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4. 00:13ㆍ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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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8년 신미(1871) 5월 15일(갑진) 비
08-05-15[13] 연생전에 영의정 김병학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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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시(巳時).
상이 연생전에 나아가 진강하였다. 이때 입시한 영의정 김병학(金炳學), 강관 조기응(趙基應), 참찬관 윤상정(尹相定), 검토관 정학묵(鄭學默), 가주서 한기동(韓耆東), 기사관 백시흡(白時洽), 별겸춘추 김영목(金永穆)이 각각 《시전》제 1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
“황해도에 와서 정박한 당선(唐船) 가운데 흑귀자(黑鬼子)와 백귀자(白鬼子)가 있었는데, 대발국(大發國)에서 표류해 왔다고 한다. 그 배로 도로 실어 보냈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이 정박한 곳이 곧 철도인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곧 장연(長淵)과 백령(白翎)의 포구(浦口)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일찍이 어느 고을 수령을 역임하였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신도 첨사(薪島僉使)를 역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도(薪島)는 어느 고을과 가장 가까운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용강(龍崗)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철도와 동진(東津)의 지형을 보았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철도는 곧 황해도(黃海道)입니다. 동진이 비록 신도(薪島)와 같은 도(道)이지만 서로 500여 리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형편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전해오는 말로 대략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도는 중국 국경과 몇 리쯤 떨어져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신진(薪津)은 황해 수영(黃海水營)의 규례처럼 바람이 높은 6개월 동안은 육진(陸鎭)으로 나가서 방수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한 6개월 동안은 도진(島鎭)으로 들어가 방수합니다. 그런데 도진과 중국의 경계와는 수로(水路)로 2000여 리에 불과하여 인가의 밥짓는 연기가 서로 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도 큰 바다인데 서양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혹 본 적이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신이 신진(薪津)에 있었을 때에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횡도(田橫島)는 신진(薪津)과 가까운 곳에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비록 문적(文蹟)에 소상히 실려 있지 않지만,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신도가 곧 전횡도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도(椴島)도 그 근처에 있는가?”
하니, 윤상정이 아뢰기를,
“바다의 동서(東西)가 각기 달라,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른 기운이 성하면 사악한 기운은 저절로 소멸되므로, 양추(洋醜)가 소멸되는 것은 반드시 그런 날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주부자(朱夫子)가 이르기를, ‘중원(中原)의 오랑캐는 몰아낼 수 있지만, 한 개인의 사욕(私慾)은 억제하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욕을 억제하면, 양추들의 출몰은 근심할 것이 못 되며 또한 머지않아 소멸될 것입니다.”
하였다
계산기정 제2권 / 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4일-24일]
13일(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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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고 밤에 눈 뿌림. 송산보(松山堡) 23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고교보(高橋堡) 36리를 가서 묵었다.
…..
고교보(高橋堡)
이곳에서부터 남쪽에는 발해(渤海)가 있는데, 넘쳐 흐를 듯하게 높다. 바다 남쪽이 곧 산동(山東)의 여러 읍들로 옛날의 제(齊) 나라와 노(魯) 나라의 땅이다. 동쪽은 우리나라 황해도 연안과 서로 통하니 숭정(崇禎) 이후에 명 나라로 들어가던 길이다.
주-D002] 전횡도(田橫島)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즉묵현(即墨縣) 동북쪽 바다 속에 있다. 진말(秦末) 유방(劉邦), 한 고조(漢高祖)의 장수 한신(韓信)이 제(齊) 나라를 격파하고 제왕을 사로잡아 가자 전횡(田橫)이 자립(自立)하여 제왕이 되었다. 유방이 제위(帝位)에 오르자 전횡은 부하 500여 명을 데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이 섬에서 버티고 살았다. 제위에 오른 유방은 사람을 보내 백방으로 전횡을 설득하여 그를 불러들였다. 전횡은 그를 설득하러 온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낙양(洛陽) 30리를 남겨 두고, 자기가 처음에는 한왕(漢王) 유방과 같이 남면하여 고(孤)를 청했었는데, 이제 북면하여 그를 섬긴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섬에 남아 있던 500여 명의 부하들도 다 자결하여 그 섬을 전횡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장관전서 제66권 / 입연기 상(入燕記上)
3일(임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32리를 가 연산역(連山驛)에서 점심을 먹고, 38리를 가 영원주(寧遠州)에서 유숙했다.
○ 고교보(高橋堡)에서 12리쯤 가자 남쪽으로 큰 바다가 보였다. 검은 파도가 출렁거렸고 배돛이 까마득히 보였다. 섬이 있고 그 섬에는 5개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전횡도(田橫島)라고 전해온다. 황해도(黃海道) 백령도(白翎島)에서 이 섬이 바라보인다고 하나 믿을 수 없다.
여기서 연산역까지는 12리이다. 길 왼편에 장춘교(長春橋)가 있고 홍예문 3개가 들판 가운데 서 있었다. 시내가 말라 다리를 오랫동안 폐기한 채 통행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영원성까지는 5~6리쯤 된다. 길 남쪽에 노아적(弩兒赤)의 구혈대(歐血臺)가 있다. 산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기봉(岐峯)보다 조금 낮았다. 북쪽에 있는 대(臺)는 낮고도 넓었고, 남쪽에 있는 대는 높고도 좁았다. 좁은 것은 연대(煙臺)이다. 산 아래 길 옆에는 영녕사(永寧寺)가 있다.
관연록 권상 / 1804년(순조4, 갑자)
12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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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리를 가서 연산(連山)에 이르고, 30리를 가서 영원(寧遠)에서 묵었다.
동이 틀 무렵 출발해 탑산소(塔山所)에 이르렀다. 오호도(嗚呼島)를 바라보았는데, 바로 전횡(田橫)의 옛 섬이라고 하였다. 길옆에 탁씨(卓氏)의 정문(旌門)이 있었다. 돌 기둥과 돌 처마로 얽어놓았고, 위에는 ‘윤음(綸音)’이란 두 글자를 걸어 놓았다. 대개 황제의 칙령에 따른 것이다. 또 한 관리를 만났다. 한림거(翰林車)를 탔는데 세 면에 큰 유리를 붙이고 그 안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대여섯 명이었는데, 모두 말을 내달려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두(馬頭)더러 탐색해 오게 했더니 심양장군(瀋陽將軍)이 바로 황성(皇城)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 고전원문 > 만기요람 > 軍政編四 > 海防 > 최종정보
공충도(公忠道) 서천(舒川)의 서천포(舒川浦) 고려 시대에는 장암진(長巖鎭)이라고 하였다. 평장사(平章事) 두영철(杜英哲)이 일찍이 놀 때에 한 노인과 잘 지냈는데, 그가 부름을 받아 돌아갈 때에 노인은 그에게, “구차스럽게 승진하기에 애쓰지 말라.” 하였고, 그는 노인에게,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는데, 영철은 뒤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까지 이르렀다가 죄를 얻어 귀양을 가게 되서 노인에게 들렸더니, 노인은 노래를 불러서 그를 놀려 주었다. 악부(樂府)에 장암곡(長巖曲)이 있다.비인(庇仁)의 도두음곶(都豆音串) 세종 원년(1419년)에 왜구가 침입하여 병선(兵船)을 불태우자 만호인 김성길(金成吉)이 아들 윤(倫)과 함께 힘을 다해 싸우다가[距戰]창에 부상하고 물에 들어가 자맥질[泅水]을 하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윤은 적 3명을 쏘아[射] 죽이고 돌아보니 아버지가 벌써[已] 물에 떨어져 있으므로 이미 죽은 줄만 알고 물에 빠져[投] 죽었다.남포(藍浦), 보령(保寧)의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 공중도의 명승지다.홍주(洪州), 결성(結城), 홍주의 석관포(石串浦)각 도의 조선(漕船)이 돌아와 정박하는 곳이다 ㆍ모산당포(母山堂浦)태종(太宗) 8년(1408년)에 왜의 선박이 와서 배를 대자 현감 김자(金泚)가 싸워 물리쳤다 ㆍ원산도(元山島) 남북의 선박들이 지나는 곳이다. 군량 창고가 있다. 수영(水營)의 우후(虞侯)가 겨울과 봄에 들어왔다가 여름엔 영으로 돌아간다 ㆍ삽시도(揷是島)사슴새끼를 기른다. 전하기를, “제주에서 실어다가 이 섬에 내려놓은 것이라.” 한다 ㆍ오호도(嗚呼島)땅이 대단히 비옥하다. 닥나무와 화살감 대[竹]가 생산된다. 옛 성의 남은 터[遺趾]가 있는데 전설엔 전횡도(田橫島)라고 한다.해미(海美), 서산(瑞山)의 평신진(平薪鎭)ㆍ안민곶(安眠串) 작은 봉우리가 둘러섰고 계곡이 매우 많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엔 경치[境]가 매우 아름답고 금모래가 있으며, 석웅황(石雄黃)ㆍ청등(靑藤)이 생산된다. 고려 시대부터 재목을 길러 궁궐과 선박의 재료에 많이 썼다. 어민이 수천 호에 이르고 남북을 왕래함에는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게 된다. 이지함(李之函)이 일찍이[嘗] 이 섬의 산수를 좋아하여 며칠 씩 머무르며 구경하다가, “뒤에 반드시 이 뒷줄기를 파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말하였는데, 그 뒤에 태안군 이방(吏房)인 경령(景齡)이 감영에 건의하여 육지에 붙은 데를 파내서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다 ㆍ요아량(要兒梁)수군절도사가 군병을 나누어 여기에 주둔시켰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ㆍ파지포(波知浦)지금은 폐지되었다 ㆍ대산곶(大山串) 소금가마를 두었다 ㆍ간월도(看月島)달 경치가 가장 좋은[勝] 곳이다. 백련(白蓮)이란 작은 암자가 있는데, 중 무학(無學)이 출생한 곳이며, 송(宋) 나라 사람 정신보(鄭臣保)가 자고 간 곳이기도 하다 ㆍ고파지도(古波知島)옛적엔 파지도(波知島)에서 군병을 나누어 주둔[戍]시켰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태안(泰安)의 안흥진(安興鎭)ㆍ소근포(所斤浦)ㆍ부포(釜浦)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804년)에 갯물이 피로 변하였다 ㆍ굴포(掘浦)고려 때 수로가 매우 험하여 해상 운조선이 여러 번 파괴되므로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뱃길을 내려고 산맥을 뚫었는데 거의 10분의 7쯤 파내다가 그만 준공을 눈앞에 두고 중지하였는데, 본조에서 굴포에 남과 북에 2개의 창고를 설치하여, 공충도(公忠道)와 전라도(全羅道)에서 올라오는 세납(稅納)을 남쪽 창고에 받아 놓았다가 우(牛)마차로 북쪽 창고에 운반케 하려고 수년 동안 실시하다가 역시 폐지하다 ㆍ안흥량(安興梁)뱃길이 위험하다 하여 옛날엔 난행량(難行梁)이라고 하였다. 운조선이 여기에 와서 여러 번 파괴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이름이 싫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ㆍ백사정(白沙汀)가운데 큰 못이 있어 춘나물[蓴]이 나고 못 양 옆엔 해당화가 만발한다. 해방풍(海防風)이 나는데 그 새싹을 나물로 먹으면 매우 향기롭고[香] 맛나다. 서산, 해미, 당진(唐津)의 당진포(唐津浦) 지금은 폐지되었다 ㆍ난지도(難知島)옛적엔 수자리[兵戍]를 두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면천(沔川)의 대진포(大進浦),홍주(洪州), 아산(牙山)의 공세관포(貢稅串浦), 직산(稷山), 평택(平澤).
> 고전번역서 > 지봉집 > 지봉집 제10권 > 조천록 > 최종정보
지봉집 제10권 / 조천록(朝天錄) 정유년(1597, 선조30) 8월부터 무술년(1598, 선조31) 정월까지이다.
이제묘에 걸린 편액의 시에 차운하다〔次夷齊廟板上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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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이 앞다퉈 주에서 떠났지만 / 人心爭去紂
대의는 상나라를 보존함에 있었다오 / 大義獨存商
무엇보다 한스런 건 반계 노인이 / 最恨磻溪叟
위수 물가에서 낚시 하다 나옴일세 / 來從渭水陽
삭풍이 몰아치니 혼백이 괴롭고 / 朔風魂魄苦
봄비가 내리니 고사리가 향기롭네 / 春雨蕨薇芳
덧없는 죽음은 전횡의 문객이니 / 浪死田橫客
우스워라 저 구구한 반양이여 / 區區笑半洋
[주-D003] 덧없는 …… 반양(半洋)이여 :
‘전횡(田橫)’은 진(秦)나라 말엽 때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아우로, 전영이 죽자 대신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항우(項羽)를 쳐서 제나라 옛 땅을 회복하였는데, 한 고조(漢高祖)에게 반기를 들다 패망하였다. ‘반양(半洋)’은 전횡과 그의 문객들이 한 고조를 피해 살았던 섬인 반양산(半洋山)으로, 일명 전횡도(田橫島) 또는 오호도(嗚呼島)라고도 한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이전에 제나라 왕으로서 그와 맞섰던 전횡이 500명의 문객을 거느리고 멀리 반양산으로 들어갔는데, 유방은 후환을 염려한 나머지 그를 회유하여 낙양으로 불렀다. 전횡이 이에 응하여 문객 두 명과 함께 낙양 가까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한왕(漢王)과 남면(南面)하여 왕이라 칭했는데, 이제 와서 북면(北面)하여 그를 섬길 수는 없다.” 하고는 자결하였다. 수행한 문객 두 명은 전횡의 무덤 곁에서 자결하고, 나머지 섬에 있던 문객들도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자결한 고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 고사를 원용하여 대의를 지키다가 죽은 백이, 숙제와 비교해 볼 때 전횡과 같은 인물을 위해 죽은 전횡의 문객들은 부질없고도 구차한 죽음을 택한 것이라 말한 것이다. 《史記 卷94 田橫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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