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가 송렴의 말을 따랐다면, 주씨(朱氏)가 어찌 270년에 그쳤겠습니까.

2023. 6. 23. 20:53이성계의 명조선

대명 존속기간   1368년에서 1662년  294년

조선 개국년도 1392년에서 270년   1662년

강한집 제23권 / 발미(跋尾) 조제고(詔制考)

천하를 효유한 조서〔諭天下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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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제왕이 천하를 통치할 때는, 중화(中華)가 안에 거하여 이적(夷狄)을 다스리고 이적은 바깥에 거하여 중화를 받들었으니, 이적이 천하를 다스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송(宋)나라의 국운이 옮겨감으로부터 원(元)나라가 북적(北狄)으로서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되자, 온 천하가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이겠는가. 실로 하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달인(達人)과 지사(志士)들은 오히려 관(冠)과 신발이 뒤바뀐 것에 대한 수치심을 품고 있었다.

이로부터 원나라의 신하들은 조상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강상(綱常)을 폐하고 무너뜨렸으니, 이를테면 대덕(大德) 때 장남을 폐하고 차남을 세웠고, 태정(泰定) 때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였으며, 천력(天曆) 때 아우가 형을 짐살(鴆殺)한 것이다. 심지어 아우가 형의 아내를 취하고 아들이 아비의 첩과 사통하는 일은 상하가 서로 습관적이어서 편안히 여기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그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의 윤리에 있어서 더럽고 어지러움이 심하였다.

임금 된 자는 이 백성의 주인이요, 조정(朝廷)은 천하의 근본이며, 예의는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도인데, 그 하는 짓이 저와 같으니 어찌 천하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겠는가. 후사들이 황음에 빠지게 되자 군신의 도를 잃었는데, 게다가 재상은 권력을 전단(專斷)하고, 헌대(憲臺)는 사적인 원한을 갚고, 관리들은 혹독하고 포학하였다. 이에 인심이 이반(離叛)하여 천하에서 병난이 일어나, 우리 중국 백성들로 하여금 죽은 자는 간뇌(肝腦)가 땅에 짓이겨지고 살아있는 자는 골육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비록 사람의 일로 인해 빚어진 바라 할지라도 실로 하늘이 오랑캐의 악덕(惡德)을 싫어하여 그들을 버리신 때이다. 옛말에 “오랑캐〔胡虜〕에게는 백 년의 운이 없다.”라고 한 것을 오늘날에 징험하니, 진실로 틀리지 않았도다.

이러한 때 하늘의 운수가 돌고 돌아서 중원에 기운이 왕성해졌으니, 마땅히 성인(聖人)이 출현하여 오랑캐 먼지를 순식간에 쓸어버리고, 중원을 회복하여 기강을 세우고 이 백성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12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히 해주는 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단지 너희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면서 아침에는 진(秦) 땅에, 저녁에는 초(楚) 땅에 처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가련하도다. 바야흐로 지금 하수(河水)ㆍ낙수(洛水)ㆍ관중(關中)ㆍ섬서(陝西) 지역에 비록 몇몇 호걸이 있다고 해도, 중국 조종(祖宗)의 성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오랑캐의 금수 같은 이름을 취하여 좋은 호칭으로 여기며, 원나라의 호칭을 빌려 사욕을 채우고, 무리가 있음을 믿고서 임금을 협박하며, 병력을 믿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서로 집어삼켜, 도리어 백성들의 크나큰 해가 되고 있으니, 모두가 중화의 진정한 주인은 아니다.

짐은 본래 회우(淮右)의 포의(布衣)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짐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금릉(金陵)의 지세(地勢) 빼어난 땅에 거한 지 지금 13년이 되었다. 서쪽으로는 파촉(巴蜀)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었으며, 남쪽으로는 민월(閩越)을 통하여, 한(漢)ㆍ면(沔)ㆍ호(湖)ㆍ상(湘)ㆍ양회(兩淮)ㆍ서(徐)ㆍ비(邳)가 모두 판도에 들어왔으니, 어느덧 남방은 모두 나의 땅이 되었다. 백성들은 점점 편안해졌고 군대는 점점 정예로워졌으며 식량은 점점 충족되었기에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잡았다.

이 중원의 백성들을 보건대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으니, 내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짐이 삼가 천명을 받들어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않고, 바야흐로 군대를 파견해 오랑캐를 축출하여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내고, 한관(漢官)의 위의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원수로 여겨, 가족을 끌고 북쪽으로 달아나 더욱 곤경에 빠질 것이 염려된다. 그러므로 먼저 너희들에게 알리노니, 군대가 너희들이 있는 곳에 이르러도 백성들은 피하지 말라. 짐이 엄숙하게 호령하여 추호도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나에게 귀의하는 자는 길이 중화에서 편안할 것이요, 나를 등지는 자는 스스로 변방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우리 중국 백성들은 하늘이 반드시 중국인에게 명을 내려 편안하게 할 것이니, 이적이 어찌 다스릴 수 있겠는가. 너희 백성들은 그것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몽고인이나 색목인(色目人)은 비록 중화의 족속은 아니지만, 천지간에 같이 태어났으니 능히 예의를 알고 신하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중국인과 함께 잘 돌보아 기르기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위는 태조황제의 조서입니다. 한림원 학사 문헌공(文憲公) 신(臣) 송렴(宋濂)이 지었습니다. 성의백(誠意伯) 신(臣) 유기(劉基)가 이르기를,

“이것은 개국하여 첫 번째의 조서이다. 넓고 크며 온화하고 점잖아서 천지의 사사로움 없는 기상이 있으며, 장엄하고 당당하며 환히 빛나서 진실로 제왕 일통(一統)의 규모이니, 마땅히 삼대(三代)의 훈고(訓詁)와 더불어 일월과 같이 높이 받들어 세상에 행하여야 할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하였습니다. 신(臣)이 생각하기에 명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유기를 초빙하여 참모로 두고 계책을 물었으며, 대장군 서달(徐達)ㆍ정서장군(征西將軍) 탕화(湯和)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려 원나라를 축출하게 하였으니, 이는 태조황제께서 천하를 평정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송렴으로 말하자면 용문산(龍門山)의 일개 포의(布衣)였습니다. 기발한 계략을 내어 승리를 거두는 것은 유기만 못하고, 군대를 일으켜 적을 제압하기론 서달이나 탕화만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염은 유학을 하는 선비로서 태조에게 인정을 받아, 항상 좌우에서 모시며 고문(顧問)에 대비하였습니다.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춘추(春秋)》의 설을 인용하여 태조에게 간여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진실로 예의로써 마음을 다스리면 삿된 말이 들어오지 않으며, 학교로써 백성을 다스린다면 화란(禍亂)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형벌은 우선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태조가 송렴의 말을 따랐다면, 주씨(朱氏)가 나라를 다스림이 장구해져서 상(商)ㆍ주(周)와 견주어도 되었을 것이니, 어찌 270년에 그쳤겠습니까.

그러나 역사에서 일컫기를,

“송렴이 손자 신(愼)의 일에 연좌되어 옥에 갇히고 사형을 받게 되었다.황후 마씨(馬氏)가 태조에게 말하기를, ‘송렴은 유자(儒者)로서 실로 죄가 없습니다.’ 하고 따라서 술과 고기를 들지 않았다. 태조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첩은 송 선생을 위하여 복사(福事)를 짓고 있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불쌍히 여겨 젓가락을 놓고 일어났다. 이튿날 송렴을 사면하고 무주(茂州)에 안치시켰다. 마황후가 송렴을 위하여 힘써 다툰 것은 참으로 현명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건대, 마황후가 힘써 다투지 않았더라도 태조는 반드시 송렴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태조는 송렴에게 정사(政事)를 담당할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송렴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다른 장점이 없으니 군막(軍幕)의 참모로 있는 것이 충분합니다.” 하고서 이윽고 벼슬을 그만두었습니다. 태조는 송렴이 작록을 하찮게 여기고 지위에 거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석방하여 그 몸을 보전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의 군주가 유자를 죽이지 않음은 태조를 법으로 삼음이 옳을 것이요, 공경대부가 작록을 가벼이 여김은 송렴을 스승으로 삼음이 또한 옳을 것입니다. 아, 송렴이 만약 녹봉과 지위를 탐하여 물러날 줄 몰랐다면, 태조가 비록 곡전(曲全)하려고 한들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D001] ()나라의 국운이 옮겨감으로부터 : 

송나라가 망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南宋)을 세운 것을 말한다. 송나라는 1127년 금(金)나라 군대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휘종(徽宗), 흠종(欽宗)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 감으로써 망하였는데, 이 해에 고종(高宗)이 응천부(應天府)에서 송 왕조를 다시 세우고 지금의 항주(杭州)인 임안(臨安)을 도읍으로 삼았으니, 이를 남송이라 하고 그 이전의 송을 북송이라고 한다.

[-D002] () 신발이 뒤바뀐 : 

원문의 ‘冠履倒置’는 가치관이나 본말이 뒤집힌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위치가 전도된 것을 가리킨다.

[-D003] 대덕(大德) …… 세웠고 : 

대덕은 원나라 제2대 황제인 성종(成宗)의 연호로 기간은 1297~1307년이다. 성종의 이름은 테무르이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손자이다. 쿠빌라이가 죽자 황태자였던 친킴이 그보다 일찍 죽었는데, 친킴의 장남 카말라가 밀려나고 동생인 테무르가 황제가 되었으니 이가 성종이다. 성종이 죽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서열에 따르면 성종의 형의 아들인 해산(海山)이 되어야 하는데, 황후가 성종의 아우의 아들 안서왕(安西王)을 황제로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중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후와 안서왕을 살해하고 해산을 세웠다. 해산이 무종(武宗)으로 제3대 황제이다.

[-D004] 태정(泰定) …… 시해하였으며 : 

태정은 원나라 제6대 황제 진종(晉宗)의 연호로 기간은 1323~1328년이다. 원나라 제5대 황제 영종(英宗)은 인종(仁宗)의 아들로 제위를 이었는데, 인종 대에 권력을 잡고 있었던 재상 테무데르가 죽자 그의 세력을 축출하려다가 오히려 그 일파인 어사대부(禦史大夫) 테시[鐵失] 등에 의해 남파(南坡)에서 피살되었다. 이를 남파지변(南坡之變)이라고 한다. 진종이 그 모의에 관여되었다고 한다. 진종은 쿠빌라이의 증손자로, 성종(成宗)에게 밀려난 카말라의 아들이다.

[-D005] 천력(天曆) ……  : 

천력은 원나라 제8대 황제 문종(文宗)의 첫 번째 연호로 기간은 1328~1330년이다. 문종은 무종(武宗)의 차남이며, 명종(明宗)의 동생이다. 6대 진종(晉宗, 1293~1328)이 죽은 후, 황제에 즉위하기로 약속된 형 쿠살라가 중앙아시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아우인 문종이 즉위하였다. 쿠살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돌아오자 문종은 양위를 하고 황태자가 되었으며 쿠살라가 즉위하여 명종(明宗)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은 며칠 만에 대신 엘티무르[燕鐵木兒]에 의해 독살되고, 문종이 다시 황제로 즉위하였다.

[-D006] 헌대(憲臺) : 

감찰기관인 어사대(禦史台)를 말한다.

[-D007] 12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 

주원장이 1356년에 남경을 점령한 후,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워서 스스로 오왕(吳王)이 되어 1367년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D008] 아침에는 …… 하였으니 : 

백성들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불안정한 생활상을 말한 것이다.

[-D009] 원나라의 …… 채우고 : 

코케테무르[擴廓帖木兒]라는 원나라 이름을 하사받은 왕보보(王保保)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 말기의 명장으로, 아버지는 한족이며,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조카로 그의 양자가 되었다. 지정(至正) 22년(1362) 찰한첩목아가 익도(益都)에서 살해당한 뒤, 그 군대를 이어받아 지휘했다. 익도(益都)를 공격해 함락하고, 변(汴)과 낙(洛)에 주둔했다. 남부의 주원장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1365년 순제(順帝)에 의해 하남왕(河南王)에 봉해졌으며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명나라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가지 항거하다가 죽었다. 《明史 卷124》

[-D010] 금릉(金陵) : 

남경(南京)의 옛 이름으로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다. 삼국 시대 손권(孫權)이 오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이후로 강남의 중심지였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도읍한 뒤, 계속해서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의 4대에 걸쳐 남왕조(南王朝)의 국도가 되어 남왕조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589년 진(陳)이 수(隋)에 의해 멸망되면서 파괴되었다.

[-D011] 민월(閩越) :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지역으로 중국의 남동부에 있다.

[-D012] ()ㆍ비() : 

양자강 하류에 있는 강소성(江蘇省)의 서주(徐州)와 비주(邳州)이다.

[-D013] 한관(漢官) 위의 : 

중화의 전통적인 문물제도를 뜻한다.

[-D014] 색목인(色目人) : 

중국 원대에 몽골인, 한인(漢人), 남인(南人 남송 사람) 이외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여기에는 탕구트, 위구르, 나이만 등 주로 서방계 사람들이 속하였다. 원나라 주민은 유라시아 대륙 각지의 인구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통치의 편의상 몽골인ㆍ색목인ㆍ한인ㆍ남인 등 네 개의 신분으로 나누었는데, 색목인은 몽골인 다음으로 한인보다 우위로 대우 받았고, 문무 각 방면에서 중용하여 몽골 정권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였다.

[-D015] 자고로 …… 것이다 : 

이 조서는 주원장이 오왕(吳王)이었던 오(吳) 원년(1367), 북벌할 때 반포한 격문으로 송렴(宋濂)이 작성하였다.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과 《명사(明史)》에는 제목이 〈유중원격(諭中原檄)〉으로 되어 있는데, 〈북벌격(北伐檄)〉으로도 불린다. 《大明太祖高皇帝實錄 卷26》

[-D016] 송렴(宋濂) : 

1310~1380. 명나라 때의 문인ㆍ정치가로 자는 경렴(景濂), 호는 잠계(潛溪)이다. 원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면서 저작에 종사하여, 《송학사전집(宋學士全集)》(42권)과 《편학류찬(篇學類纂)》, 《용문자(龍門子)》 등의 저서를 남겼다. 명나라 태조가 세력을 잡은 뒤 부름을 받고 남경에 가서 왕세자의 스승이 되고, 이후 태조의 고문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71세 때 그의 손자의 죄에 연좌되어 사천성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병사했다. 전기 작품 외에 〈열강루기(閱江樓記)〉와 작품집 《송문헌공전집(宋文憲公全集)》(53권) 등이 있다. 《明史 卷128》

[-D017] 유기(劉基) : 

1311~1375. 명나라 초기의 정치가이며 우언(寓言) 작가이다. 절강성 처주(處州) 출신으로 자는 백온(伯溫),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원(元)나라 문종 때 진사과에 합격하고, 관직을 지냈지만 여러 차례 배척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숨어 지냈다. 1358년 주원장(朱元璋)이 금화(金華)와 여수현(麗水縣)을 공략한 뒤에는 주원장의 군사(軍師)가 되어 중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명나라 건국 후 어사중승(御史中丞)과 태사령(太史令) 등의 관직을 맡아 역법(曆法) 제정과 군정체제 건립에 공헌했다.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졌으며, 1375년에 귀향하여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성의백문집(誠意伯文集)》과 우언체 산문집 《욱리자(郁離子)》가 있다. 《明史 卷128》

[-D018] 훈고(訓詁) : 

《서경(書經)》의 6체(六體) 가운데 훈(訓)과 고(誥)를 가리킨다. 즉 〈중훼지고(仲虺之誥)〉ㆍ〈탕고(湯誥)〉ㆍ〈이훈(伊訓)〉ㆍ〈대고(大誥)〉ㆍ〈강고(康誥)〉 등의 가르침을 말한다.

[-D019] 서달(徐達) : 

1332~1385. 명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자는 천덕(天德)이며, 호(濠) 지방의 농민 출신이다. 22세 때 곽자흥(郭子興)의 지배 아래 있던 주원장의 부하가 되어, 손덕애(孫德崖)에게 붙잡힌 그를 구출한 뒤로 신뢰를 받으며 전공을 세웠다. 1361년 주원장이 오국공(吳國公)이 되자 강남행추밀원사가 되었고, 주원장이 오왕(吳王)이 되자 좌상국(左相國)이 되었다. 1367년 소주(蘇州)의 오왕 장사성(張士誠)을 공략한 무공으로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다. 연이어 원군(元軍) 토벌에서는 25만의 군세를 총지휘했고, 주원장이 응천부(應天府) 즉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자 무관 제일의 자리를 차지했다. 1370년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고 5000석의 녹을 받았다. 《明史 卷125》

[-D020] 탕화(湯和) : 

1326~1395. 자는 정신(鼎臣)으로 호주(濠州) 종리(鍾離) 사람이다. 명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군사장령(軍事將領)이었다. 곽자흥의 휘하에 있다가 주원장을 따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공을 세웠다. 홍무 11년(1378)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다. 《明史 卷126》

[-D021] ()ㆍ주() : 

상나라는 기원전 1600~기원전 1046년까지 554년가량 존속하였고, 주나라는 동주(東周)ㆍ서주(西周) 합하여 기원전 1046~기원전 256년까지 790년가량 존속하였다.

[-D022] 송렴이 …… 되었다 : 

홍무 13년(1380)인 71세 때, 그의 장손인 송신(宋慎)이 호유용(胡惟庸)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자, 황제가 송렴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호유용은 주원장의 건국을 도운 인물로 정치적으로 뛰어나 좌승상에 올랐으나, 1380년 모반혐의로 처형되었고 연좌제에 의해 그 무리가 모두 살해되었다.

[-D023] 황후 마씨(馬氏) : 

1332~1382. 이름은 수영(秀英)이다. 원나라 말기 반란군의 대장이었던 곽자흥(郭子興)의 수양딸로, 주원장이 곽자흥의 휘하에 들어가 비범함을 보이자 곽자홍이 두 사람을 혼인시켰다. 지혜로웠고 검소하였으며, 주원장에게 살상을 경계시키는 등 현처(賢妻)로 높이 평가된다. 51세에 병사한 이후 주원장은 정후(正后)를 들이지 않았다. 《明史 卷113》

[-D024] 곡전(曲全) : 

자신의 뜻을 굽혀서 일이 이루어지도록 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