壇所)에서 완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며, 종성(宗姓)인 사람 중에 이곳에 사는 자는 모두 몇 가호나 되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단소에서 완산까지의 거리는 10리에 불과하며, 종성인 사람은 많게는 근 천 명에 이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소의 높이는 어떠한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산세가 높지 않으므로 단소도 낮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세는 수릉(綏陵)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수릉보다 훨씬 낮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룡(主龍)과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는 과연 아름다운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국(局)의 형세가 맑고 아름다우니, 지난번에 올린 산도(山圖)는 오히려 실제의 7분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비록 풍수지리를 알지는 못하나 홍릉(洪陵)의 묏자리를 잡으려고 찾아다닐 때에 지사(地師)를 많이 따라다니면서 여러 산을 두루 다녀 보았는데, 이 산처럼 좋은 곳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능침(陵寢)은 장려(壯麗)함만을 취하였으니, 만년토록 무궁한 국가의 복은 이 산에서 말미암을 듯하다.”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건지산의 단(壇) 아래에 못 하나가 있고 못가에는 옛날 정자 터가 있는데, 종성(宗姓)인 사람들이 전에는 해마다 한 번씩 단소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백성들이 추모의 정을 펼 길이 없어서, 정자를 짓고 못을 잘 소통시켜 못 속에 자라는 연밥을 따서 장차 변변치 않은 정성이나마 바치려고 재물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과 본 고을의 관원 또한 각각 20원(元)씩을 내서 보조해 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뱃길로 다녀왔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뱃길을 경유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주(全州)에서 가까운 곳의 뱃길은 모두 몇 곳이고 어디에서 탔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군산(群山)과 강경(江鏡) 등의 포구에서 전주까지의 거리가 모두 200리인데, 군산에서 탔습니다.”

하였다. 상이 봉심한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