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었다.

2023. 6. 18. 16:59이성계의 명조선

 

조반

趙胖숙위(肅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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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출생사망경력유형관련 사건직업성별분야본관
조선
1341년(충혜왕 복위 2)
1401년(태종 1)
밀직부사, 동지밀직사사·개성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인물
무진피화
문신
역사/조선시대사
배천(白川)

 

본관은 배천(白川). 할아버지는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은천군 조하(趙何)이고, 아버지는 호군 조세경(趙世卿)이다. 어머니는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매부인 단평장(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웠다. 이후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었다.

1368년(공민왕 17)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원나라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돌아왔다. 1382년(우왕 8)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하정사 겸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했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1385년에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고 돌아왔다. 이 때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廉興邦)의 종 이광(李光)이 자기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최영(崔瑩)과 사전 협의를 한 우왕의 명으로 조반은 석방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과 염흥방 일당이 처형되는 무진피화(戊辰被禍, 正月之誅라고도 함.)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뒤 동지밀직사사·개성윤이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순안군(順安君)왕방(王昉)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왕의 즉위를 알렸다. 이 때 윤이(尹彛)·이초(李初) 등의 본국에 대한 무고 사실을 명황제에게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 다음해 돌아와 윤이와 이초의 사건을 보고하여 이색(李穡) 등 수십 명이 피해를 당하는 옥사를 일으켰다.

1391년 공전(公田)을 함부로 빼앗아 성헌(省憲)의 탄핵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어 죽림(竹林)으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나, 1392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해졌으며,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또한, 백관(百官)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조선 개국의 사실을 알리러 명나라에 갔다가 석달 만에 돌아왔다.

1394년(태조 3) 6월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명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렸고, 11월에는 이방원을 수행하여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5년 판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거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1396년과 1397년에도 하정사로서 명나라에 갔으나, 등주(登州)에서 제왕(齊王)의 방해로 다음해에 돌아왔다. 시호는 숙위(肅魏)이다.

 

 

탈탈(脫脫승상(丞相)  1314 ㅡ 1355

[-D001] 원나라 ……  : 

원나라 말기의 승상 탈탈(脫脫, 1314~1355) 전국적인 반란을 진압하고 사직을 지킨 영웅이었음에도 간신의 참소로 죽은 대한 애석한 마음을 담아 화상찬(畵像讚)이다. 탈탈은 원나라 사람 멸리걸(蔑里乞) 또는 멸아길대(蔑兒吉), 자는 대용(大用)이다. 마찰아대(馬札兒臺) 아들이다. 어릴 백부인 백안(伯顔)에게 길러졌다. 1340년에 백안이 교만해져 정권을 천단하자 그가 사냥 나간 틈을 내쫓았다. 지정(至正) 1(1341)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 올라 백안의 정치를 모두 개혁하고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는 제도를 회복했다. 총재관이 되어 송ㆍ요ㆍ금나라의 역사를 편수하는 일을 주관했다. 지정 12 병사를 이끌고 서주(徐州) 홍건군(紅巾軍) 진압했고, 지정 14년 장사성(張士誠)을 고우(高郵)에서 포위했다. 합마(哈麻)의 참언으로 탄핵받아 삭직되었다. 회안(淮安)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대리(大理)로 유배되고, 합마가 조서를 고쳐 보낸 사신에 의해 짐살(鴆殺)당했다.

 

 

탈탈과 고황제는 어떤 관계인가? 사망연도를 기준으로 보면 전혀 매칭이 안된다.

 조반이 돌아온 이유 : 1. 탈탈이 망하자. 2. 명이 대도를 쳐들어와서 3. 아버지가 병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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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4 무오(1498) 9 6(신축)

04-09-06[02] 한치형이 해랑도에 도망간 백성들을 쇄환하는 일에 대해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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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형(韓致亨)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해랑도(海浪島)로 도망가서 산 지가 세월이 오래되어 중국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고 언어와 복색(服色)도 역시 같사온데, 쇄환할 때에 중국 사람까지 수색하여 잡아오거나 또 상처를 입힌다면, 신은 상국과 사이가 나빠질까 걱정입니다. 신은 원컨대, 이번 정조사(正朝使)가 들어가는 길에 자문(咨文)을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보내되 쇄환의 뜻으로써 유시하오면 반드시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사신을 보내서 쇄환하는 것이 사체로 보아 매우 편하옵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아뢰기를,

“태조 고황제 때에 탈탈(脫脫) 승상(丞相)의 휘하 3백여 명이 평안도(平安道)로 투항(投降)해 왔는데, 황제는 우리 나라에 유시하기를 ‘중국 사람 10만여 호가 조선으로 귀부(歸附)하였으니, 즉시 쇄환하도록 하라.’ 하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평안ㆍ황해 양도의 백성까지 그 수효를 채워 보냈사오니, 지금에 양 도의 인민이 희소한 것도 이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지금 해랑도에서 쇄환할 적에, 잘못되어 중국인을 잡아왔다가 상국에서 만약 노하면 거짓말로 ‘많은 수효를 잡아갔으니 즉시 쇄환하라.’ 한다면 고황제 때와 같은 일이 꼭 없다고 보장하오리까. 모름지기 다시 자문을 요동에 보낸 다음, 또 통사(通事)를 도사(都司)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요동에서 만약 주문(奏問)하지 아니한다면 우리 전하께서 스스로 주문하겠다.’ 한다면, 요동에서 반드시 처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의 말이 과연 옳소.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일을 실패하는 것이오.”

하였다.

【원전】 13 집 330 면

【분류】 호구-이동(移動) / 외교-명(明)

 

 [《원사(元史) 138 〈탈탈전(脫脫)]

처음에 탈탈(脫脫)이 서쪽으로 행군할 때에 승상(丞相) 별아겁불화(別兒怯不花)가 탈탈과 쌓인 원망이 있어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였다. 합마(哈麻)가 누차 순제(順帝)에게 말하여 탈탈을 가까운 지역으로 불러 돌아오게 하니, 탈탈이 매우 덕으로 여기다가 이때에 와서 탈탈이 이끌어주어 중서우승(中書右丞)이 되었다. 그러나 탈탈은 여중백(汝中柏)을 신용하여 좌사낭중(左司郎中) 신분으로 중서성(中書省)의 일에 참여해 논의케 하였다. 그런데 평장(平章) 이하의 관원들이 일을 논의하는 것을 보고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합마는 그와 논의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를 않았다. 그 때문에 여중백이 탈탈에게 합마를 비난하자, 합마를 바꾸어 선정원사(宣政院使)로 삼으니, 지위가 세 번째가 되었다. 이에 합마는 탈탈에게 매우 앙심을 품었다.

일찍이 합마가 탈탈과 황태자(皇太子)의 책보례(冊寶禮)를 행하는 일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탈탈이 늘 말하기를, “중궁(中宮)께서 아들을 두게 되면 장차 어디에 둘 것인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탈탈이 군사를 출동하려 할 때에 여중백을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로 삼아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필하면서 조정에 남게 하였다. 여중백은 합마가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제거하려고 하였다. 탈탈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야선첩목아와 함께 도모하게 하였다. 그러나 야선첩목아는 합마가 자신에게 공을 세웠으므로 따르지 않았다.

합마는 이를 눈치 채고 드디어 탈탈을 황태자와 황후(皇后) 기씨(奇氏)에게 참소하였다. 그때 마침 야선첩목아는 병가(病暇)를 내고 집에 있었다. 감찰 어사(監察御史) 원새인불화(袁賽因不花) 등은 합마의 암시를 받고 탄핵하여 아뢰기를, “탈탈은 군사를 출동한 지 3개월 만에 조금의 공로도 없이 나라의 재정을 기울여 자신의 용도로 쓰고, 조정 관원의 반을 자신을 따르게 하였으며, 그의 아우 야선첩목아는 용렬한 재주와 비루한 기량으로 청대(淸臺 어사대)를 더럽혀서 기강의 정사를 닦지 않고 탐욕과 음탕한 마음이 더욱 드러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세 번 올라가자 조칙을 내려 야선첩목아는 도성 문을 나가서 성지(聖旨)를 따르게 하고, 또 조서를 내려 탈탈의 관작을 삭탈하고 회안(淮安)에 안치(安置)하고, 야선첩목아도 영하(寧夏)에 안치하게 하였다. 하남행성평장정사(河南行省平章政事) 태불화(泰不華)를 본성(本省) 좌승상(左丞相)으로 삼고, 평장정사(平章政事) 월활찰아(月闊察兒)에게 태위(太尉)를 더하고, 집현학사(集賢學士) 설설(雪雪)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삼아 그의 군사를 대신 지휘하게 하였다.

조서가 군중(軍中)에 이르자, 참의(參議) 공백수(龔伯遂)가 탈탈에게 말하기를, “장군이 군중에 있으면 황제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將在軍 君命有所不受〕87 또 승상께서 군사를 출동할 때 일찍이 밀지를 받았으니, 한결같은 뜻으로 진격해 토벌하는 것이 옳습니다. 조서는 잠시 열어보지 마옵소서. 조서를 열어보면 대사(大事)가 틀어집니다.”라고 하니, 탈탈에게 말하기를, “천자께서 나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내가 따르지 않으면 이는 천자와 겨루는 것이다. 군신 간의 의리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고, 따르지 않았다.

조서를 따르고 나서 탈탈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여 말하기를, “지극히 어리석은 신이 천자의 은총을 입어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을 위임받아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승리하지 못할까 겁냈습니다. 갑자기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니 천자의 은혜가 미친 것이 깊습니다.”라고 하고, 즉시 병기와 갑옷, 명마(名馬) 3천 필을 내어 제장(諸將)들에게 나누어주고 각각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월활찰아와 설설의 절제를 따르게 하였다. 객성부사(客省副使) 합랄답(哈剌答)이 말하기를, “승상께서 이번에 가시면 우리들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 차라리 승상 앞에서 죽겠습니다.”라고 하고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처음에는 탈탈을 회안(淮安)에 안치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칙지를 내려 역집내로(亦集乃路)로 옮겨 안치하였다.

대신(臺臣)들은 오히려 귀양 보낸 것이 가볍다고 하여 탈탈 형제의 죄를 줄줄이 상소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탈탈을 운남(雲南) 대리선위사진서로(大理宣慰司鎭西路)로 유배시키고, 야선첩목아를 사천(四川) 조문(碉門)으로 유배시켰으며, 탈탈의 맏아들 합랄장(哈剌章)은 숙주(肅州)에 안치하고, 둘째 아들 삼보노(三寳奴)는 난주(蘭州)에 안치하였으며, 집안 재산은 장부에 적어 관청을 시켜 모두 몰수하였다. 탈탈이 귀양 가서 대리(大理) 등충(騰衝)에 이르렀을 때, 지부(知府) 고혜(高惠)가 탈탈을 보고 자기 딸로 하여금 그를 섬기게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지어 살도록 허락하여 비록 가해자가 있을지라도 근심하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탈탈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이다. 어찌 감히 생각이 여기에 미칠 것인가?”라고 하고 겸손한 말로 거절하였다. 순제가 관원을 보내어 아경걸(阿輕乞) 지역으로 옮겨 안치하자, 고혜는 이전에 자신의 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앞장서서 철갑군을 동원하여 에워쌌다. 합마는 조서를 위조하여 사신을 보내 짐새 독〔鴧〕을 먹여 탈탈을 죽이니 그때 나이가 42세였다.

뒤에 감찰 어사(監察御史) 성노(聖奴)ㆍ야선(也先)ㆍ살도실리(撒都失里) 등이 다시 말하기를, “간사한 자들이 대신을 모해하여 적에 임한 장군을 바꾸는 짓을 하여 우리나라의 군사 업무가 떨치지 못함이 이로부터 시작되고, 전량(錢糧)의 소모가 이로부터 시작되고, 도적이 방자하게 일어남이 이로부터 시작되고, 생민의 도탄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탈탈이 죽지 않았다면 어찌 천하에 오늘의 난리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글자 ‘왕(王)’의 작위를 봉해 주고, 시호를 정하며 공신(功臣) 호칭을 더해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 모두 그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나라에 일이 많아 회보(回報)를 하지 못한 채 나라가 망하였다.88

 

장구소(張九韶)가 말하였다.

탈탈(脫脫)은 의표(儀表)가 위대하고 헌걸찬 것이 천백인(千百人) 중에 뛰어나고 기국과 식견이 원대하여 사람들이 그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공로가 사직에 펼쳤지만 자랑하지 않았고, 지위는 신하의 최고에 올랐지만 교만하지 않았으며, 재물을 경시하고 성색을 멀리하였으며, 현인을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군주를 섬기는 데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하의 절도를 잃지 않았으니 비록 옛날의 대신일지라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오직 그가 여러 소인들에게 미혹되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기에 급급한 것을 군자는 비판한다.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