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9. 12:02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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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6년 기해(1899) 4월 15일(임진, 양력 5월 24일) 맑음
36-04-15[15] 함녕전에서 삼척을 봉심한 재신을 소견할 때 비서원 승 박돈양 등이 입시하여 봉심한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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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亥時).
상이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삼척(三陟)을 봉심한 재신이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원 승 박돈양(朴暾陽), 비서원 낭 민광식(閔廣植)ㆍ이의국(李義國), 궁내부 특진관 이중하(李重夏)가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 봉심한 재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이중하가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먼 길을 어떻게 다녀왔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황상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沿路)의 농사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여 보리가 모두 누렇게 말라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로(東路)의 강우(降雨)는 경기(京畿)에 비해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경기에 비해 더욱 가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서면(書面)으로 아뢴 것과 옛날 일을 간추려 뽑은 것을 보았는데, 매우 소상하여 대강 짐작이 간다. 세종(世宗) 정묘년에 처음 분묘(墳墓)를 쌓았고, 성종(成宗) 경술년에 봉역(封域)을 수축하다가 곧바로 공사를 중지하도록 명하였으니, 비록 그렇게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신중히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선조(宣祖) 경진년에 감사(監司) 정철(鄭澈)이 아뢴 것과 현종(顯宗) 임인년에 부사(府使) 허목(許穆)이 기록한 것이 어찌 상고한 바가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확실한 증거라고 이를 만하다.”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명을 받들고 사체가 더없이 중대하므로 고사를 널리 수집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삼척의 두 묘소는 멀리 태조조(太祖朝)에는 소재가 분명치 않아 실전(失傳)되었다는 한탄이 있었으니, 이는 반드시 목조(穆祖)가 사신 곳이 북방(北方)의 매우 먼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신하를 보내어 수소문하여 두 묘소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므로 성종조(成宗朝)에 봉축(封築)하라는 명이 있어 공사를 시작했는데 곧바로 중지하였으니, 그 당시 사유에 대해서는 비록 감히 추측할 수 없지만 그때 감사인 정철이 아뢴 것과 부사인 허목이 기록한 것은 증거가 확실하고 논리가 분명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꿈속에서 능묘(陵墓)를 찾아냈다는 망녕된 무리가 황지(黃池)에 묘소가 있다고 지목하면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현혹시킨 뒤로 묘소를 수축하자는 의논이 또한 중지되었습니다. 그러하니 다만 열성조께서 미처 행하지 못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실로 충분히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요, 상고할 수 있는 문헌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읍지(邑誌)》에 기재된 것이 있고, 또 《선원보략(璿源譜略)》은 바로 숙종조(肅宗朝)에 처음 편찬한 것인데 여기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조 문헌 중에 소중한 것이 어찌 이를 능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도(山圖) 및 좌향(坐向)이 고 상신 정철이 아뢴 것과 다름이 없으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체상 다만 지키고 보호하고만 말 수는 없다.”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황상께서 먼 선조를 추모하시는 정성에 대해 신은 공경과 송축을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묘소를 수축하는 일은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지산(乾止山)의 묘소는 있던 자리가 분명치 않아 제단(祭壇)만 설치했지만 삼척의 묘소는 문헌에 있는 것이어서 의심할 나위가 없다. 비를 세우고 관원을 두는 것은 전주(全州)의 전례대로 하고 묘역을 봉축하는 것은 북쪽 능침(陵寢)의 의식대로 하라. 전사청(典祀廳)과 재실(齋室)을 장차 새로 건축할 텐데, 비석과 기와와 재목은 가까운 곳에서 구해 쓸 수 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묘소 국내(局內)에 아름드리 나무가 많이 있으니 만약 새 재목으로 창건하려 한다면 베어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중요한 곳이므로 굳이 나무를 베어 쓸 것은 없다고 한다면, 삼척부(三陟府)에는 버려진 낡은 관아(官衙)가 많이 있어 기와와 재목을 운반해다가 쓸 수 있으며 비석으로 쓸 돌은 근처 10리 안에 캐 올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석으로 쓸 돌이 그 지역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강화도의 돌과 비교하여 품질은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삼척의 돌은 회색이 많아 강화도의 돌과 같지는 않습니다만 품질은 쓸 만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府)의 관사(官舍)에 모셔 놓은 붉은 색 서대(犀帶)는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운한각(雲漢閣)에 봉안하여 예로부터 공경히 받들어 지키고 보호하였는데, 햇수가 오래되어 낡아 해졌고 모양도 예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띠의 크기는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금 제도에 비하여 조금 큽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띳돈은 둥근가, 네모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띳돈은 둥급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 좀이 먹어 손상되진 않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연대가 아주 오래되어 약간 좀먹은 곳이 있습니다. 이중으로 된 궤에 봉안하였는데, 궤 위에는 영묘조(英廟朝)의 서문(序文)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궤에 판각되어 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내궤의 상판에 판각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활기동(活耆洞)의 돌담이 있던 터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또한 희귀한 일이다. 용주리(湧珠里)의 고사(古事)를 따라 비(碑)를 세우고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데, 이 활기동은 두 묘소의 사이에 있어 거리의 이수(里數)가 이미 같으니, 만약 이곳에 재실을 세운다면 해자(垓子) 안을 수호하는 일이 편리하고 좋을 듯하다.”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활기동에서 두 묘소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각각 4, 5리쯤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의 지형을 가지고 논한다면 활기동은 어느 방소에 있으며, 궁궐에서부터 동문까지와 비교한다면 거리가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노동(蘆洞)은 북산 아래일 듯하고, 동산(東山)은 남문 안의 선혜청(宣惠廳) 위일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다지 멀지 않은 듯하다. 삼척읍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노동에서는 40리이고, 동산에서는 30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직 파서 옮기지 않은 민간의 무덤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좌청룡 우백호 안에 있는 것은 이미 모두 파서 옮겼고, 그 바깥쪽 기슭에 아직 약간의 무덤이 있으나 지방관에게 특별히 신칙하여 모두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 아래에 종성(宗姓)인 사람은 얼마나 되며, 혹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넉넉잡아 수백여 명이라고 하는데, 신이 아직 다 만나 보지 못하였으니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때 만나 본 자들은 모두 어리석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제관(祭官)을 차임한다면 어떤 읍에서 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강릉(江陵), 양양(襄陽), 울진(蔚珍)이 모두 이웃한 읍인데, 울진이 더욱 가깝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릉은 산천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강산이 맑고 빼어나며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여 동협(東峽) 가운데 가장 살 만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밭이 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대밭뿐만 아니라 석류와 백일홍이 모두 있어 호남(湖南)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맥(貊)은 춘천이고, 예(穢)는 강릉인데, 지금도 옛터가 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금 고을의 치소(治所)가 바로 예국(穢國)의 옛터입니다. 신이 돌아오는 길에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에 들러 보니, 산불이 번져서 거의 사고에까지 미칠 뻔했는데,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힘을 다해 불을 꺼서 사고는 다행히도 무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질(史帙)을 꺼낼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절의 승려와 고을 백성들이 밤낮으로 불을 꺼서 그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의 풍습이 매우 가상하니, 내부 대신과 의논하여 불을 끈 백성들에게 은의(恩意)를 표하도록 하라.”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삼가 내부 대신에게 명을 전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고에 선원각(璿源閣)이 있는데, 사방에 수목이 많던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사고 위가 바로 선원각인데 예로부터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봉산(封山)이라 수목이 울창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월정사(月精寺)와는 거리가 몇 리나 되고, 승려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10리쯤 되는데, 옛 규례에는 영동(嶺東) 각읍의 승려들이 돌아가면서 번을 섰는데, 이 규례가 몇 해 전부터 폐지되어 월정사의 승려 1, 2명만 번을 서기 때문에 사고의 관리가 매우 허술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횡성(橫城)에서 강릉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독치(禿峙)는 횡성과 강릉의 접경인데 독치에서부터 강릉까지는 200리로서 땅은 넓지만 사람은 거의 살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지역은 필시 화전(火田)이 많고 수전(水田)이 없을 것이다.”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세가 높고 추워서 곡식 농사에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다만 화전으로 생계를 이을 뿐이고 수전은 거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활기동 옛터에 돌담이 있던 자리는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잡석이 동쪽과 남쪽에 5, 6칸가량 쌓여 있는데, 이것이 옛날 담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돌담 앞의 지형은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금은 보리밭이 되었는데 깊은 골짜기 가운데에서 이곳이 가장 넓고 평평하므로 예로부터 이곳을 일러 왕터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 인가는 없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왕터라고 해서 그런 것인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목조(穆祖)가 사시던 옛터이므로 거주하는 백성들이 감히 이곳에 집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성(宗姓)인 사람들이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축문(祝文)의 서식은 어떻게 쓰던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신이 축문을 보니, 당일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자신의 항렬에 따라서 ‘몇 대손 아무개가 몇 대조 장군공(將軍公)의 묘소에 감히 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어떻게 건위(乾位)와 곤위(坤位)를 구별하였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이것은 《선원보략》에 나뉘어 실려 있는데, 《선원보략》을 처음 편찬할 때 필시 《동국여지승람》과 《읍지》를 가져다 상고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국가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야 하겠다.”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국여지승람》 가운데에 전주(全州)의 사적(事蹟)도 상고할 만한 것이 있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전주에 관한 것은 신이 미처 상고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갱장록(羹牆錄)》에도 삼척에 관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묘조(正廟朝)의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 가운데 어제 책문(御製策文) 제목에 ‘미로리의 뽕나무와 삼 심은 옛 언덕이 고향의 물색과 다름없다.[未老里之桑麻舊陌 依然枌楡之物色]’고 한 것이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정조(正祖)의 뜻에도 이곳을 한(漢) 나라의 분유(枌楡)에 견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분유사(枌楡社)는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인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묘소가 있는 마을의 크기는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웅장한 산과 깊은 골짜기 가운데에 산기슭이 에워싸고 있어 마을이 모두 협소한데, 이곳은 바로 삼척의 오십천(五十川) 가운데에 가장 깊은 곳입니다. 오십천은 봉우리가 휘감아 돌고 길이 꼬불꼬불하여 물 하나에 다리 하나씩을 놓은 것이 거의 50개나 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는 것인데, 신도 열네 번 내를 건넜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열네 번만 건넜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이 물은 태백산 황지(潢池)에서 발원하는데, 열네 번 내를 건넌 뒤에는 이 물길을 떠나 활기동(活耆洞)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 건너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과연 깊은 산골인데, 지세가 오대산에서부터 구불구불하게 삼척까지 이르렀다가 묘소로 들어가는 길은 다시 서북쪽을 향하여 오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화(奉化), 안동(安東), 삼척 세 고을 사이가 태백산인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릉과 횡성(橫城) 사이가 매우 넓은데, 그 사이에 한 군(郡)을 둘 만하겠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역을 가지고 말한다면 가능하기도 합니다만 거주하는 백성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군(郡)을 둔다면 어느 곳이 가능하겠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대화역(大和驛)이 그 중간에 있는데 민가가 조금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한 군을 두면 강릉에 해가 있지는 않겠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한 읍을 나누어 두 읍으로 만들면 강릉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릉과 삼척에서 바다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모두 바다까지 10리 내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곳은 해일(海溢)의 근심은 없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지난겨울에 삼남(三南)에 해일이 일었을 때 동해에도 파도가 매우 세차게 밀어닥쳤으나 다행히 재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릉 부근에 외국 선박이 와서 정박한 일은 없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일본 어선이 종종 해삼(海蔘)을 채취해 가는데, 왕왕 우리 백성들이 어로(漁撈)한 것을 침탈해 가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군(郡)에 보고해서 영사(領事)에게 공문을 보내어 조회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해변의 어호(漁戶)들은 아주 어리석어서 관청에 고하여 쟁변(爭辯)하는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니, 그 정상이 딱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외국인이 혹 상륙하여 물건을 판매하던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일인(日人)은 보지 못하였고, 청국(淸國) 행상들은 곳곳마다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근의 인가는 어떠한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연해(沿海)와 산골의 백성들은 생계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지붕을 개초(蓋草)하는 것도 지극히 어려워 대부분 거친 삼대로 지붕을 덮고, 산골 마을에서는 전부 송판(松板)을 고깃비늘처럼 덮고 돌로 눌러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는 것이라고는 감자뿐으로, 그걸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골 백성들의 생계가 듣자니 매우 불쌍하다.”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또 이번 큰 가뭄에 보리농사가 흉년이 들었는데, 이 때문에 도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궁내부로 하여금 통지하게 하였는데, 과연 연로의 각군에서 행차를 호송하였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각 경계마다 과연 순교(巡校)가 행차를 호송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적들이 그와 같이 들끓는데, 어떻게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는가?”
하니, 이중하가 아뢰기를,
“매양 조심하면서 길을 다니고 또 황상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재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주-D001] 중간에 …… 있다 :
황지(黃池)는 강원도 삼척(三陟)에 있는데, 목조(穆祖)의 황고비(皇考妣)가 전주(全州)에서 삼척으로 옮겨 가 살다가 죽자 그곳에 장사 지내고, 목조는 북도(北道)로 옮겨 가 살아서 마침내 삼척에 있는 장지(葬地)의 소재를 잃어버렸으므로 여러 대의 조정에서 그곳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풍기(豐基) 사람 박지영(朴之英)이 꿈에 황지의 능묘(陵墓)를 찾아냈다 하고 몽서(夢書) 1책을 올린 일이 있다.
[주-D002] 분유사(枌楡社) :
분유는 느릅나무로, 고향(故鄕)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한 고조가 고향인 풍(豐)에 느릅나무를 심어 토지의 신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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