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6. 11:01ㆍ고대사
인조 14년 병자(1636) 8월 22일(계사) 맑음
14-08-22[09] 평양에서 기자의 봉토와 무덤을 지나다가 지은 황 감군의 시
[DCI]ITKC_ST_P0_A14_08A_22A_00100_2013_035_XML DCI복사 URL복사
황 감군이 평양에서 기자(箕子)의 봉토(封土)를 지나가다가 느낀 바가 있어 지은 시〔黃監軍平壤閱箕封有感韻〕는 다음과 같다.
약법 팔장으로 기자가 봉토를 여매 / 約法八章闢箕封
정전의 훌륭한 정사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네 / 井田善政至今存
만국의 의관은 모두 저마다 - 원문 빠짐 - / 萬國衣冠俱殊 缺
유독 상나라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해 중화의 풍습과 같다네 / 獨羨商裔華風同
문학과 풍류는 학문의 고장 업을 뒤따르고 / 文學風流追鄴下
빼어남을 다투는 산들은 푸른 유수(溜水)에 견줄 만하네 / 山壑競秀竝溜 缺
그대 군병들을 잘 다스려 강토를 견고히 하고 / 詰爾戎兵固彊圉
대대로 동쪽 번병을 지키니 상공이라 불릴 만하다네 / 世守東藩稱上公
기자의 무덤을 바라보다가 느낀 바가 있어 지은 시〔望箕塋有感韻〕는 다음과 같다.
당시에 거짓으로 미치광이 짓하고 주나라 신하 되기를 부끄러워하여 / 當年 缺 狂恥臣周
홍범 구주로 대경대법을 열었다네 / 洪範九疇闢天經
약법 팔장은 그 유택이 먼 훗날까지 전해져 / 八章約法流澤遠
만년된 궁검(弓劍)이 아직껏 그 모습이 새롭다네 / 萬年弓 缺 象新
[주-D001] 푸른 유수(溜水)에 :
원문은 ‘溜 缺’인데, 차운의 운자(韻字)에 근거하여 ‘靑’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2] 거짓으로 미치광이 짓하고 :
원문은 ‘缺 狂’인데, 문맥을 살펴 보충 번역하였다.
[주-D003] 궁검(弓劍)이 아직껏 :
원문은 ‘弓 缺’인데, 문맥을 살펴 보충 번역하였다.
명칭[편집]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상(商)'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에, '은(殷)'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개요[편집]
상나라의 시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백성을 잔혹하게 다룬 30대 주왕(紂王)이며, 주(周)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1]
역사[편집]
창업 이전[편집]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역대 치세[편집]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왕조는 다시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열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신(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주(西周)의 무왕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멸망 후[편집]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주의 무왕에 의해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관참시 당한 조조 (0) | 2022.09.06 |
---|---|
신라의 후손 남방국(南方國) 여긴 어디일까? (0) | 2022.09.06 |
story of korea 강의 내용과 관련된 청장관전서의 신라산 자료 (0) | 2022.09.06 |
한고제 후손 왕인 (0) | 2022.09.06 |
평양은 압록수 동남방에 있다 (0) | 2022.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