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6. 17:10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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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조운(漕運)에 이용된 수로(水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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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忠烈王) 기축년(1289, 충렬왕15)에 원(元)나라가 요동(遼東)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쌀 10만 석을 요구하였으므로 고려가 6만 4천 석의 쌀을 개주(蓋州)로 실어다 준 일이 있으며, 신묘년(1291)에는 우리나라가 기근이 들어 원나라가 강남(江南)의 쌀 10만 석을 우리나라로 운반해 온 일이 있다. 또 원나라 장수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10만 석을 운반하여 강화(江華)에 비축하기도 했으며, 을미년(1295)에는 요동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5만 석의 쌀을 요동에 실어 보내 주도록 하기도 하였다.
아조(我朝)의 선조 25년(1592)에 명나라가 산동(山東)의 쌀 10만 석을 실어다가 우리나라 남도(南道)의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는 중국의 등주(登州)에서 양향(糧餉)과 금백(金帛)을 실어 날랐는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인조 18년(1640)에 쌀 1만 석을 삼차(三叉)의 대릉하(大凌河)와 소릉하(小凌河)에 운반하였으며, 갑신년(1644, 인조22)에는 또 1만 석을 운반하였고 을유년(1645, 인조23)에는 칙자(勅咨)로 인하여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쌀 9만 5천 석을 연도(燕都 북경(北京))에 운반해 주었다.
《송사(宋史)》에는 중국의 명주(明州)에서 배가 떠나서 8일 만에 우리나라 경계에 들어오고 또 8일 만에 벽란도(碧瀾島)에 닿았다고 하였으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예성강(禮成江)에서 배가 출발하여 6일 만에 명주에 도착하였는데 사실 바다를 건너는 기간은 2, 3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정몽주는 남경(南京)이 8천 리 거리인데 90일의 일정(日程)이 된다고 하였고, 《제주지(濟州志)》에는 원나라에 갈 때에 명월포(明月浦)에서 배가 떠나서 7일 밤낮이면 그 서안(西岸)에 오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괴원(槐院)의 등록(謄錄)에는 선사포(宣沙浦)에서 배에 올라 등주(登州)까지 가는 거리가 3760리라 하였으며, 제도부(齊都賦)에는 바다가 옆으로 삐죽 나온 것이 발해(渤海)인데 실로 이것은 하나의 큰 포구(浦口)라고 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제(齊)나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였는데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상시로 왕래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 말하면 등주의 성산(成山)이 발해의 동쪽으로 가장 깊이 들어온 곳이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장연(長淵)이 또한 발해의 서쪽으로 가장 깊이 들어간 곳이니 그 거리가 서로 가깝다고 하겠다. 그런데 백령도(白翎島)로 말하면 이는 또 이 장연보다도 더욱 서쪽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등주에서 고기잡이를 나온 자들이 흔히 백령도를 거쳐서 왕래하기도 하는데 지금 이 백령도에는 가끔 중국의 매 등이 날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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